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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향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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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이야기 스크랩 기타 영국의 명 설교자 - 찰스 스펄전
하늘편지 추천 0 조회 50 12.09.07 11: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 영국 에섹스 캘비돈~ 1892.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는 스펄전 목사는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으로, 17세에 워터비치 침례교회의 설교자로 부임.

20세엔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담임목사로 괄목할만한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1857년 10월 7일 크리스탈 팔레스에서 23,654명의 청중에게 설교했으며 당시 런던 역사상 최대 인원이 참석한 설교로 몰려오는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엑스터홀, 써레이 가든즈등으로 예배 처소를 옮겨 사용하다가 1861년 태버내클을 건축하였다.

 태버내클은 매주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오는 신도가 약 10,000명으로 교인들에게 다음 주에는 새신자를 위해

예배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했지만 결국 몰려드는 성도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만 해도 14,460명이나 되었다.

 

Q. 안녕하세요? 목사님. 영국에서 최고의 설교자라 불리시는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A.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Q. 스펄전 목사님은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셨고 이후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며 교회를 부흥시키셨습니다.

또한 1861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메트로폴리탄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를 건축하셨죠.

 

 

현재의 메트로폴리탄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

 

 거기서 고아원과 목회자 양성학교를 운영하고 ‘컬포쳐스 협회’를 설립하여 영국 구석구석에 성경과 전도책자를 보급하셨고요.

 이 밖에도 목사님과 목사님의 교회에서 복음과 세상을 위해 이뤄낸 일들은 이 자리에서 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수합니다.

 

 

스펄전 설교 당시 메트로폴리탄 교회

 

이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사역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굳은 신앙의 근원이 궁금하네요. 목사님은 모태신앙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A. 네, 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거든요.

 저희 집은 저까지 포함해 1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9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저는 목사의 길을 걷고 계신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스탬본 교구 안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사였죠.

거기서 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저를 옆에 두려고 하셨어요.

성도가 찾아올 때나 다른 목사님들이 찾아와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이야기 할 때도 제가 옆에 있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죠.

  

 

 

St. Mary the Virgin church, Kelvedon

 

 저는 종종 할아버지가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목사관 뒤편 정원 한 구석에서 조용히 묵상하시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목회를 할 때, 인상적인 본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성경을 떠난 신학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시며 철저하게 성경 중심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런 할아버지의 신앙관은 저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말씀 안에서 신앙을 다질 수 있었어요.

 목사관 한쪽에 있는 할아버지의 서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죠.

그곳에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폭스의 <순교자의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당시 단어 하나도 제대로 몰랐지만 책에 푹 빠져있었어요.

제가 천로역정을 처음 펴들면서 본 것은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그 사람이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가볍게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제가 느낀 기분이란.

 책은 저에게 감동과 전율과 함께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을 보며 자극을 받게 하기도 했고요.
할아버지와 함께 스탬본 교회에서 5년 동안 지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톨스베리에서 콜체스터로 이사를 했지만 여전히 저희 집은 어려웠고 심지어 아버지는 목회를 하시면서 광산 일을 병행하셨죠.


그 때 어머니는 학교교육뿐 아니라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열심을 품고 우리 형제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온 힘을 기울이셨죠.

저는 어머니로부터 늘 성경말씀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언제나 말씀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시던 기도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어머니가 심판의 날에 우리들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기도는 제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 목에 팔을 감고서 기도하곤 하셨는데 그때의 포근한 어머니의 숨결은 저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살아 있어요.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서 늘 이렇게 기도해주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아이들이 만약 죄악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이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인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혹 이 아이들이 주님 안에서 살게 되지 않는다면 심판의 날에 제가 그 증인으로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우리 아이들이 하나도 실족하지 않도록 각별히 보살펴주소서.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깨우쳐주소서.’
-규장 신앙위인 북스 찰스스펄전, 오병학, p.25.

 

 

 

Q. 믿음의 가정 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어려운 형편이 학업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나요?

 A.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와 교육열이 대단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게 두시지 않으셨죠.

 앞에서 말했지만 아버지는 목회와 광산 일을 겸하시면서 저희를 양육시키실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콜체스터에서 한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선생님의 설명을 조금만 들어도 이해가 잘 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쯤 지나서 보통학교보다 수준이 높은 스톡웰 학교에 들어갔죠.

 저는 라틴어와 유클리드 기하학이 특히 좋았어요.

그렇게 스톡웰에서 4년 동안 공부하며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4살이 되자 부모님은 삼촌이 교장으로 계신 세인트 어거스틴 농업학교에 다니게 해주셨어요.

세인트 어거스틴 농업학교는 런던에서 남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메이드스톤에 위치한 학교였습니다.

 

Q. 따로 신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군요. 그럼 목사님은 언제부터 목회의 길을 꿈꾸게 되셨나요?

A. 네, 저는 따로 신학대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니던 학교도 목회를 시작하면서 자퇴하게 됐습니다.

작정하고 신학공부를 하다가 목회자의 길을 걸은 다른 목사님들과 달리 저는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맡게 됐죠.

