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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9/1006
사랑의 은사(1)
고전13:4-7
. 사랑이란 단어는 듣기만 하여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영원히 변함없는 참사랑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 주변을 살펴보면 간혹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살리고, 환경을 변화시키며 삶을 아름답게 일구며 살은 사람들이 있다.
. 그러나 오늘날은 사랑이 자꾸 식어져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만일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랑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이다.
. 성경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면서까지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
. 하나님께서는 참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신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 어떻게 해야 참 사랑을 소유한 입니까?
. 고전13:1-3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사랑의 실천은 없고 방언을 하며,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진리의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방언을 하고, 입으로는 천사 같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다.
.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하늘의 비밀을 자기들만 알고, 자기들은 하늘의 모든 것을 알아서 천사의 말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 천사와 같이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만큼 말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진정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할 뿐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구리란, 구리로 만든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의미한다.
. 꽹과리란,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요즈음의 심벌즈와 같은 악기입니다.
. 이 소리들은 사람들의 호감을 끌만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음을 자아내는 악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오늘날은 교회들마다 교회의 부흥 보다도, 성도들간의 사랑의 회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서로 사랑하자고 기도하고 강단에서 외침니다.
그러나 진정 참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교회에서의 사랑하자는 구호는 사람들의 귀를 거슬리는 소음이나 무의미한 구호에 불과하게 되었다.
너희들부터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말한다.
. 사랑이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가 어렵다. 동시에 오늘의 교회는 말만 많고, 사랑의 실천에는 인색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랑은 결코 말 뿐아니라 실천이 앞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처럼 말 보다 실천이 앞설 때 교회는 성경이 요구하고, 하나님이 바라는, 원래의 참사랑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 성경을 깨우쳐서 모든 하늘의 비밀과 땅의 비밀과 말씀의 비밀을 다 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큰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소유한 믿음이 있고,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는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 믿음이 투철한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인해 자기하고 입장이 다른자를 무시허거나 왕따를 시키고, 심지어는 ‘이단’ 이라는 명목으로 박해를 한다.
. 자신이 가지고 신앙 노선과 달리 하는 자를 배척하는 행위를 한다.
. 그런데 이 같은 행위는 모두 진실한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예언이나, 하늘의 비밀을 잘 아는 지식이 있고,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도 사랑이 없는 은사자라면, 모두다 은사자로서 자격이 없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물질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구제나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요, 억지나 의무감 속에서 행하는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 상으로 쌓여지지 않는다.
.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가 없다.
. 의무적이며 타인을 멸시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구제나 자기만족과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한 희생은 진정한 구제라 할 수 없다.
. 성경은 ‘사랑이 없는 구제도 있다’ 고 말씀하신다.
.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네가 구제하는 것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절)하였다.
. 마음에도 없으면서 구제한다. 방송에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
신문에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구제한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구제는, 사랑이 없는 구제요 그러므로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인간들로부터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지를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중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구제(충성, 봉사, 헌금)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성령이 역사 하시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 구제할 줄 알아야한다.
.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예물을 드릴 때에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셨다. 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될까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기쁘고 즐거운 것이요.
내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 멸망으로 지옥으로 갈 내가, 영생을 얻었고, 천국가게 되었으니 기쁜 것이다.
하루를, 한 주간을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돌봐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머리털 하나까지도 지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기쁘고 감사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중심을 다 바쳐 주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 내가 감사헌금도 못 내고, 십일조도 못 내서 민망하여 교회 나오지 못한다는 분들도 있다.
목자 보기가 미안해서, 성도들 보기가 미안해서, 헌금을 못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분들도 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내 맘속에서 나오는 감사를 받으신다.
어떤이는 사람을 보고 감사예물을 드린다,
목자에게 보이기 위해 감사를 한다.
내 형제에게 보이기 위해 감사하고, 나를 알리기 위해 감사를 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를 않기 때문에, 구제하고 감사하여도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감사, 성령이 역사해서 하는 감사나 구제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이 땅과 하늘에서 상급이 큰 것이다.
. 성경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도 없다” 고 하였다.
내 몸을 희생하는데 내어 주었다고 하더라도, 교회 앞에, 내 형제 앞에, 내 가족 앞에 희생을 하고 충성 봉사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희생과 충성과 봉사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 사랑이 없는 희생과 충성과 봉사도 할 수 있는가 하고 말하는 이가 있겠지만,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거짓으로 눈속임으로 할 수도 있다.
. 실컷 봉사, 충성, 희생하고선 뒷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충성 봉사 헌금 선교 구제 한것을 드러내려고 하고, 칭찬을 들을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 이것은 거짓된 희생이요 봉사 충성인 것이다.
. 이러한 수고와 희생과 충성 봉사는 사랑이 없는 일이다.
.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다.
. 이 땅위에서 축복으로 갚아 주시지도 않는다.
.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없다.
. 농부가 가을에 추수를 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벼를 벤다.
. 그러나 내가 왜 이렇게 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베는 것이요.
남이 보든 말든, 열심히 벼를 벨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요?
자기 것이요 자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내가 이웃집 벼를 베어준다면, 품삯을 받고 벼를 벤다고 하여도, 어떻게 하면 편하게 베어볼까, 늦게 나가서 일찍 마치고 돌아올까, 힘들지 않게 일을 해볼까 할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자기 것이 아니므로 또한 사랑하는 맘도 없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으로 충성 봉사하고, 수고하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겠다.
. 학교에서 칭찬을 들으려고 선생 앞에서만 잘하는 학생도 있다.
. 회사에서 사장에게만 잘 보이려고 사장 앞에선 잘하나, 사장이 없으면 일하지 않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사는 분들도 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요.
.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자녀들은 집에서는 착한 자녀요
부모에게 순종 잘하는 자녀요.
학업 성적표도 잘 받아 오지만, 부모의 눈길만 벗어나면, 어느 집 자녀보다도 망나니 노릇하는 자식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 부모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눈속임만 할 수 있겠습니까?
. 사랑의 희생은 우선 말이 없고, 내세우지 않는다.
. 사람에게 칭찬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게으르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뒷전에서 구경만 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충성 봉사 희생하는 것이 낫다.
. 뒷전에서 시기 질투 비난 투기만 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것이다.
. 우리들의 마음이 깨끗하여 희생 충성 봉사를 하여야겠다.
.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다.
