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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이씨 십운과공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봉사자
내일 모레 60이 다된 내가 아직도 미련을 보이지 못한 것들은 광이 십운공파의 가계에 대한 연구다
젊은 시절에는 광이의 5대 족보(한음보 이후 총 5개)와 주요 혼맥의 여서족의 조선조 족보
실록과 고서와 읍지를 가지고 연구하다가 ....어느정도 이루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잊고........중도에 포기하고 이제 육십이 되니 아직도 미련이 많다.
이침의 존재다 대략 이침은 추강문집에 나타난 바로 성종조 인물이고
공판 두신공이 장흥으로 귀향와 인연을 맺은 뒤로
후손 들이 장흥에 살게 되어 된 곳이다.공판 두신은 죽어서 묘택은 광주에 있다...
이침은 사후 추증 영의정, 세자사부이다 세자사부는 세자사의 다음 직책이 사의 부이다.
당시에 근처의 산과 논을 다 파서 이루어
묘를 만들었고 장사 시에는 남도 12개 군수들이 참가한 예장이라고 했다. 예장은 국왕의 교지가 내려야한다.
그리고 묘택도 현세까지 가장 잘 보존된 분이다. 묘역은 지금의 경계가 근세에 이루어진 것 같으나
길에 근접하여 이루어졌고 필시 제사도 있엇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묘역보다도 넓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광이 장흥계와 이침 가의 존재는 어떠 했을까...
장흥광이는 당시 영광김문과 남평문씨 수원백와 대부분 세력가와 혼맥을 이루었다.
장흥광이가 장흥 토성인 장흥위씨와 비로서 혼맥을 이룬 것은 대개 임진왜란 이후이다.
장흥 위가가 임진왜란 후에 무반등으로 벼슬을 하여 중앙무대 출사한 시기와 같다.
구전에 의하면 보성 광이와 장흥 광이가 있는데
장흥광이가 조선조 시대에 보성 광이보다 가세, 문벌등이 휠씬 세었다고 했다. 그것은 장흥읍지가 말해주듯 조선초중기
중앙의 판서를 역임한 사람이 공판 두신 공이 당시 향리에서는 유일하였고
그 공판두신공의 후손이었고 대부분 김필, 문위세.
정세등 유명 족벌과 혼맥을 이룬 것으로도 알수가 았다.
보성광이는 둔촌공 후손 이극돈이 전라관찰사로 체직한 적이 있고,
그 후손 일부가 보성의 전주 이가=종친과 혼맥을 이룬 뒤에 세가 커진 것이다.
조말 고종조에 대신/참판등을 역임한 승재(기미보를 만든 자). 이조참판 종학등이 있어서 보성 광이가 세었지만
조선조 시대 장흥세도가는 장흥광이-십운과 공파이다.
둔촌의 보성광이는 장흥광이에 비하여 따라오지 못했다
장흥광이의 세도는 전설로도 안다
송산광이의 마을앞에는 하마비를 세워서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게 하여 동리 오게했다
세도가 극에 달하여
심지어는 노비도 함부로 주인에게 못한 집안이다. 주위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못도 잇었다고 한다.
독곡의 정사도 지었다.
..
오랜기간 세도가의 집안이었다
언제일까...?....일제초기일까.나라가 병합된 이후일까..
평화리 송산 용산 덕계 전부 광이의 고을이다
광이의 혼맥을 보면 우리 십운과파가 얼마나 큰 집안이라는 것을 보면 대부분 안다.
영광의 김문, 수원의 백문, 남평 문위세, 진주의 정가들..해남의 윤가들, 일부 인천 이가들
당시 혼맥들이다.그렇게 잘나간 집안들이 언제쯤 몰락의 길을 간지 알수가 없다...
해남 윤씨와 광이, 영광김씨등이 당시의 호족이다.
그런데 언제, 장흥광이의 세가 위축이되고 약해진 시기를 알아야하는데
그것은 왕조의 변천과 사화, 사변을 고려해서 검토해야한다. 가진 이침은 추강문집에서 장흥 북쪽에 살았다고 한다
이침의 묘소는 장흥 북자동이다. 대과 문과에 입격한 3원의 사후 묘소는 용산을 근거로 한다.
장흥광이 선영이 포곡인데 선대의 묘위에 후대가 묘를 써서 역장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족보는 기록한다.
족보는 "역장하여 몰락"하였다고 기술했지만 이는 분명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연루"된 것이라 추측한다.
포곡의 선영은 오래 전의 묘택이다. 적어도 조선 해방후까지 제사가 있었다,
제사에서 시향, 제사 준비를 하였고
선영을 관리하고, 벌초하고, 사람이 살면서 관리한다..그랬다...
그런데 왜 산중에 묘를 썻을 까, 대부분 묘택은 북자동의 이침 묘처럼 부락/동리에서 가까운 곳인데...
장흥 광이중 조선 초기 문과 대과로 급제하여 출사한 사람은 3원과 이지분 이다
그외 문반은 대부분 음서로, 무반은 무과,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장흥 광이의 몰락의 시기는 언제일까..