 사실 저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제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된 것은 16살 무렵에 뜨거운 회심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어거스틴 농업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49년 뉴마켓에 있는 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죠.

저는 철학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회심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여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봤지만 저의 알 수 없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뉴마켓 학교 인근에 열병이 번지면서 임시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저는 그 기간을 집에서 보내기 위해 콜체스터로 돌아왔죠.

 그건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로 그 기간에 한 작은 교회의 예배에 출석했다가 놀라운 감동으로 구원을 체험했으니까요.

 그날은 주일이었고, 아침부터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습니다.

그래서 전 예전 교회가 아닌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감리교회로 향했죠.

성도들의 큰 찬송 소리를 들으며 착찹한 마음으로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도 목사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보라가 심해서 길이 막히는 것 같았죠.

 그때 몹시 마른 체격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이 예배를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설교한 말씀은 이사야서 45장 22절 말씀이었어요.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청년은 하나님을 대변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성도들에게, 저에게 열성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오직 나를 바라보라.

 불쌍한 죄인아,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예배 중에 설교하던 청년이 갑자기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며 저더러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부르짖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구원을 체험했어요.

‘주를 바라보라’는 한마디가 저의 감겼던 두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라크 강변에 있는 아일럼 나루터에서 다시 침례를 받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했죠.

그 무렵,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며 서서히 설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Q. 나중엔 담임목사 직임도 맡으셨다고 들었는데요.

17살의 나이에 담임목사 직임을 맡은 것도 놀라운데 신학대도 나오지 않으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담임목사직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요?

 

 

 

A. 1850년에 저는 아버지의 권유로 콜체스터에서 케임브리지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학교를 운영하고 계셨어요.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인트 앤드루 침례교회에 다니게 됐죠.
그 교회에는 ‘평신도 설교자 연합회’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저는 그 모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무엇보다 회심후에는 늘 뜨거운 전도의 열정이 일었습니다.

‘평신도 설교자 연합회’는 제가 활동하기에 딱 알맞은 기구였어요.

그런데 정식 교인이 되어 활동한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 주일학교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콜체스터에서 주일학교 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죠.

그런데 연이어 평신도 설교까지 맡게 되었어요.

많이 부담됐지만 갑자기 설교자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죠. 템버셤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하는 설교였고 얼떨결에 맡은 설교였지만 온 정성을 다했어요.

그 설교가 제 설교자 인생의 첫 경종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템버셤에 있는 오두막 설교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설교를 하게 됐었습니다.

세인트 앤드루 침례교회의 평신도 설교자 연합회에서는 정기적으로 15개 정도의 마을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어요.

저는 그곳에서 거의 모든 설교를 도맡았습니다.

전도활동이 바쁘다보니 학교에서 고부하는 시간보다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며 설교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죠.
그리고 1851년 10월에 워터비치 마을에 세워진 침례교회의 요청을 받아 그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담임목사 자리가 비어 있었고 주일마다 설교자가 필요했죠.

저는 서너 차례 그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성도들이 계속 제 설교를 듣길 원하더군요.

시간이 얼마 지나자 교회의 책임자가 저에게 담임목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당시 저는 학생의 신분이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했고요.

 하지만 그분은 주님의 일을 하는데 경험과 연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끝까지 저를 설득시켰죠.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요청에 수락했습니다.

 


Q. 외형적인 자격 하나 없이 오로지 설교의 힘으로 담임 목사직을 맡으셨군요. 역시 놀랍습니다.

20살이 되던 해, 목사님은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평생 담임 목사직을 맡으셨습니다.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당시 영국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치던 큰 교회였는데요.

 대학도 나오지 않은 어린 목사라는 비난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3살의 찰스스펄전

 

 

 

A. 저도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목사직을 놓고 며칠 동안이나 고민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나이도 어리고, 자격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교회를 맡기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처음엔 3개월 동안만 시험 삼아 목회직을 맡게 된 겁니다. 확신이 서질 않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마다 새 성도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점점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저를 적대시하는 무리들도 늘어나는 듯 했어요.

역시 제가 임직한 지 얼마 안 되어 저의 성직 수여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몇 몇 성도들도 저에게 성직 수여를 받으라고 권유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저는 위로부터 신령한 직분을 수여받은 이상 다른 것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정식 절차를 밟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제가 맡은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어요.

 뉴 파크 스트리트의 임시 목사직도 3개월이 지나자 영구히 맡게 되었습니다.

 

 

 

Q. 그것 참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 후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A. 그 후에도 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신문사에서까지 저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실어 사역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죠.

어떤 신문은 제 목회를 가리켜 ‘당나귀 축제의 현대판’이라고 비꼬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설교가 부도덕하고 지나치게 과장된 설교라는 비난도 있었고요.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과 저의 신학적인 부분을 공격하는 말들이었어요.

 저더러 독선적인 칼빈주의자라며 이단자로 모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를 욕하는 말들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죠.

제가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저로 인해 성도들이 다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성도가 많아지자 우리 교회는 증축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서레이 가든 음악당’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게 됐죠. 처음엔 엑시터 회관을 빌렸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부 수용할 수가 없었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반대자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저의 사역을 저지하려 들었습니다.