. 그러므로 구제와 희생도 사랑을 우선할 순 없다.
.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한 순교는 순교조차도 가치가 없다.
. 결코 사랑이란, 자랑이나 교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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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이냐?
. 사랑은 크게 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요,
육적인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다...
ㅇ 육적인 사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형제간, 이웃간, 친구간의 사랑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사랑의 농도는 다 다른 것이다.
. 부모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희생해 줄 수 있는 부모가 오늘날에도 더러 있다.
. 그러나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다.
. 다른 사람의 자녀들도, 자기 자식 같이 똑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있는데, 그런 사랑을 영적인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한다,
영적 사랑의 은사(2)
고전13:4-7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사랑은 자신을 희생해 줄 수 있는 사랑이어서 숭고하고 고상하며, 참사랑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사랑인 것이다.
이 영적 사랑은 썩어지지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랑이므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이 있어야 하겠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입니까?
그러면 사랑이 무엇이냐?
⑴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다.
고전13:4절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갈5:22절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도 <오래 참음>이 있다.
그러나 고전13장에 나오는 <오래 참고>와는 뜻이 다르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이란 ‘모든 것에 대하여 매사에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나 개인적인 일에서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오래 참는 것’이다. 곧 ‘내게 돌을 던지는 자’, 또는 ‘내게 오는 시련들,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을’말한다.
‘누가 나를 미워해도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욕해도, 핍박해도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 을 말한다. 참다가 나중에 폭발하면 참은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아야 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참지도 않고, 끙끙대며 참는 참음도 아예 없애버리면 좋겠다.
마5: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나를 비난하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핍박하는데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다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조롱하고 핍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침을 뱉았다. 주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원수 마귀 더러운 귀신들을 다 물리쳐 주셨다. 온갖 희생을 다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침을 뱉았다.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다.
저들은 마귀를 쫓아 행하는 원수들이었지만, 저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를 하여야겠다.
마5:39-40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했다. 속옷을 달라는 것은 염치없고 무례한 행동인데도 오히려 겉옷까지도 주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할 때는 참기 어렵다. 그래도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질투해도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속을 뒤집습니까? 그래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복이 옵니다.
그러면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마태5장에: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요”
온유란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모든 자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 와서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한 자를 온유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에게 그늘이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온유는 덕(德)이라고도 말한다.
어떠한 사람하고도 거침돌이 되지 않고,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대하면서 악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를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를 이해해 준다. 그를 용서해 준다.
그런자도 불쌍히 여기고 감싸 주는 것을 덕이라고 말한다.
. 이런 덕을 지닌 온유한 사람이 사랑의 은사를 받은자이다.
.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권세를 얻는 것이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할려고 하고, 온유한 사람의 말 한마디 듣고 마음의 쉼을 얻기를 원한다.
. 조치원에 가면 OOO 이재철씨라고 계신다.
그는 시골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조치원에 나와서 세탁업을 하여서 많은 돈을 벌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신 분이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덕이 많은 사람이다.
. 이분은 어떤 손님에게도 ‘어서 오십시오’ 하고 인사를 잘하실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온유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고 기뻐한다.
. 제가 그를 볼 때마다 성령님은 저에게 말씀하신다.
. 남목사야,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 왜?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를 아느냐.
. 그가 온유하고 덕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신다.
. 온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누구하고도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없다.
. 상대방의 어떤 마음도 품는 마음을 말한다.
.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살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그의 권세가 될 수 있다.
. 온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따른다.
. 온유한 마음도 없고, 덕도 없는 사람이 어느날 돈이 많아저서, 권세와 명예가 생겨서,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루 아침에 권세와 명예를 잃거나, 망하거나 죽게되면,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덕을 입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정 그의 망함과 죽음을 애도하거나 뒤돌아보거나 혹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돈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온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높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혹은 망하면 도움의 손길이 끈이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그가 죽었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무덤을 찾아가거나, 그를 앙모하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온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기업으로 주시고, 세상의 축복도 많이 받게 된다. 하늘나라에서도 많은 보석으로 되어 있는 좋은 집을 기업으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진리 안에서 온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늘나라에서도 좋은 집을 얻게 된다. 온유한 것은 성결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 되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악인을 대할 때도 오래 참으면서 온유한 마음으로 대할 때 하나님이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신다.
. 민12장에 보면, 모세는 “이 땅위에 모든 사람보다도 온유함이 승했다”고 하였다. . 모세는 율법을 받은 이였지만 부인이 둘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형 아론은 제사장였고, 자기의 누님 미리암은 선지자였다.
. 그런데 자기의 형 아론과 누님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하였다.
너는 무엇이건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너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우리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동생 모세를 비난을 하였다.
그런데 그만 그의 누님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었다. 그 많은 백성들의 선지자가 문둥병이 걸렸으니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입니까?
. 오늘날도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믿음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도....오래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교만하고, 혈기를 부리고, 투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비진리를 버리시기 바란다.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 모세를 비난하였다.
물론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는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인정하셨단 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잘못이 아니다.
. 그런데 비난을 하였고, 비난을 한 그들은 문둥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랑하셨습니까?
.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 이유가 나오고 있다.
모세는 지면에 어떤 사람보다 누구보다도
① 온유함이 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덕을 갖춘 사람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종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특별이 사랑했다.
또 한가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②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은 꿈이나 어떤 환상 가운데서 가끔 보여 주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여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이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세를 비난하였을 때, 아론과 미리암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였다. 온유한 사람을 하나님은 이렇게 기뻐하신다.
우리 온 성도님들도 이렇게 온유한 분들이 되어야 되겠다.
온유하고 인자하고, 덕을 갖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조그마한 일에도 다투고, 조그마한 일에도 삐지고, 조그마한 일에도 토라지지 맙시다. 우리는 너나 나나 사랑이 있어야 되겠다. 진정 나에게 사랑이 있다면 누구의 흠을 말하며, 누구의 흠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 그것은 사랑이 없는 소치인 것이다. 미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누가 잘못하였으면 사랑하는 맘으로 지적하고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다.
. 내가 그를 미워하거나, 내가 그 때문에 큰소리치거나 혈기 부릴 것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가져야 되겠다.
. 어떤 성도가 토요일날 결혼을 하였다. 주님을 영접한지가 얼마 안된분들이다. 예식을 끝난후 신혼여행을 가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고, 참았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드린다.