장흥 광이의 입향조는 병랑/군수, 이발동 부터이다.
승지겸 군자감을 지낸 이요흠의 손은 장흥 일원에 세거하였고,
강계 부사를 지낸 이순흠의 손들은 당시 전라병사와 혼인한 뒤 부터 대부분 강진에 세거하게 되었다.
실록과 왜란 지에 이요흠과 이순흠은 이름이 나오나 나머지 흠은 전란시 사망했다.
왜란의 선조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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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출저 장흥문화> 29호, 장흥문화원, 2007.12. 186-201쪽
장흥땅 장흥사람들의 기록을 따라서 1 /김희태(문화재전문위원) 의 이침등 장흥 문인과 추강에 대한 기록 조대기 번역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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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기와 추강, 장흥 선비들
수령천은 가지산으로부터 나온다. 장흥부 북쪽으로 수리 거리에서 흘러 돌아서 동쪽으로 흐른다. 동정(東亭)을 지나 예양강이 된다. 강은 흘러 또 남으로 내려간다. 성에서 7-8리 거리 독실[獨谷]의 서쪽 기슭에 이르면 강물을 굽어다 볼만한 곳에 기묘한 바위[奇岩]가 있다. 그 바위 위에는 사람이 삼십여명 정도 앉아 놀 수 있으며 맑고 잔잔한 물결이 돌아 흐르고 괴상하게 생긴 바위들은 곁에 서있고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도 그 곁에 섞여 있었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작두산(鐯頭山)이 있고 서쪽을 보면 수인산(修因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인암(舍人岩)을 대하고 있고 바위 뒤로는 만덕산(萬德山)이 그 봉우리를 노출하고 있으니 참으로 절경(絶境)을 이루고 있다.
홍치 사년(弘治 四年, 성종 22년, 1491년) 음력 삼월 초순경 나는 장흥 별관(別館)에서 우거하고 있으면서 날마다 향중(鄕中)의 선비[士人]들과 장난도 하고 즐겁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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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윤선생 구(尹遘)라는 분이 있었는데 자(字)는 경회(慶會)이다.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그만두고부터 방랑하다가 이곳 장흥읍성(城)밖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이선생 침(李琛)은 자(字)가 가진(可珍)이라 하였다
함열현감(咸悅懸監)을 그만 두고 부터 모친상을 당하자 상기[服]를 마치고 난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흥에 성(城)의 북쪽에서 살았다.
하루는 윤씨와 이씨 두분 선생이 고기잡는 도구[釣漁具]를 준비해 가지고 나를 남쪽 강변으로 맞이하여
그 바위(奇岩)에 올라가니 위와 아래로 큰 바위가 셋이나 있었다.
풀을 베어서 구덩이로 집어넣고 이중으로 풀자리를 설치한 다음
황어(黃魚)와 잉어(鯉魚)를 낚아서 혹은 굽고 혹은 회를 만들어서
작은 술잔 돌리면서 청아한 이야기[淸談]를 나누었다.
이때 한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김세언(金世彦)의 자는 자미(子美)인데
본고을 부사[俯伯]의 맏 아들이었으며 다음 김양좌(金良佐)의 자는 인재(隣哉)인데 부사의 사위다.
다음은 이세회(李世薈)라고 하는데 자는 울지(蔚之)이며 윤경회(尹慶會)의 사위다.
그리고 시골 노인[野老] 두 분이었는데
하얀 눈썹이 기이하게 생긴데다가 의관(衣冠)은 시골 민간인 의관을 갖추었고 그 가운데 한분은 성명이 박의손(朴義孫)이라 했으며 또 한분은 최석이(崔石伊)라고 했다.
