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유감(有感)
백 운철 신부
지난 2006년 5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화된 소설 다빈치 코드의 바람도 잠잠해졌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다빈치 코드가 남기고 간 흔적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런 유(類)의 바람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다빈치 코드는 8-90년대에 출간된 “성혈과 성배”, “성전의 폭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라는 허구에서 내용을 가져오고 여기에 추리소설의 옷을 입힌 짝퉁이다.
소설은 쟈크 소니에르라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장이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하버드 대학의 상징학 교수 로버트 랭던과 암호해독 전문 경찰 소피는 쟈크 소니에르가 남긴 상징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 살인 사건이 전설의 성배(聖杯)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성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레이 티빙 경(卿)을 만나 그로부터 성배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영지주의 복음에 의거하여 예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했다고 주장하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다음 마리아 막달레나와 그녀의 딸 사라는 프랑스에 가서 숨어살다가 그 후손이 프랑크 왕국의 최초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486-751)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왕조가 멸망한 다음에도 예수의 후손은 살아남아 시온 수도회라는 비밀 조직에 의해 보호받아 왔으며 이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자크 소니에르는 시온 수도회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였고 그가 입양한 손녀 소피가 바로 예수의 후손으로 보호받아왔다는 것이다. 소설에 의하면 결국 성배는 예수의 혈통을 간직했던 마리아 막달레나 屍身이었다
이 소설의 작가 댄 브라운은 “성혈과 성배”에서 고스란히 베낀 시온 수도회의 역사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임을 자칭하면서 위조문서를 제작한 프랑스인 피에르 플랑타르(Pierre Plantard)는 1993년 프랑스 법정에서 시온 수도회에 관한 모든 것이 조작되었음을 시인하였다. 시온 수도회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성배에 관한 이야기도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댄 브라운은 자신이 인용한 자료가 허구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 브라운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목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로 이루어진 Faction이라고 주장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작가의 악의(惡意) 내지 무지(無知)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인 진리를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1. 브라운에 의하면 모든 믿음은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고 예언자였던 예수를 神으로 선포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 고백은 부활사건이후 사도들의 신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확립되었고 1세기 말에 쓰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영원으로부터 계신 말씀의 육화로 계시되었다. 토마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0,28)이라는 고백하였던 것이다. 기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결정한 것은 성자의 본성을 성부의 본성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이 인간 구원의 절대적인 요인이라는 확신에서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신성 고백을 순교로 지켜온 것이다.
2. 댄 브라운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아내였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를 영지주의 복음서인 필립보 복음서에서 찾는다. 필립비 복음서는 마리아를 예수의 companion 곧 배우자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이 배우자라고 해석한 companion은 그리스어로 koinonos( 친교를 나누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companion은 함께 하는 사람, 친교를 나누는 자를 뜻한다. 사도 바오로는 koinonos를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1고린10,18.20). 필립비 복음서는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입맞춤을 자주 하자 다른 제자들이 이에 불평을 한다는 내용을 전한다(64). 확실히 필립보 복음서는 예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제자들 보다 선호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이 입맞춤은 2고린 16,20의 거룩한 입맞춤의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전망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배우자이다(2고린 11,1.2). 필립보 복음서가 처녀의 순결을 강조하는 (55,27-28)영지주의 문헌임을 고려할 때 koinonos에 대한 브라운 식의 해석은 매우 부당한 것이다.
3. 브라운이 예수의 결혼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가 경시해왔다고 주장하는 쾌락과 성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와도 관련이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초대 유다인들은 솔로몬의 사원에서 종교적 매춘을 통하여 야훼와 그의 상대인 여신 쉐키나를 숭배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솔로몬 시대 이후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성전 남창이 존재했던 부패한 왕국의 모습일 것이다(1열왕14,24 ; 2열왕 23,4-15). 물론 가나안 종교에는 신전창녀가 존재했다(창세 38,21-22). 사실 신전 창녀제도는 성을 통하여 신성과 만나려는 고대인들의 초월적인 욕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서 종교는 성의 신성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성을 축복하되 창조 질서 안에 순응시켰다.
야훼(YHWH)는 존재, 또는 숨(바람)을 어원으로 하는 거룩한 이름이지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다움을 나타내는 야(Jah)와 여성 하와(Havah)가 만나 자웅동체로 이루어진 Jehovah가 아니다. Shekinah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타르굼(아람어 구약성경)에서 사용하는“현존”의 의미를 지닌 신명(神名)이지 결코 여신이 아니다. 성과 쾌락을 신성화하려는 브라운은 시온 수도회의 비밀 모임 중에 쟈크 소니에르가 어느 회원과 성행위하는 장면을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고대 신전 창녀 제도의 다빈치 코드적인 변용으로 보인다. 성과 쾌락의 신화화는 성을 수단화하고 결국 인간을 수단화 한다. 에로스는 신성 추구의 수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의 한 가지 표현인 것이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가 바로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4. 브라운의 치명적인 오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신을 성배라고 숭배하고 예수의 후손을 시온 수도회가 지켜왔다고 주장하는 혈통주의 사상이다. 브라운의 성(性)의 신화화가 결국 혈통주의로 이어진 것이다. 정작 혈통주의야 말로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가장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라고 이르셨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이미 혈통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인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인 것이다(요한1,13 ; 참조 로마 8,15).
혈통주의는 좁게는 가문중심주의와 넓게는 인종차별로 발전할 수 있다. 나치의 게르만족 우월주의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사도 바오로는 초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갈등,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의 차별을 거슬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라3,26-28)임을 선언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마태 19,12)의 독신의 삶에는 인종과 신분 등의 모든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먹고 마실 빵과 포도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서 하느님 가족의 새로운 연대를 창조한 것이다.
5. 브라운에 의하면 페미니스트였던 예수는 교회의 미래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나 교회의 주도권은 베드로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브라운의 이러한 주장은 마리아 복음서, 필립비 복음서등 일부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하게 묘사한데서 근거하고 있다. 정경 복음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으로 만난 여자라고 일치하여 전하지 않는다. 본시 마르16,1-8로 끝나는 마르코 복음서(16,7)에는 제자들이 첫 발현 체험자요 루카(24,13-35)에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며, 마태오(28,9-10)에서는 두 마리아이며, 요한(20,11-18)에만 마리아 막달레나 홀로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고 초대 교회가 공인한 예수 발현의 수혜자 명단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1고린 15,5-8). 이것은 초대 교회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평가 절하했다는 표지일까? 그렇다고 위경 마리아 복음서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두고 경쟁시키는 것은 정경 복음서가 전하는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하는 것이다. 한편 대표적인 영지주의 복음인 토마 복음서(114)는 여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전하고 있다 : 내가 직접 그녀(마리아 막달레나)를 인도하여 남자로 만들겠다. 남자가 되는 모든 여인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댄 브라운은 역사 뒤집기를 여러 관점에서 시도한다. 그에게 역사란 합의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다원성의 강조와 그 논리적인 귀결인 “억압된 것의 귀환”을 무기삼아 역사적인 진실을 뒤집어 본다. 저자는 성(性), 페미니즘, 판타지, 상징, 신화, 상상력 등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믿음에 대항한다. 모든 믿음이 허구에 바탕을 둔다는 브라운의 주장은 그가 지어놓은 상상력의 세계가 결국 허구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 코드에서 의미 있는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믿는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브라운 유(類)의 도발에 대해 실천이 뒤 따르는 책임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자극을 받는 것이 아닐까?
(야곱의 우물 2006년 8월 호 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