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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세부교구와 막탄섬
필리핀은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에 있다.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1시간 빠르며, 인천이나 부산에서 마닐라공항, 세부공항
모두 직항이 있다.
막탄 섬(Mactan Island)은 필리핀 중부 세부 주에 있는 섬이다. 세부 동해안, 세부 시의 앞바 다 불과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세부 본섬과 막탄 만다우에 다리와 마르셀 페르낭 다리, 2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은 라푸라푸 시와 코루도봐 시의 두 자치 단체로 나뉘어 있다. 섬 중앙 부분은 세부와 국내외의 많은 도시를 연결하는 필리핀 제2의 막탄 세부 국제공항이 있고, 세부에 위치한 측면에서 수출 경제특구 등 산업 기지와 쇼핑센터 등 관광 명소, 맞은 편 동해안에는 해변, 리조트 호텔이 늘어서 있다.
공항에서 세부 시내까지는 차로 30 ~ 40분, 비치 리조트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막탄 섬은 경치가 아름다우며 통풍이 좋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부 리조트"는 여기 막탄 아일랜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외국인 이민자도 많다.
이 섬은 "막탄 전투"의 무대이며, 마젤란이 임종한 땅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유럽에서 서향 항로로 필리핀에 도달하여 세부 영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 왕을 준수했다. 그러나 무슬림 영주(다투)인 라푸라푸가 그것을 따르지 않자 서로 대립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서 마젤란은 전사했다. 이것은 필리핀인과 서양인 최초의 전쟁이며, 이때 마젤란을 격퇴했던 라푸라푸는 나중에 침략자에 대한 저항 영웅으로 여겨졌다.
섬에는 마젤란의 필리핀 기독교 선교와 세계 일주 도중에 죽음을 기념하는 《마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는 마젤란 함대의 병사와 싸운 《라푸라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일랜드 최대의 도시 라푸라푸 시는 그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막탄 섬은 세부 주의 주요 관광지로, 대다수의 관광객들이 막탄 섬에서 투어를 즐긴다. 막탄 섬은 산호섬으로 다이빙, 스노클링, 아일랜드 호핑투어, 젯스키, 세일링 등 최적의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섬이다. 비사야 지방의 유일한 아쿠아리움이 막탄 섬에 위치해 있다.
1) 마젤란선교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페르디난드 마젤란(영)]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마젤란이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독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마젤란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마젤란은 12살 때 왕궁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모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관계가 좋지못했고 늘 불화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과 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지만)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5척의 선박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는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마젤란에게 포르투갈로의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 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 하에 선박 5천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목적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
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 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 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마젤란, 라푸 라푸 부족과의 전투장면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 상륙해 현지 원주민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 및 아랍인 이슬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 백년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 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트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부족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국 왕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그들이 별거 아닌 야만족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49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가 막탄 섬에서 부족들을 다스리던 부족왕 라푸 라푸를 죽이려 했고 라푸 라푸가 쫄아서 100명 남짓한 수 밖에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점도 있지만 부하들이 아무래도 불안하니 더 많은 병력을 데려가려고 충고했는데 산호초나 여러가지 환경 때문에 도저히 스페인 원정대 배가 막탄 섬에 다가갈 수 없었던 점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병력을 조금 데려갔다. 게다가 대포를 챙기지 않았고 약간의 화승총만 챙겼으며 그나마 총알과 화약과 화살조차도 조금만 챙겨간 것도 화근이었다.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바닷가에서부터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와 무장, 지리적에서도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스페인인 부하 14명, 세부인 지원군 150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젤란이 이끌던 선박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물론 그들이 수월하게 나머지 일정을 마친 것은 절대 아니다.
2) 필리핀 막탄섬에 마젤란 기념비와 라푸 라푸 동상
하지만, 정작 라푸 라푸에 대해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를 영웅으로서 교과서에 쓰는 필리핀에서조차 자세한 삶에 대한 걸 찾고자 노력하지만 스페인이 쳐들어와 막탄과 세부의 많은 부족들을 학살하면서 그들 기록도 불태우는 통에 이제 더 연구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 마젤란 기념비.