. 초신자인데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이다.
.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겠습니까?
. 그런데도 여행을 가지 않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날 여행을 떠났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제하고 참고 주일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이요 신혼여행인데, 그곳에 가서 예배를 어떤 교회에서든지 드리면 되는 것이지 하고, 신혼 여행을 떠날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 그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 제단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목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어디서 생깁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매사를 오래참을줄 알아야 되겠다. 온유하여야 되겠다.
960818/001008 영적 사랑의 은사(3)
고전13:4-7
⑵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고전13:4절).
투기란? 강(强)새암을 말한다. 상대가 나보다 더 나을 때 미워하는 마음, 상대가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할 때 일어나는 시샘,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보고 투기한다. 나보다 앞서서 충성 봉사하는 것을 보고 미워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점점 부해지거나 잘 살게 되었을 때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데, 이것이 더 진전하다 보면 투기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민족성에는 이런 나쁜 근성이 다른 나라들 보다 더 많다고 한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고, 투기로까지 발전되어서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 나라의 속담에 ‘이웃 사촌이 땅을 사니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좋아하고 기뻐하고, 오히려 축하를 해주어야 할 텐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배아파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주안에서는 추호도 없어야 될 것들이다.
투기 보다 약한 것은 질투요 시기이다.
모든 악은 마음의 시기부터 시작이 되어 투기로 발전된다. 내가 죽어 있으면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의 일에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하고, 축복을 받으면 내 이웃을 시기하거나 얼마나 잘하나 두고보자 하는 비진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의 악한 일들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들이 그대로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에서 악이 일어나 시기한다. 내 마음 속에 악이 있기 때문에 분쟁하는 것이다. 악한 소리를 하며 싸우는 것이다. 이런 것이 모두다 악이다. 이런 악은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악을 발하는 것이다. 사랑과 반대되는 것들은 모두가 악이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오래 참지 못하면 사람에게서 악이 나온다. 온유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히 행한다.
이러한 악이, 비 진리들이 내 안에서 없어져 버려야 우리에게 사랑이 임하고, 성결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성결하니 너희도 성결하라고 하셨다.
이런 악의 모양이, 투기하는 마음이, 다 벗어져 버려야 내 맘에 사랑이 임한다. 성경을 보면, 이런 투기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은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29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 동생 라헬과 그의 언니 레아의 투기가 잘 나온다.
그로 인해서 언니 레아는 자기의 몸종 실바를 야곱의 아내로 주었다. 라헬도 자기의 몸종 디나를 아내로 주었다. 서로가 야곱에게 잘 보이려고 경쟁을 하였던 것이다. 그 경쟁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투기가 나온다.
자기 동생 아벨이 피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그의 형인 가인이 이를 시기하다 못해, 투기로 발전되어서 살인까지 한다. 투기는 이처럼 무섭다.
창세기에는 요셉과 그의 11형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2형제 중에 요셉은 이삭의 11번째 아들이다. 형들로부터 지극히 사랑을 받아야 할 터인데, 형들의 투기로 그는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할 뻔 한다. 그러다가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지극히 받다 보니까 그것이 형들에게는 미움으로 발전되었고, 그 미움이 살인으로 발전될 뻔 하였다.
이런 시기나 질투, 신경질은 악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민수기16장에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족장 250여명이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여 대적하는 장면을 본다.
자기들도 머리급에 속하는 지도자들인데, 모세가 자기들의 지도자로 앉아 있는 모습이 싫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싫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다. 땅을 갈라지게 하여 즉 지진을 일으켜서, 그들을 멸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
민수기12장1절에도 보면, 모세가 구스여자를 아내로 취하니,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였다.
그로 인하여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렸으며, 미리암은 백성들로부터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본다. 이렇게 투기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를 않는다.
사울 임금도 선한 다윗이 자기보다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더있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
다윗은 나라에 충성을 하였다. 다윗이 사울에게 잘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왕의 위신을 높여 주었고, 나라를 불레셋으로 부터 구한 충성스러운 구국공신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우쭐대거나 왕을 없신 여기지도 않았다. 왕위를 탐하지도 않았다.이런 꼴을 보지 못한 사울왕은 군대를 동원해서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예수 안에서는 추호도 없어야 되겠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왕을 완벽하게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왜 그래습니까?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다.
물론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을 왕이 잘못한다고 해서,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고 한다고 해도 자기 손으로는 왕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이다.
우리는 다윗의 모습에서 악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울왕의 모습에서는 악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요즘 세상에는 이런 악이 너무나도 많이 발견 된다.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자식들도 많고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들도 발견된다. 학원에서도 학생이 교사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답니다. 대학생이 교수의 머리를 깍는 경우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서 이런 악한 모습들이 없는지요. 우리에게 사랑의 은사가 임하여 있다면, 누가 좀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누가 알까봐 그 일을 덮어 주고, 누가 보았거나 알까봐 걱정하며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분당에 있는 어느 감리교회의 큰 교회를 담임하고 게신 목사님이 목사 사무실에 가스불을 켜 놓고 집회를 갔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보았습니다. 그는 들어가서 그 가스 불을 끄고, 목사님에게 보고를 하였고, 누구에게도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전혀 염려하지 마시고 집회를 하시고 돌아오시라고 전화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회 성도들이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참으로 귀한 집사님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다.
그 집사님에게 사랑의 은사가 있기에 목자의 실수를 숨겨 준 것이다. 또한 드러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일이기에 자기만 알고, 목자에게만 알려 준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은사가 있는 참 사랑의 마음이다.
그런데 사랑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면, 교회 가스 값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가 했더니, 하면서.....자기 목자의 잘못을 어떻게든지 잘못을 들춰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성도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오래 참고,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이 실수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7×7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이다. 정녕 누군가가 잘못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니, 누구든지 그를 찾아가서 권면하여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여러분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자의 도리이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믿고 기도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잘못한 그를 어찌 그대로 방관하시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처리하실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지, 이러한 것들을 인간들이 인간들의 손으로, 인간의 방법으로 실행하는 것은 그에게 악의 모양이 있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투기하는 것이다.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의 투기는 애정의 투기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도 그들에게 사랑의 은사가 임하여 있다고 한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요 서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투기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서로 격려해 주고, 사랑할 것밖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투기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아버지 밑에서 형제자매가 된 우리들은 서로 미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시기할 것도 없다. 질투할 것도 없다. 비방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하여 주어야 한다.