이 두 노인도 역시 윤씨와 이씨 두 선생을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술을 대여섯순배 돌리고 나니 해는 지고 달이 떠올랐으며 바람이 일자 물결이 치기 시작했으며 의손(義孫) 노인은 일어나 춤을 추었고 석이(石伊)노인은 창가(唱歌)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자
두 선생 (윤선생 구(尹遘)- 자(字) 경회慶會. 이선생 침(李琛)- 자(字) 가진可珍)
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들 여기에서 놀기로 한지가 오래였지만 이 지역에 이러한 기암(奇岩)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하며
어찌 서로 시골노인들과 합해서 대(臺)를 한번 쌓아 놀고 영구(永久)히 전할 수 있게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두 노인은 절을 하며 이르기를 오직 명령만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므로
두 선생 (윤선생 구(尹遘)- 자(字) 경회慶會. 이선생 침(李琛)- 자(字) 가진可珍)이
다 말하기를 오늘의 즐거움은 고기를 낚은 것이 제일 좋은 일이었으니
그 대(臺)이름을 조대(釣臺)라고 한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천지의 가운데에서 타고난 것은 동일한 그 생명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이 생장하는 것도 타고난 생명들은 동일하게 그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한 곳으로 쫓아가고 위태로운 곳을 피하며 생(生) 즐거워하고 사(死)를 싫어한 것은 사람이나 미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고기를 보면 잡아먹고 고기가 사람 앞에 나타날 때마다 삶아 먹는다면 고기의 걱정거리고 나의 즐거움을 삼아야 되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처음 나뉘어 지고 만물이 머물게 되었으며 이미 머물게 된 다음에 생기를 받게 되었고 생기를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쓸모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쓸모가 있다는 것은 수용(需用)을 뜻하는 것이니 수(需)라는 것은 먹고 사는[飮食] 길[道]을 말한다. 기왕에 음식(飮食)의 도가 정해져 있다면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게 되는 것도 이치라고 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는 그물을 만들었고 우왕[大禹]은 생선을 먹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순(舜)임금도 뇌택(雷澤)에 가서 고기를 잡았으며 공자(孔子)도 비록 그물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낚시질 만큼은 멈추지 않았으며 맹자(孟子)도 왕도(王道)를 논하면서 또한 이르기를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이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송나라 때 와서 소옹[邵子]은 어부와 초부(漁樵)가 묻고 답하면서 해가 다하도록 시비(是非)를 논하다가 마침내는 섭을 꺾어 고기를 삶아서 먹고 역(易)을 논했다고 하였으니 고기를 낚는 즐거움도 믿음이 가는 말이라 하겠다. 하물며 고기[魚]는 우리에게 먹히고 우리는 조물(造物)주에게 먹히게 되는데 우리가 조물주에 먹히면서 즐거움을 주게 됨을 안다면 또한 고기도 우리에 먹히게 됨이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조(釣)자를 써가지고 그 명칭을 하여 높이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記)를 다 쓰고 나서 나는 또
그 두분 선생 (윤선생 구(尹遘)- 자(字) 경회慶會. 이선생 침(李琛)- 자(字) 가진可珍)께 설명을 드리며
이르기를 옛적에 엄자릉(嚴子陵)은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 가서 낚시질을 했기에
그가 앉았던 곳을 이름하여 조대(釣臺)라 했다고 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고 이르기를 이때와 그때의 명칭은 같지만 취지는 다르다고 여겨졌다. 대개
그 엄자릉(嚴子陵)의 큰 지조는 백세뒤에 널리 전해오면서 일월(日月)과 함께 빛나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임금과 신하의 의를 끊고 즐거운 마음으로 풀과 나무[草木]가 함께 썩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은 아마도 공자께서 말씀하였듯이 등용되면 자기의 뜻을 시행하고 놔둬버리면 은둔해야 한다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된다.
만일에 그
윤경회(尹慶會)와 같은 분은 나와함께 머리 싸매고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그분의 학식이 관대하고 엄정하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다. 그리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재능과 지혜가 원대(遠代)하며 국정에 참여하여 쓰일만한 인재로서 참으로 보배로운 존재이다.
이 가진 선생은
행실은 효(孝)와 청렴[廉]을 겸비했고 재질은 문(文)과 무(武)를 겸하였으며 일찍이 선정(善政)으로써 함열(咸悅) 지역을 다스렸기에 그 명성과 공적도 나타나있다.
두 분 선생 (윤선생 구(尹遘)- 자(字) 경회慶會. 이선생 침(李琛)- 자(字) 가진可珍)은
참으로 자잘하게 절의나 숭상하고 고고함을 양성하며 시가나 읊조리고 날을 보내는
무리들과 견줄 바가 아니며 이른바 토야[江湖]의 먼 곳에 처하면서도
그 임금과 국가를 걱정하는 분이었다.
뒷날에 천은(天恩)이 항간에 미치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부르는 문서[鶴書]를 가지고
이 조대로 달려 오면은
두 분 선생은 반드시 짚신을 벗어 던지고 낚시줄도 걷어 치우고 그 낚시질 하던 솜씨를 바꾸어서
임금을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리니
어찌 변통성 없는 엄자릉에 비교하랴!
곧 바로 강태공[太公]의 조황(釣璜)과 함께 의당 서로 천년[千載]의 세월을 두고 선후를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양강(汭陽江)의 조대(釣臺)도 후세 사람들이 위수(渭水, 강태공 낚시터)가에 있는
조대와 같이 명소라 지적할 것이니 필연코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기대하노니 그대들은 여기에 힘쓰기 바라노라.
추강의 <조선왕조실록>기록
남효온(南孝溫)이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이 있었다. 성종조(成宗朝)에 상서(上書)하
추강 남효온,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집으로 <추강집(秋江集)>, 저서로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사육신(死六臣)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이 있다.
여 일을 말하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스로 그 뜻을 세상에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방임하여 얽매이지 않아 시속과 더불어 오르내리지 않았고, 노(老)·장(莊)의 고허(高虛)한 논을 본받아서 혜강(嵇康)·완적(阮籍)의 방달(放達)한 행동을 하였으며,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초매(超邁)하여 고체(固滯)한 누습이 없었다. 더욱이 시에 능하여 당(唐)나라 시인의 풍격이 있었는데, 불공평한 세상에 격분하여 유리하여 이단(異端)이 되어 죽음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리 도의 죄인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연산 31권, 연산군 4년(1498 무오 ) 8월 16일(기묘) 기사]
추강 남효온선생의 조대기(<추강선생문집> 권4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제16책 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