▲ 라푸라푸 동상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진 마젤란과 스페인 선원들의 죽음은 스페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보복을 결심하고 대규모 원정대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원정대는 조직적인 공격으로 적대적인 필리핀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특히 저항이 심했던 사이판 섬의 차모로족은 잔혹하게 학살당했고 다른 섬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하면 스페인은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으나 포르투갈과 시라고사 조약을 새로 맺으면서 필리핀과 그 근처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등은 스페인령 동인도라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미국-스페인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식민지로 변한다.
그리고 마젤란을 기리는 큰 십자가가 필리핀에 세부에 세워져있는데 이걸 조금씩 떼어내서 먹으면 몸에 좋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로 십자가가 손상되어 지금은 보호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반대로 침략자 수괴를 뭐하러 기리냐며 허구 헌날 십자가에 불을 지르거나 저주하거나 하는 글귀를 적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3) 필리핀, 세부(관구) 교구
필리핀에는 16개 관구와 전교 지역이 있다.
마닐라 관구에는 마닐라교구를 포함 10개의 교구가 있으며,
세부 관구에는 세부 관구 장 좌를 포함 5개의 교구가 있다
제51차 세계 성체대회가 지난(2016년) 1월 24일부터 31일까지 필리핀의 세부대교구에서 열렸다.
주교회의는 세계 성체대회마다 대표단을 파견하는데, 이번에는 장봉훈(청주교구장) 주교님을 단장으로 박정일(전 마산교구장) 주교님 등 40여 명의 신자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필리핀 교회는 아시아에서 가톨릭 신앙이 가장 뜨거운 곳이다.
1521년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세부이다. 세부에는 높이가 3~4m 되는 마젤란의 십자가가 작은 경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아시아에 처음으로 십자가가 도착한 곳이다.
정치적으로는 이때부터 300년간 스페인 식민 시대가 시작됐지만, 필리핀에 뜨거운 가톨릭 신앙이 정착하게 된 계기도 됐다. 이때 마젤란이 십자가와 함께 선물한 산토 니뇨(Santo Nino; 거룩한 아기 예수)가 오늘날까지 필리핀 문화와 축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성체성사의 의미 되새겨 이번 성체대회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영광의 희망’이라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27절의 말씀을 주제로 거행됐다. 매일 오전에 다양한 교리교육과 미사 전례가 거행됐는데, 한국 참가자들은 언어의 어려움으로 본부에서 제공하는 통역을 통해 강의를 들었지만 성체성사의 의미를 뜨겁게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세계성체대회 본부에서 마련한 다양한 행사들, 개막 미사, 폐막 미사, 성체 행렬 등은 참가자들의 마음을 성체 신심으로 뜨겁게 달구었다. 특히 지역 본당과 만남에서 한국 참가자들은 마볼로라는 본당에 초대를 받았는데, 두 분의 필리핀 주교님과 20여 명의 신부님께서 미사를 공동 집전해 주셨고, 훌륭한 저녁 식사와 필리핀 전통문화 공연도 준비해 주셨다. 우리는 답례로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노래했다. 특히 아리랑은 마볼로본당에서도 먼저 환영가로 불러 주어서 우리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통 축제와 신앙 어우러진 아기 예수 경배 축제
폐막 전날인 30일에는 필리핀 최고의 산토 니뇨 경배 축제인 시눌룩 축제가 진행됐다. 필리핀의 전통 축제가 가톨릭 신앙과 접목되면서 아기 예수 경배 축제가 이뤄지는데, 당일에는 경연에서 우승한 초ㆍ중ㆍ고 학생들이 각각 200~300명씩 참여해 웅장한 춤과 노래, 장단을 선보여 스포츠 센터에 모인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폐막 미사는 이번 대회 교황 특사이신 마웅 보 추기경께서 집전해 주셨다.
[자료참조: 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