인간의 욕심과 육정에 의해서 투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남이 잘 사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한다. 다른 사람이 나 보다 훌륭하면 사람들은 투기를 한다,
다른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여 주기는커녕 투기를 한다. 누가 권세나 명예가 높아지고 승진하는 것을 보면 투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모습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거나, 내세우거나 뽐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앞서 나가려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투기할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드릴려고 하는 욕심이요.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려고 하는 욕심이다. 이런 것은 좋은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도 누구를 실족시켜 가면서 해선 안된다. 누구를 실족시키는 것은 성경은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욕심을 부려야 한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
이런 비진리를 버려 나가십시다.
악의 모양이, 투기하는 마음이, 다 벗어져 버려야 내 맘에 사랑이 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투기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믿음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악의 모양을 벗어버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성결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아멘
001015/960908 영적 사랑의 은사(4)
고전13:4-7
ㅇ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자기의 물건을 높이 들어 올려 자기 물건을 드러내고, 떠벌리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남 앞에 드러내고, 자랑할려고 하는 그것을 자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못난 것을 가리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더우기 자랑하는 자는 그것으로 타인을 무시하며 우위에 서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랑한다면, 그는 이미 자랑할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기 자랑은 훌륭한 일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과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랑할 수 도 없는 것이다.
고전1:31, 고후10:17절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자랑은 해도 좋다는 말씀이다. 주안에서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 안에서의 자랑은 우리 주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주 안에서 간증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머리가 좋고, 자기가 잘났고 똑똑해서 그렇게 했노라고, 자기 자랑만 실컷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자랑은 상대방에게 믿음과 신앙에 도움과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 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주 안에서의 자랑이다.
주일성수를 이렇게 하였더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제단을 이렇게 쌓았더니, 철야예배를 개근하였더니, 십일조 생활을 이렇게 하였더니, 건축헌금을 이렇게 하였더니, 감사헌금을 이렇게 하였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시더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주안에서의 자랑인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의 보배 원종수권사님이 간증할 때 보면, 대전역전에서 거지 할아버지를 어머님이 모셔왔는데, 자기는 하기 싫었지만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므로 목욕시켜드리라고 하면 목욕을 시켜 드렸고, 자기들도 입지 못하는 내복을 입혀 드리고, 한 칸 방에서 이불 하나에 할아버지까지 이불 속에 발을 들여놓고 잠을 자면서 어머님 따라 새벽기도를 다니곤 했더니, 대전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1등으로 대전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하시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수석으로 졸업하게 하시고, 어떤 시험을 보아도 수석을 차지하게 하시는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원종수 권사가 새벽예배를 나오시기를 원하시기에 눈이오나 비가 오나 새벽제단을 쌓고 있노라고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닌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의 보배 황수관박사도 자기는 국민학교 선생이었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게 해 주시고, 장로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서 장로가 되게 해주시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간증하게 하시고, 연세대 의과대학을 다시 신축한다고 하기에 10억 정도를 믿음으로 약속을 했더니, 방송에 최고의 인기있는 스타가 되게 해주셔서 광고 방송을 하게 해주셔서 그것도 쉽게 낼 수 있게 해주셨다고 간증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 축복받았네 나는 나는 축복받았네 ♪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더니, 내가 이렇게 건강의 축복을 받았다. 나는 이런 응답을 받았다. 이렇게 살다가 난 주님을 만났다. 난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은사를 받았다. 성령 충만을 받았다.
이렇게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주안에서의 자랑이다.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하나님을 심어주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자에게 그 의심을 풀어 주고,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축복을 받았노라’고 간증하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ㅇ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은 “...위에 자기를 나타낸다.” ‘겸손하지 않고, 스스로 잘난체하고, 뽐내며 방자한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 보다 높이려는 마음이요.
다른 사람들 위에 있으려고 하는 마음’이 교만인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그 마음에 진리와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다. 또한 자신의 불안과 열등감을 감추려는 사람이다.
교만하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위에 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깔본다. 우습게 여긴다. 자기 밑에 둔다.
정말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우리 사람은 누구든지 동등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다 형제요 자매요 동등한 자들이다.
사람을 자기 위에 두지 않고, 항상 모든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안에 거하는 여러분들과 저는 그러한 모습이 추호도 없어야 되겠다.
사랑은 결코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전13:4-5).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교만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는 뒤바뀌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거지 나사로는 부자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살았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 천국에 갔다.
그러나 이 땅에서 부유하다고 큰소리치던 집주인인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부자를 향하여 심히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있는 체, 아는 체, 잘난 체하고, 뽐내고, 지식 있는 체하고, 권력 있는 체, 명예 있는 체, 없는 사람 깔보고 얕보고, 자기보다 무지하고 힘없는 자 들은 무시하고 없신여긴다.
그러나 그것이 하늘나라에 까지 연결되는 줄 알면 큰 오산인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역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이들을 심히 어리석은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영적 법칙을 아는 사람은 교만한 자를 볼 때 심히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교만한 사람은 잘난체 합니다 뽐내고 머리를 숙일 줄 모릅니다.
남에게 호통이나 치고, 책망이나 하고, 따지기나 하고 덤비기나 하는데 아주 웃기는 일이다. .
교만한 사람은 이기적인 자를 말한다. 무엇이든지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제일이요, 자기의 뜻만 고집하고, 남의 의견은 받아 드리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악중에 서도 악한 자의 모습이다.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예쁜 자나 못난 자나, 없는 자나 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이들이요, 하늘나라에 가면 한 형제요, 한 자매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하며 내가 먼저 상대방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교만하면서도 교만한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잠8: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14:13절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를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회사에서나 세상에서도 교만한 사람은 결코 오래가지를 못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잠시 잠깐은 이기는 것 같지마는 결국을 보면 패망하고 만다.
성경은 “교만한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겸손한자와 함께 하여 자기 마음을 낮추라”고 말씀하셨다.
잠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여러분,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겸손하여야 되겠지요.
우리는 악의 모양을,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없애버려야 되겠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성결되어 나가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항상 주님으로부터 보호함을 받는다. 지킴을 받는다.
악을 버리고 진리 가운데 살면,
집안이나 교회나 사업터에서 도둑을 맞지 않는다. 원수 마귀 사탄 질병도 틈타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킴 받고 보호 받습니다.
