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견은 북주의 외척이었다. 그가 제위를 찬탈하고 수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북주의 무제는 577년 북제를 멸하여 강북을 통일하였고 다음해인 선정(宣政) 원년(578) 초 돌궐 정벌에 나섰는데, 운양(雲陽)에 이르러 병이 나서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오다가 중도에 죽었다. 겨우 36세의 한창 때였다. 뒤를 이어 태자 우문윤(宇文贇)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의 시호는 선제(宣帝)인데 그는 우문씨 가계에서 첫 번째로 나타난 못난 임금이었다. 선제는 재위 1년도 안 된 대성(大成) 원년(579) 2월에 그 자리를 어린 태자 우문천(宇文闡)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일컬었다. 우문윤이 상황(上皇)이 된 이유는 군주의 책무를 회피하고 향락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실권은 자연스럽게 우문윤의 장인인 양견(楊堅)에게 넘어갔다.
양견은 북주의 개국공신인 양충(楊忠)의 장남으로 대통(大統) 7년(541) 6월에 태어났다. 양충은 12대장군의 한 명으로 무천진 출신이었는데 주국대장군이었던 독고신(獨孤信) 휘하에 있었다. 독고신과 양충은 우문호의 반대파로 우문호에게 살해되었다. 무제가 우문호를 죽여 실권을 찾자 양견은 이듬해에 무제의 태자인 우문윤에게 장녀를 출가시킬 수 있었다. 이는 가문의 격이 상류 귀족 중 떨어지기 때문에 외척으로서 세력을 떨칠 수 없다고 여겨졌기에 가능했다. 양견의 장녀는 나중에 선제의 다섯 황후 가운데 정황후가 되었다. 양견은 외척으로서 그리고 북제를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무공을 세움으로써 위치를 부상시켜 갔다.
대상(大象) 2년(580) 5월 선제 우문윤이 죽었을 때 정제(靜帝 : 우문천)는 불과 8세였다. 제위를 찬탈하려는 주위의 책동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유방(劉昉)을 주축으로 하는 한족 문벌 세력이 양견의 보정(輔政)을 획책하여 선제의 유조(遺詔)라고 속여 양견을 대승상․도독내외군사로 임명하였다. 이로서 양견은 병마 대권을 장악하고 백관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에 북주의 조정은 양견파와 반대파로 갈라졌고 양견이 우문씨 가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자 북주의 원훈(元勳)인 울지형(尉遲逈)이 580년 7월 북제의 수도였던 업을 기반으로 하여 군을 일으켰다. 울지형의 모친은 우문태의 큰 누이인 창락대장공주(昌樂大長公主)이다. 전국의 반이 이 봉기에 가담했으나 9월 울지형은 위효관이 지휘하는 토벌군에게 패배하고 자결하였다. 12월 양견은 상국(相國)이 되고 왕으로 책봉됐다. 나머지 지역의 거병도 이듬해에 이르러 모두 진압되었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양견은 581년 2월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국호는 수(隋라) 하고 연호는 개황(開皇)으로 정했다. 양견의 시호는 문제(文帝, 재위 581~604)다. 5월에는 북주의 마지막 황제였던 정제를 살해했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신하가 실권을 쥐고도 기반을 닦느라 제위에 오르는 데 대개 15~20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양견은 실권을 장악한 뒤 불과 7개월 만에 황제가 됐다. 이는 우문씨 가문의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북주는 24년 동안 다섯 황제가 즉위했지만 실권을 행사한 황제는 무제 하나이고, 그마저도 우문호를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 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황제권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라 무능한 황제가 즉위했을 때 쉽게 제위를 찬탈 당할 가능성이 컸고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양견은 황제가 되고서도 우문씨에 대한 살육을 계속해 일족을 모조리 죽였다. 이는 우문씨 가문의 재기를 두려워한 탓이다. 이러한 행위는 무천진 집단의 단결을 파괴한 것으로 주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수 문제 양견은 후세에도 “천하를 속임수로 얻었다 [詐取天下]”라는 비난을 계속해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