대통령 김영삼은 서울 동작동 서달산 자락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했다.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거산(巨山)이다.
1954년 거제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박정희 정권 시절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마광수 등의
문학가를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대폭 허용하였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왼쪽에는 '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가 들어섰다.
‘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 전면에는 김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을 엄선해 넣었다.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나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웠다.
나는 또한 부끄러운 타협을 한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 내고자 하는
내 신념을 한 번도 꺽어 본 적이 없었다."-2000.1 회고록-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않는 한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1969.6.21 초산테러 국회 신상발언’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1979.5.30.신민당 총재 수락연설’-
뒷면에는 김정남 전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작성하고 서예가 신두영이 쓴 추모글도 담겼다.
"김영삼대통령의 문민 민주화와 변화와 개혁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한류가 온 세계로 뻗쳐 흐르는 전기가 되었다."
-그의 추모글 중에서-
기념비의 두 측면에는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民主主義(민주주의)'와 '大道無門(대도무문)' 휘호가 적혔다.
오른 쪽에는 '대통령 김영삼의 묘'비가 들어섰다.
묘비명 ‘대통령 김영삼의 묘’ 글씨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체다.
후면에는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을 그린 묘비문이, 측면에는 약력과 가족사항이 새겨져 있다.
그 묘에는 그의 약력과 가족사항이 기록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안장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서 커다란 알 모양의 돌덩이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의 묏자리를 정한 지관(地官)인 황영웅 영남대 환경보건대학원 풍수지리전공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알 모양의 돌이 7개 이상 많이 나왔다”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대통령의 영혼이 밝아지는 길한 현상”이라고 밝혔다.
황 교수는 “봉황이 알을 품는다는 전설에나 있는 이야기가 실현됐으니 대단한 현상”이라고 했다.
황 교수는 일찍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묏자리를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품은 알에 비유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황 교수는 “동작동 국립묘지가 옛날엔 ‘동작릉’으로 불렸다”며 “동작릉은 공작 혹은 봉황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해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서가한 뒤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묘역이 조성되면서
풍수상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봉황알로 추정되는 바위 덩어리가 출토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5년 11월 25일 한국일보 안아람기자의 관련 기사를 아래에 그대로 옮긴다.
"묘소가 들어설 곳은 우백호(右白虎)보다 작은 좌청룡(左靑龍) 능선에 자리잡고 있어 장손보다는 차손이 덕을 볼 곳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소 조성작업이 한창인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3묘역 주변의 지세를 둘러 본
한국풍수지리연구원 전항수 원장의 말이다. 전 원장은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의 형상이 좌청룡을 감싸 안고, 좌청룡 측 능선도 몇 겹으로 아우르고 있어 길지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우백호가 더 큰 점을 감안하면 장손보다 차손이 덕을 볼 입지”라고 했다.
차남 현철씨가 김 전 대통령 묏자리의 음덕을 입는다는 의미다. 현충원의 입지는 풍수학계에서 이미 명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강을 마주보고 우뚝 솟은 화장산 봉우리 좌우로 이어진 좌청룡ㆍ우백호의 산세가 마치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산인 화장산 봉우리는 공작봉으로 불린다.
전 원장도 “겹겹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작약 한 송이가 만발한 형세“라며 명당으로 평가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능선은 산의 기운이 맥을 따라 흐르다 한 군데 뭉쳐진 곳이어서 길한 위치로 통한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온 종일 햇볕이 드는 곳도 명당의 한 조건이다.
김 전 대통령의 묘가 장군 제3묘역의 능선에서 남향으로 자리잡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전 원장은 “땅 속의 기운을 보여줄 수 있는 토양 상태와 채광, 통풍 등을 정확하게 살펴봐야 진짜 명당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현충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의 묘역 조성 작업에 들어가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한 상태다.
김 전 대통령의 묘소 결정에는 영남대 환경보건대학원 황영웅 풍수지리전공 교수가 역할을 했다.
그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조성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황 교수는 “2012년 입원을 앞둔 김 전 대통령, 현철씨와 함께 현충원을 둘러보고 지금 위치를 점 찍어 뒀다”고 귀띔했다.
한 달 전쯤에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이곳을 찾아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의 묏자리는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와 직선거리로 약 300m 떨어져 있다.
양김은 죽어서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영면을 취하게 된 셈이다.
황 교수는 “두 전직 대통령의 묘소가 마주보는 것 같지만 두 묘소 모두 관악산을 바라 보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며 “용이 다소곳이 돌아앉아 조상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동작동 현충원은 풍수상으로 흔히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으로 거론된다.
어떤 땅을 동물의 형상으로 비유하는 것을 풍수이론상 물형론(物形論)이라고 하는데,
일반인에게는 복잡한 풍수논리 대신 비유를 들어 단칼에 제시한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선호된다.
현충원이 있는 동작동의 이름에 이미 ‘봉황’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어, 현충원이 입지할 때부터
이 터가 봉황이 알을 품은 자리라고 얘기되어 왔다.이번에 나온 봉황알은 언론에서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방송한 측면은 있으나,
풍수적으로 절대 그냥 붙인 말이 아니다.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도 인용한 <옥수진경(玉髓眞經)>에 보면 “봉황의 형(形)은 구슬 같은 붉은 돌이 있고,
혹 오색 광채가 서려 있고, 혹 닭의 간(肝)처럼 적홍색이다(鳳形有石赤如珠 或如五色光彩舒 或如?肝赤紅色)”라고 하여
봉황형의 알돌을 정확히 제시했다. 그 알돌도 색깔에 따라 껍질이 벗겨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2016년 2월 9일 온라인 중앙일보 기사 [학계논쟁] YS 묘소 논쟁과 풍수의 존재 이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