성령의 불담으로 지킴을 받는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성령의 불담으로 지킴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요.
참으로 지킴 받는 보장 받는 성도가 되려고 하면, 신속히 악의 모양을 벗어 버려야 된다.
쓰레기와 같은 악은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내 영혼을 구원해 주는 것도 아니요, 천국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추호도 거만하지 않아야 되겠다.
ㅇ 중국의 장자방(양희)이라는 사람은 중국을 천하통일 시켜 놓고서도, 하나의 벼슬도 받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아주 결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정치하려하지 말고, 농사를 짓거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섬긴다.
그는 2천년 전의 사람이다.
ㅇ 우리나라의 이순신장군을 보자.
시기와 질투,투기와 교만이 없다.
악한자들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투기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그들은 질투하거나 또한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싸웠고,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우리가 보아도 악의 모양이 없다.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보면, 큰 일을 할 때마다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장면을 본다. 옛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래도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옛날에도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 조물주를 인정하였다.
ㅇ 하물며 오늘날의 인간들은 인간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인간은 아직도 바다에 해일 하나도 막지를 못한다. 태풍----
지진 일어나는 것도 막지 못한다.
중국에서는 20년 전에 지진이 일어나서 100만명이 죽었다.
비가 억수같이 오나 막지를 못한다.
우리 중엔 교만한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란다.
ㅇ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ㅇ 이 말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은 결코 무례하게 행치 않는다.
자기 보다 높은 사람에게, 예의 없이 대하는 사람이거나,
자기 보다 낮은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사랑이 아니다.
ㅇ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신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도 예의를 표시할 줄 알아야 한다.
ㅇ 나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예의 범절을 다 지키어 행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요한1서4: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ㅇ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라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자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ㅇ 사랑은 예의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예의와 질서와 상식을 벗어나서는 결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고집이나 무례한 언행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알며, 인자와 온정 그리고 친절과 겸손으로서 모든 분쟁을 종식시킨다(마3:14절)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를 알아보아야 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 무례하지는 않는지 한 번 살펴보겠다.
자연을 훼손하고, 깨끗한 물과 공기 등 자연 우주 만물을 파괴하는 것,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 목자에게 무례히 행하고 불순종하는 것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주의 종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것이고,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자이다. 그러므로 목자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고, 시비를 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야! 이것은 너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모세에게 대드는 것, 시비하는 것, 원망하는 것은 모세 너에게 한 것이 아니요, 그것은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13:20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불순종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에게만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고 있는지를 이 시간에 발견하시고,바로 버려 버리시기를 바란다.
①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
하나님 앞에는 시간이 정해졌으니, 기다리며 기도하고, 먼저 와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어느 식장에 여러분을 초대했을 때, 국회의원이나 장관들, 재벌 총수들이 모두다 미리 와서 대통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대통령보다 식장에 늦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실재로 모 재벌이 모 대통령 때 재벌들을 초대했는데, 교통이 마비가 되어 늦게 도착했다가 괘심 죄에 걸려 완전히 도산 당한 재벌이 있다.
② 예배시간에 조는 것---강단을 보지 않는 것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대통령이 연설할 때 장관이 졸면, 아니면 대통령을 쳐다보지 않고 아래만 보고 있다면, 저 장관이 나를 우습게 여기는 구나 할 것이다.
경호원들이 채크했다가 대단히 혼내 준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사장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 전무나 이사가 졸고 있다면 무례한 것이다. 진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③ 예배시간에 목자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딴 청을 하고 있는 것,
땅이나 보고, 옆이나 구경하고, 사업터, 놀러갈 일, 공상, 잡념으로 가득차 있는 것,
④ 예배중에 껌을 씹(예배 ,설교 ,찬송, 기도 중)는 것 하나님이나, 목자에게, 또한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인간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사장이 어떤 지시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하고 있는데,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장과 이사가 있는 회사나 그런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장에게 전무나 이사들, 중역들이 그러한 태도 보인다든지, 장관이나 국회의원들이나,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호원들이 그런 행동을 취하는데도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 회사나 그 나라꼴은 알아 볼만 한 것이다.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⑤ 예배시간에 옆 사람과 대화하거나 떠들거나 예배와 상관이 없이 웃거나 하는 행위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다.
잘못하면 주의 종을 조롱하는 태도가 될 수도 있다.
예배 시간에 아이가 운다거나 할 때는 어쩔수 없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일어나 나가는 행위도 무례한 행동이다.
그러면서도 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할 수가 있을까요?
대통령이 연설하는데, 누가 부른다고 나갈 수 있습니까?
⑥ 교회 안에서 여성도님들이 바지나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행위,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행위는 무례한 행위인 것이다.
예식장에 갈 때,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신22:5절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자니라” 여자는 할 수 있으면 치마를 입으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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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었다. 6,25를 전후해서 장로 7명 가운데 4명이 순교하였다. 4분 중에 강덕기장로님이 계시는데, 공산주의자가 나무에 그를 묶어 놓고 양 눈알을 뽑아 버렸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수가 없더니,두눈이 빠지고 나니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구나”하고서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하면서 찬송을 불렀다.
그 얼굴은 천사같이 빛났다. 그 얼굴에는 평안으로 가득했다. 그 때에 찬송을 듣고 치가 떨리도록 그 마음이 괴로워 총개머리로 강장로의 이빨을 다 뽑아 놓았으며,턱뼈를 모조리 짓이겨 부숴 버렸다. 그는 장렬한 순교를 당하였다.
국군이 진격하였는데, 미쳐 도망가지 못한 두목을 붙잡아 나무에 매어 놓았다. 그리고 강장로의 아들을 데려다가 마음대로 죽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은 나의 원수로되 나는 당신을 주의 사랑으로 용서하며, 주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가십시요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하였다고 한다.
96.9.15 영적 사랑의 은사(5)
고전13:4-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전 13장의 사랑장은 도덕 강의 같은데,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명한 것이다. 우리가 영적 단계로 올라가려면 이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들이 성결, 성화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알아야 하고, 이 단계를 거쳐야 성결,성화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유익이라는 말은 ‘자기의 이익’을 말한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이 말의 의미는 ‘자기의 이로움’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직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개인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을 더 귀하게 여길줄 아는 것이다.
