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셀’은 염소를 뜻하는 ‘에즈’와 떠나보냄을 뜻하는 ‘아잘’의 합성어라 한다. 영어로는 scapegoat고 우리말 번역은 ‘희생양’이다.
제사장과 그의 집안의 죄와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염소는 황무지 광야로 내보냈다. 염소는 그곳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도록 애꿎은 염소가 대신 죄의 댓가를 책임진 것이다.
1년에 한번 이스라엘 속죄일에는 그렇게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의식이 있었다. 제사장이 제사장의 삶을 살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살도록 아사셀이 대신 희생 당했다. 매번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각종 죄로 얼룩진 사람들에 의해 오염된 성소와 회막과 제단 자체를 소와 숫염소의 피로 성결케 하고, 이스라엘의 죄는 아사셀에게 물었다.
잘못의 댓가를 누군가가 짊어지고 책임을 져야 그 시대 그 사회는 굴러간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한 사회 국가요, 더 크게는 한 시대를 책임지는 그 누군가에 의해서다.
모두가 잘못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면 언제나 그 시대, 그 사회는 그 잘못 속에서 맴돈다.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스라엘에게 속죄일의 제단을 성결케하고 아사셀에게 대신 그 댓가를 물었기에 연거퍼 제사의식이 가능했을 것이고 제사장과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렇게 계속 굴러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아사셀이 될 것인가가 문제다. 국가적으로는 아직도 세월호의 책임을 둘러싸고 모두가 발뺌을 한다. 그러기에 여전히 세월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정당들은 총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만 한다.
왜 사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한다.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다보니 내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 쯤은 아무렇지도 않는 모양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려고 하진 못한다.
불현듯 윤동주의 시 “십자가”가 생각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처럼 형무소에서 그렇게 서서히 애잔하게 죽어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으며 가슴 뭉클해하며 눈시울을 적신 채, 한번쯤 그와 같이, 그 처럼 삶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과의 관계망 안에서 산다. 가족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사셀 염소가 되어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가족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며 아사셀의 삶을 살아간다. 직장에서도 책임감 있는 한 사람의 아사셀적 결단이 타인을 위험에서 건져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위험과 책임은 자신이 대신 짊어진다.
하나님은 아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그 아사셀적 삶을 요구하실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희생과 책임을 각오하며 사는 그 아사셀적 삶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증과 의문을 간직한 채 오늘 예배에 임했다.
왕이 없으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았던 혼란한 시대에, 나의 문제를 시대의 문제로 승화시킨 한 여자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뚜렷한 기준도 방향성도 없던 시대에 하나님을 인생이란 전투의 사령관으로 삼았던 그 여인의 이름은 한나였다.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불임의 시대에 자녀를 얻어 시대의 아픔을 책임지고 자기 중심을 갖고,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결단과 기도였다. 하나님은 그 여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러므로 아사셀적 삶은 시대의 아픔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아사셀은 두 발로 홀로 서는 삶이다. 자기가 서야 비로서 타인을 세울 수 있다. 아사셀은 시대의 아픔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릴 줄 안다. 그리고 시대에 휩쓸리기보다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삶이다. 줏대없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갖고 설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아사셀적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아사셀삶은 그리스도인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첫 번째 삶의 모습일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채, 시대를 거스르며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져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며 스러져갔던 선조들처럼, 지금도 여전히 어두운 하늘 밑에 붉은 땀방울을 흘리며 아사셀의 삶을 사는 나와 나의 가정이 되게해 달라며 기도하며 결단해본다.
첫댓글 아사셀에 대해 조명하셨네요
잘읽었습니다
예배의 참여자와 만찬의 양이 차이가 나 남은 것을 먹어야하는 한 명의 아사셀이 생각나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성도들의 글이 많아 지면 좋겠네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