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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를 읽고
지난 한 주간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야곱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야곱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허물 많은 인간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한 인생을 통해 당신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삶,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야곱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놀라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1장 ‘출생의 비밀’부터 마지막 에필로그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에 이르는 총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야곱이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 형 에서와 싸움을 하던 그 때부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땅에서 바로를 대면하며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책속에는 야곱의 전 인생이 파로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1장 출생의 비밀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선택받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이자 사명이다. 또한 동시에 고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어째서 야곱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선택받은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몸부림 쳤던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장자권’과 그 축복에 대한 적극적 반응이자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를 흐르게 하는 피나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2장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야곱의 가치관과 에서의 가치관은 달랐다. 당장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동생에게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의 경솔한 행동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에서의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에는 단순히 팥죽 한 그릇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있었다. 에서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서 부모의 걱정이 되었고 이것은 당시 사회의 문화적 가치를 따르는 행동이었다. 혈통의 문제를 떠나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는 세상적 가치관을 따랐던 에서의 모습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업신여기게’ 되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온전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야곱과 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있었고, 그것이 곧 자신들의 삶에서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인지를 알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3장 축복을 탈취하다
야곱이 그토록 갈망했던 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3장을 읽으면서는 나를 포함한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축복’의 개념을 생각해보았다. 많은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가 성도들의 입맛에 맞춘 ‘기승전 축복’인 것을 보면서 사실 내 안에 오랜 시간 적지 않은 갈등들과 고민들이 있어왔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복’을 구하는 일명 ‘기복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정착할 무렵에는 그러한 기복적 축복관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복에 대한 가치관이 수정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일부러 고행을 하고 이 땅에서의 복을 거부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복의 개념이 우리 안에 올바로 정립되고 교육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섬기고 낮아지는 것이 곧 ‘참된 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자 야곱이 받은 진정한 축복인 것이다.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은 복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인간을 지으시고 하신 일은 인간에게 복을 주신 일이다. 그런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일을 명하셨다. 순서가 중요하다. 복을 먼저 주시고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가 감당하는 일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신 그 놀라운 축복을 유통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복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다.
4장 벧엘에서
성경이 야곱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벧엘이라는 장소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오시고 함께 하셨다. 이것은 절대 우연한 만남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가치고 친히 찾아오신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절대 주권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자화상, 야곱>이라는 책에서 최용태 목사님은 우리가 삶속에서 여전히 야곱과 같이 물질과 사람과 세상 가치관을 의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즉 많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복음이 지적 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자신의 것이 된 적이 없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장소와 시간이 벧엘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나의 프레임에 가두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제한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5장 사랑과 노동
이 장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사랑과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동했던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가 얼마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는지는 오늘날 대부분의 성공신화를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노동은 단순히 세상적 가치추구의 관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기간동안 야곱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데 동참한 것이다. 즉 노동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지는 기복신앙 외에 또 한가지 진단해야 할 문제는 바로 신앙과 노동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이다. 나의 중고등부 시절에 교회학교에서는 ‘교회 안은 거룩한 곳이고, 세상 밖에 발을 딛는 순간 더러움이 묻고 오염이 된다’라고 배웠다. 그러니 교회 안다니는 친구랑 사귀면 안되고, 동네 빵집이나 오락실, 롤라장 등에 놀러가서도 안되며 교회에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한참 성장할 때까지도 그게 진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세뇌된듯 마치 신앙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악마적인 것으로 내안에 선을 긋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교육이었는지, 얼마나 성경적이지 못한 가치관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마음에 분이 일어날 정도였다.
신앙과 삶은 절대로 분리되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다. 믿음의 공동체만이 거룩하고 세상 밖은 악한 공기가 만연하다라는 그러한 논리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저게 바로 내 모습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정죄하고 잣대를 대고 판단하고 나만 우리만 거룩한척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모습인지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교육해야 한다.
하란에서의 야곱의 삶은 치열한 삶의 현장 그 자체였다. 먹고 먹히는 생존경제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형을 속였던 자신이 자칫 라반에게 먹힐 수도 있었기에 더욱 치열하게 노동하고 세상속을 살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과 함께 하셨다.
6장 하란에서 보낸 스무 해
야곱은 그렇게 치열한 20년을 살았다. 어찌보면 사랑과 야망을 좇아 세상적 성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 삶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야곱이 하란이라는 광야 속 고난 가운데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그 기나긴 시간중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이다. 야곱이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다. 축복을 받을만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시고 선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된다. 속고 속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온데 간데 없고 오로지 성공하고 사랑을 쟁취하기만을 위해 달렸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야곱을 축복하신다.
7장 얍복강에서
이제 야곱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지난 20년의 세월은 고난 축에도 못들 정도이다. 지금 앞에는 자신을 죽이려 기다리는 형 에서가 있고 뒤에는 라반이 추격해 오고 있다. 진퇴양난이다. <우리의 자화상 야곱>에서 최용태 목사님은 이것을 ‘해결받지 못한 죄의 두려움’이라고 표현한다. 야곱은 이러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 그동안 쌓아온 부와 가족들 까지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르는 위촉즉발의 상황을 직면한다. 자신의 기지와 인간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해 보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을 부른다. 기도가 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창 32장 9절에는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순간에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게 된다. 자신의 수단과 방법 경험과 지혜를 다 내려놓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비로소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야곱이 때로는 어리석고 인간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다. 우리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 어떤 의미지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8장 하나님의 얼굴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고통의 기도를 드린 후에 그는 담대함과 당당함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야곱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이 장에서는 ‘용서’에 대한 개념을 단순한 인간적 화해의 수준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야곱이 온갖 속임수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이루려 했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나자 그는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구속사적 관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즉 위로는 전능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다시 수평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얍복강 사건이후 에서와의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되는 배경이 된다.
9장 열정과 실용 너머
하나님의 약속의 땅 벧엘은 결코 호락호락한 현장은 아니다. 목숨을 걸고 위기를 지나온 야곱은 다시 자녀들로 인해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세겜에서 딸 디나의 강간사건이 터지고 이에 분노한 아들들의 무자비한 살인과 약탈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부모로서 자녀들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직접 당한 고난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세겜 사람들에게 취했던 야곱의 입장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는 있다. 두려움과 고통에 움추려든 아비 야곱의 모습과 대조적인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들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선이고 정의인 것인지 분별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곳 세겜 또한 벧엘로 만드는 믿음이 야곱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만은 확실하다. 세상 속에 있으나 그 안에서 세상과 구별하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마지막 중보이자 명령이시다.
10장 내 나그네 길의 세월
유모였던 드보라마저 장사지내고 난 후에 야곱은 인간적 의지와 기대를 모두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다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창 35:1)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부른다. 즉 허망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던 땅 벧엘이라는 ‘공간’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엘벧엘의 ‘자리’로의 근본적 신앙의 가치관의 이동인 것이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야곱의 통곡처럼 오늘 나의 통곡이 이루어져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거룩의 모양만 있을 뿐 알맹이는 없는 삶, 믿음의 말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의지를 고집하는 삶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 벧엘로 다시 올라갈 때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에필로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먼길을 달려왔다. 한 사람의 일생을 어떻게 한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그 내면의 고통과 갈등과 눈물과 슬픔과 통곡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만드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눈멂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면서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창세기 47장 8-9절에서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그리고 야곱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렇다. 축복을 노래하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결국 그는 험악한 세월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분 자체가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인생 속에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던 야곱도 인생의 말년에 오직 주인은 하나님 뿐임을 고백하게 된다.
서평을 쓰면서 야곱의 축복을 내 안에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삶,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 속 야곱의 몸부림 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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