영적인 사랑의 은사는 내가 손해를 본다할지라도 내 말보다도 상대방을 더 신뢰해 주어야 한다. 사랑의 은사는 나보다도 상대방의 인격을 더 존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내 유익 보다도 상대방의 유익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번 이 시간에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와 이웃을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나 자신 보다도 더 존중하고,신뢰하고,이해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 중심이 내 안에 있는가를 살펴보자.
먹는 것도 상대방이 더 좋은 것을 먹게하고 나는 그만 못한 것을 먹습니까? 물건이나 상품을 나눠 가질 기회가 있을 때도, 상대방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가지게 하는, 항상 상대방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나 때문에 상대방이 못간다면, 상대방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다.
차를 탈 때도 나 보다도 상대방을 먼저 태우는 것이다.
앉는 자리도 예의 범절을 지켜, 위 아래를 구분하여 윗사람이나 상대방을 좋은 자리에 앉히고, 나만 못한 사람이지만 좋은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덕관념 질서관념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다. 늦게 와서도 좋은 자리 앉으려고 하고, 늦게 와서도 먼저 차를 타려고 한다.
여름수양회를 가서 물놀이하러 들어 갈 때 보면, 누군가는 막사를 지켜야 하는데, 서로들 갈려고 하는 마음이지 남아서 막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때에 희생 정신을 가지고 내가 남겠습니다>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때는 한밤중에 비가 억수같이 오고, 바람이 몰아친다. 다들 피곤하게 잠을 잔다. 그러면 누군가가 일어나서 밖에 있는 살림들을 비가 맞지 않도록 정리를 해야 한다. 그럴때 보면 다른 사람을 깨우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이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교인들 가정에 큰 일을 당하거나,상을 당했을 때도 피곤하고, 축의금ㄴ이나 부의금도 들어가지만, 그런 곳이라면 꼭 참석을 하고, 가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도 우리의 곁에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이러한 분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줄 모른다.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바로 이런 마음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잔치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잔치상 앞에서 제일 말석, 제일 구석진 곳에 앉으라고 하셨다. 만일 저자리가 당연히 내 자리려니하고 상석에 앉았는데, 주인이 와서 ‘당신 보다 더 귀한 분이 오셨는데, 자리를 좀 양보좀 해주십시오’ 하면 무슨 망신이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잔치집에 가서 제일 말석에 앉았는데, 주인이 와서 ‘어서 일어나셔서 상석에 앉으라’고 한다면 얼마나 존귀한 일이며, 주변의 사람들이 볼때도 얼마나 좋게 보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내게 좋은 것을 먼저 취하고, 좋은 자리를 먼저 앉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 이웃, 내 형제부터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나 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나 보다, 먼저 내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내 일 보다 교회일 부터 생각하는 사람이요, 나 자신보다도 내 아내, 남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자신 보다는 내 이웃,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권세와 영화도 상대방에게 양보해야 할 상황이라면 양보하고 포기하는 사람이다. 받기 보다는 주려고 한다. 이것은 영적 사랑의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은 주는 마음이요 희생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도 주는 것이 더 기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행20:35절
하나님은“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막12:31절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의 은사가 맺히면, 성을 내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이로부터 해를 받거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선악과를 따멱고 인간의 선한 본성이 악한 본성으로 변해져 있기에 분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거할 수가 없다.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막대한 장애를 준다.
사랑은 사람을 가장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냄은 사람을 가장 부정적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성내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마귀의 무서운 2대 무기가 된다.
마귀는 여러분의 마음을 화내게 하고, 성내게 하고 내 이웃들을 미워하게 하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이것들이 마귀의 무기이다.
성내는 마음이 발생했을 때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 좋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생각해 보면 얼마전에 성낸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화나 혈기를 내는 일, 얼굴이 궂어지는 일, 얼굴이 일그러 지는 일, 욕설이나 화를 내는 일, 남을 오해하는 일이나, 평가하는 일 등등은 우리에게서 없어져야 되겠다.
성도들이 교회내에서는 여간해서 화를 내거나 혈기를 내는 일이 없겠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나 목자 앞에서, 교인들 앞에서, 형제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해도, 혹 가정에 가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부모에게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화를 낸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동행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절제할 수 있고, 목자 앞에서 절제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동행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도 화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게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왜, 여러분들이 화내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몸을 성전 삼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시며, 항상 여러분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데, 무엇은 모르시겠습니까? 항상 감찰하고 계신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꿰뚫어 보고 알고 계신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혈기를 부리고, 이웃과 등을 돌리고 살수 있습니까? < 제가 한 번은 눈에 자꾸 눈꼽이 끼었다. 그런데 나는 왜 내가 눈꼽이 끼었는지를 알았다. 안목의 정욕이 있었기 대문이다. 어떤 분이 눈에 다리끼가 났다면, 눈으로 혈기를 부렸거나, 안목의 정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의 일을 범했을 때, 마귀가 하라고 하는대로 행함으로 죄를 지었을 때 우리에게 작든지 크든지 간에 어떤 형태로든지 재앙이 다가온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작은 죄를 지었을때는 작은 재앙이, 큰 죄를 지었을 때는 큰 재앙이 내려진다.
우리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 그런데 교회에서나 목자 앞에서는 웃는 얼굴이 집에 가서는 왜 일그러집니까? 왜, 화난 얼굴, 성난 얼굴, 골난 얼굴이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사랑의 은사를 조금 받은 사람은 성내거나 화를 많이 낼것입니다. 적당히 받은 사람은 가끔 성내거나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충만히 넘치도록 받은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성난 얼굴이나 화난 얼굴을 볼수도 없을 것이요 비진리에 속해져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 가증스러울 만큼 천연스럽게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일 것이다. 아 멘
96.9.22 영적 사랑의 은사(6)
고전13:4-7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악”이란 카코스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악의 형상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적 사랑의 은사가 임한 사람은 상대방의 결점을 감싸준다. 상대방의숨겨져 있는 결점을 들추어 내지 않는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잘못되거나 실패하기를 바라지않을 것이다. 사랑의 마음은 이웃이 잘 못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형제가 잘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영적 사랑의 은사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의 근성은 이웃이 땅을 사고 집을 사고 성공했다고 하면 배아파한다. 이래서는 아니되겠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공했다고 하는데 배가 아플리가 있겠습니까?
배가 아프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사랑의 은사가 임하지 않은 사람은 악한 생각을 한다.