그들의 방해에도 음악당에서의 개회 예배는 차질 없이 준비됐죠.

 마침내 예배 당일 날이 돌아왔고 강단 위에 선 저도 사람들의 숫자에 압도 당할 정도로 많은 성도들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잠시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고 평소대로 기도로 예배를 시작했죠.

 그때 난데없이 ‘불이야!’하는 외침이 들렸어요.

처음에는 발코니 쪽에서 들리던 외침은 아래층에서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사망자만 7명이고, 중상을 당하여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30여 명입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이 떨리고 땀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 일 후에 저는 서둘러 새 교회 건축을 계획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사는 3년 동안이나 진행되었고 그 동안 별다른 사고 없이 서레이 가든 음악당을 사용했습니다.

 새 교회는 1861년 완공되었고 저는 그 교회 이름을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으로 지었죠.

 

 

 

Q. 목사님을 두고 이런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던 이유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이 늘자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악담을 쏟아냈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역으로도 힘드셨을 텐데 반대세력들의 방해와 비난 때문에 더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설교만 하신 게 아니라 많은 책과 월간지, 그리고 설교집까지 내셨잖아요.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셨고요. 그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 혼자선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월간지 <검과 삽>은 1865년에 시작해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꾸준히 발행됐죠.

우리는 그 월간지를 통하여 메트로폴리탄 교회의 활동을 알리고 다른 교회와도 교류하길 원했습니다.

이런 일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죠.

 검과 삽이라는 이름에는 검을 들고서 외부의 적들을 대적할 것이며 안으로는 삽을 들고서 황폐한 예루살렘 성벽을 회복시키는 일에 정진할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아원 일도 그래요. 저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 신문의 기사를 보고 빈민층 아이들, 고아들의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어요.

집 없는 아이들이 거리 한편에서 낡은 넝마자락을 몸에 두른 채 밤을 지새웠고 날마다 시장 쓰레기 더미에 모여들어 음식 찌꺼기를 추려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시간에 고아들을 위한 새로운 사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성도님들께 권면했죠.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얼마 안가 낯선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힐야드라는 부인이었는데 그가 아이들을 위해 기금을 내놓았죠. 금액이 상당했습니다.

2만 파운드를 내놓으셨어요. 기도드릴 때 하나님이 친히 도우실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기도의 응답이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죠.


Q. 사역을 하시면서, 또는 살면서 목사님에게 가장 힘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A. 가족들입니다. 제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저에게 늘 가르침을 주셨고 사랑으로 길러 주셨어요

. 어린 나이에 목회 일을 하면서 지칠 때도 많았는데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죠.
그리고 제 아내가 있습니다. 아내와는 1856년에 결혼했습니다.

 아내가 현명한 내조자였기 때문에 저는 결혼 후 더욱 사역에 정진할 수 있었죠.

 

Q. 아, 수잔나 톰슨 사모님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이 늘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고 말하곤 했죠.

 그래서 목사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유용하게 쓰임받기만을 기도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책 보내기 운동’을 통해 목사님의 책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요?

 

 

 

 

 A. 네. 아내의 책보내기 운동은 1875년에 제가 <스펄전의 강의 노트>라는 책을 발간 했을 때 시작했던 일이에요.

아내의 제안은 뜻밖이었습니다. <스펄전의 강의 노트>를 가난한 목사들에게 선물로 보내주자는 제안이었죠.

 책값은 물론 아내가 모은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활기차게 말하는 아내를 보며 저도 선뜻 수락했죠.

아내는 런던과 그 근교에서 100명의 가난한 목사들을 선별해 제가 쓴 책을 한 권씩 보내주었어요.
책을 받은 목사들은 줄줄이 감사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편지에는 자신들의 빈곤한 형편이 드러나 있었어요.

편지에 엿보이는 형편들은 일부러 궁색함을 보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감사를 강조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었죠.

아내는 그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했고 더 열심히 책을 보냈습니다.

많은 후원금들도 모였고 점점 주위에서 격려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그 일을 계기로 아내는 하나님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활력을 되찾았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을 가지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서 너무 감사했죠.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더욱 확신했습니다.

제 아내는 가정에 충실할 뿐 아니라 하나님 일에도 늘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요.
아내는 제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해심도 넓어서 바쁜 저를 위해 많은 수고를 감당했죠.

고된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됐을 때도 아내는 정성껏 저를 돌봐주었습니다.

 아내도 건강한 편은 아니었어요. 아내는 교회 출석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쇠약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병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진 않을까 늘 조심했어요.

 그런 사람이 남편 걱정에 늘 자기 건강은 뒤로 미루곤 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토록 헌신적으로 저와 동역해 주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저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네요.(웃음) 사탄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목사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위대한 사역이었습니다.

 몇 만명의 성도를 모으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양이라 생각하며 힘쓰신 목사님의 수고와 헌신이 하나님께 꼭 상달될 것이라 믿습니다.

 

도서출처 : 신앙위인 북스 찰스스펄전, 오병학, 규장

이미지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H._Spurg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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