내 이웃울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악한 사람은 이웃이 잘되었다고 하면, 배아파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죄인 것이다.
요한일서3: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니, 죄는 곧 불법이니라” 하나님께 합당치 아니한 것은 다 악인 것이다. 악은 원수 마귀가 주는 것이요, 악한 생각은 원수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요. 그러므로 악한 생각이 오면 버려야 될 것이요, 거기에 가담하지도 말아야 한다. 악한 것을 보지도 말아야 한다. 듣지도 말아야 한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기억지도 말아야 하고, 버려야 한다. 아예 차단을 해버려야 할 것이다. 되새김질하려고도 말아야 할 것이다.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악한 원수 마귀와는 피흘리기 까지 싸워서 악을 이기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불의(올바르지 않은 것)와 함께 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오.의로우신 분이시오.성결하신 분이시오.온전하신 분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의와는 전혀 함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여러분이 진리안에 거하시고, 불의를 벗어버리면,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딸로 합당하게 변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수 있는 것이다.하나님 앞에 합당해야 내가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불의하지 않기 때문에 불의한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가 없다. 마태7장에 보면 “불법(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을 행하는 자는 내가 버리겠다”고 하셨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불법을 행한자, 불의를 행한자는 내 책에서 이름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하셨다.
불의는 하나님과 원수이고, 마귀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불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지 않는다. 권력을 획득하거나, 명예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불의를 행치 않는다. 불의라는 말은 악이 행하여지는 것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누가 잘못되어지는 것을 보고선....
그것 참 잘됐다. 매우 고소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집에 화재가 났으면, 그것 참 잘됐다, 그럴줄 알았다고 말한다. 깨소금이다라고 말한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선생님한테 매를 맞으면 참말로 깨소금이다.- 신난다는 마음을 갖거나 말을 한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나에겐 사랑이 없는 소치이구나하고 반성하시기 바란다. 불의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것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악한 일을 바라보지도 말것이며, 그런 일에는 가담하지도 말것이며, 기뻐하지도 말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애통해하며,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공자 맹자를 잘 알고, 윤리와 도덕을 누구 보다도 잘알았어도, 정치 할 때를 보면, 불의에 가담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그런 일에 동조하고, 나라 정권이 툭하면 바뀌고, 상대를 모함하고, 이간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사약을 받아야 하고, 유배를 당해야 하고, 그런 역사가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가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안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전부가 자기가 옳다고말한다. 여당은 여당만 옳고, 야당은 야당만 옳고, 야당 중에서도 자기 당만 옳다고 말한다. 자기 당이 불의를 행해도 자기 당이 하는 것은 옳다고 말한다. 상대편의 합당한 것도 상대방은 다 틀리고, 자기당은 틀린것도 다 합당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너무너무나 사랑이 없는 소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 여러분! 그런 일이 없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존경해 주고, 나보다 낫게 여겨 주고, 이해해주고, 잘못은 감싸주어야 할 것이다. 서로 서로가 칭찬해 주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적극적으로 기뻐한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내게오라 내게오라♬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가 있다. 우리 주님이 곧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영적 사랑의 은사가 임한 사람은 전도하는 것, 진리대로 사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하나님의 사업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에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어느 교회가 교회를 크게 지면, 그 돈 있으면 구제나 하라고 비판한다. 자기는 구제헌금도 하지 못하면서 비난한다. 어느 교회가 크게 부흥되면, 질이 좋아야지 양만 많다고 되는가라고 말한다. 부흥되는 꼴을 못본다.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는 꼴을 못본다. 그런 것은 모두 신비주의니 이상하다느니하면서 비판한다.
전도를 하고, 전도를 하면서 외치고, 전도지를 인쇄해서 돌리고, 선물을 준비해서 나누워 주면, 이젠 그렇게 전도해서 되느냐 돈만 낭비하는 일이다라면서 비판내지는 불평만 한다.
이런 마음을 누가 노리고 있겠습니까? 사탄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단이 이런 마음을 주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복음을 듣고,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
또 진리만이 우리를 영생시킬 수 있고, 여러분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다.
여러분,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서 가정에서 내 자식을 온전한 사람으로, 선한 사람으로, 실력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부모나 도덕 선생님들이, 담임교사들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라, 나쁜짓하지 말아라, 거짓말하지 말아라, 강도짓 하지 말아라, 간음죄 범하지 말아라, 도적질 하지 말아라고, 그들은 십계명을 잘 몰라도 그들은 학생들을 잘 가르친다. 그러나 그 학생들이 자기 자녀들이 변화가 됩니까? 그러면, 국민학교 학생보다 -중학교 학생이-고등학교-대학생이 더 착해져야 할텐데, 올라 갈수록 점점 더 대다수가 악해진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나, 자기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착한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어떠한 윤리나 도덕으로도 삼강오륜으로도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만이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진리만이, 생명의 말씀만이, 예수님의 사랑만이, 성령만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온전한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만이 능력을 행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절 골수를 쪼개기 때문이다.
여러분, 내가 불의를 행할 때, 내가 악한 일을 행할 때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탄식을 하신다. 내안에 계신 성령인은 괴로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이켜 버릴 수밖에 없다. 진리 안에서 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므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잘못을 행하고, 불의를 행해도 아무렇지도 않더라고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성령님이 탄식하는 소리도 못 듣는다. 왜 못듣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 그런 사람은 곤곤한 마음도 없다. 아무렇지도 않다. 양심에 가책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진리만이,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만이, 우리를 영생하게 할 수 있다. 영원한 나라,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하실 수 있다. 나를 변화시키실수 있다. 또한 내 안에 있는 비진리를 버리고 또 버리면,하나님의 자녀로써 한발 한발, 천성문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는 것이다.
진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도 아름답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얼굴도 아름답게 보인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본다. 비진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도 아름답지가 않아서, 얼굴도 아름답지가 않다. 얼굴이 늘 어두운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기름진 것을 먹고, 얼굴에 좋은 화장품을 바르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도, 영적인 빛이 나오지가 않는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영적인 빛이 얼굴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스럽고, 예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진리안에서만 기뻐해야 한다. 진리만 먹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만 쫓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자가 되면, 진리안에서 기뻐하는 자가 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살수가 있다.
우리 주님의 부활도 믿고, 영생도 믿고, 영원한 나라도 믿고, 하늘나라에서 주어지는 상급도 온전히 믿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늘나라 상급도 바라보고 기뻐한다. 그러면서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아가는 행위가 따르며,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까지라도 견디면서 불편없이 죽기까지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
우리가 진리와 함게 기뻐해야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어야 만이 모든 것이 믿어지고, 믿어지니 모든 것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내가 온전히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의에 면류관을 받고, 금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가 혹시라도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자. 누가 나를 해하고자 했기에 내게도 악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변명인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였다.
내가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있는지, 내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내가 성내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를 돌아 보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란다. 아 멘
96.9.29 영적 사랑의 은사(7)
고전13:4-7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신에게 해를 끼쳤을 지라도 그를 보복하거나 그의 잘못을 폭로하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이처럼 영적 참사랑의 은사를 받은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주거나 죄를 지은 자의 처지를 이해한다. 그의 괴로운 심정과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가 하루속히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는 행위는 모든 것을 얻는 행위요 원수까지라도 얻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사랑을 소유하려면, 모든 것에서 참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신경질을 내거나 혈기를 내거나 싸우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를 보면, 처음에는 상대방의 흠이나 티를 보지 않는다. 마냥 좋아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온유하고 부드럽게 겸손하게 상대방을 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속되다가 보면,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고, 그 단점을 을 참지 못하고 지적하고, 부정적인 면만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을 보고 실망을 하여, 무례히 행하고, 상대에게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혈기도 부리고 싸움도 한다.
이러한 것은 사랑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진정 영적 사랑의 은사가 임하였다면, 상대방이 비록 실수를 하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오래 참을 수가 있다. 상대방의 흠과 티도 보지 않고, 상대방의 장점이나 긍정적인면만 보게 된다.
사랑 영적 은사는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랑과 위배되는 모든 것 까지’라도 참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사랑의 결론을 말하고 있다. 상대가 나를 투기하나 나는 투기하지 않고, 상대가 나를 시기하나 나는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참사랑의 영적 은사가 임한 사람은 ‘내가 자랑하던 것도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했던 모든 것을 뉘우치고 겸손해한다’ ‘무례히 행하던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예의 범절을 갖춘다’ ‘내게 유익을 구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린다’ ‘성내던 삶을 다 청산하고 어린양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해 진다’
‘모든 사사건건을 악한 쪽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선한 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 행동을 한다’ 그리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이를 기뻐한다’
이런 악한 비진리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어떠한 것이라도 참을 수 있는 것을 ‘참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음은, 참사랑의 은사가 임하였기 때문이요.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의 말씀들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66권의 말씀을 우리는 온전히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도 믿습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천국 아버지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믿음 가운데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요 진리안에서 사는 것이 사랑이요 이 진리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요,
이 말씀대로 살다보면 천국가서 엄청난 상급도 받고 면류관도 받는 것이요, 하늘 나라에 가면 괴로움도 없고, 고통스러움도 없고, 싸우는 일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낼 것이다. 혈기가 나면 혈기를 낼 것이다. 그냥 내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유익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천국을 날마다 바라보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악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진리에 어긋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혈기나 짜증을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행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남을 미워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우리가 이러한 죄들을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고,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곧 오신다고 말하는 데도, 이러한 것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범죄하면서 사는 것이다. 주일도 쉽게 범해 버리고, 혈기가 나면 절제하지 못하고 혈기가 나는 대로 그냥 내 버리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악을 행한다.
내가 온전히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이 믿어 진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100% 하나님이 믿어진다면,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주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내가 행한대로 심판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뼈저리게 믿어진다면,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66권의 말씀 전부가 믿어진다고 한다면, 인간의 거룩한 부활과 주님의 재림을 진정 믿고,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진정 믿는다고 한다면, 그리고 확실하게 내가 행한대로 심판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진정 믿음으로 이러한 것을 바라는 믿음이 있다면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감사하면서 살게 될 것이요 모든 것을 쉽게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기뻐하며 나는 살리라 참으면서 나는 살리라♬
누가 나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면, 참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3사람의 국무총리 중에서 수석 국무총리였다. 그런데 아래 부하들의 모함을 받고 사자굴에 던지움을 받았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다 당했다. 수석 국무총리인 다니엘이 아랬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사자굴에 던지움을 당할 때 얼마나 부끄러워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수모를 다 감당하여 냈다. 모든 것을 다 참아냈다.
결과는 다니엘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이 오히려 사자굴에 던지움을 받았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사자굴에서 나와서 왕의 총애를 더 받게 되었고,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놀라운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다니엘의 3친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억울하게 풀무불에 던지움을 받았으나,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상하지 않도록 지켜 주셨다. 그들을 더 돈독한 자리에 앉게하여 주셨다. 오히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역사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도록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께 믿고 맡기고, 모든 것을 참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내게 온전히 없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눈앞에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참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고, 영안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보고, 영안으로 본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또 무엇인들 못참겠습니까? 또 무엇인들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 우주만물을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그 분께 믿고 맡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믿음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맡기지 못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온전히 참지 못하는 것이다. 정녕 믿음 안에 내가 거하고 있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다. 그러면 결국 승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 세계의 모든 역사를 보십시다. 악은 처음에는 득세하고 승리한다. 그러나 결국은 망한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악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악은 힘이 세니까 악이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멸망을 하였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
사나운 짐승과 순한 짐승과 싸우면 이 땅에는 당연히 사나운 짐승만 있어야 할 것이요 사나운 새와 순한 새와 살고 있으면 당연히 사나운 새들만 남아 있어야 하는데, 순한 새들만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람도 힘센자가 약한자를 이기는 것 같지만, 순한 사람이 약한 사람이 오래오래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맨주먹으로 싸우는 사람과 총 칼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 싸우면 당연히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요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역사, 세계역사가 존재해 올 수 있는 것이다. 약한자 다윗과 강한자 사울왕이 싸우면 사울왕이 이길 것 같았으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고,모든 악을 버려 버리고,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불의한 일과 불의한 사람을 배척한다. 사랑은 의로운 일과 의로운 사람과만 더불어 동고 동락하기를 원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의 참 모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참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단순히 부드러운 성격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불의를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적극적이고도 열정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진정한 평화와 진리에 입각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참사랑은 모든 비진리를 몰아내며, 모든 부패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진리 안에서 겸손하도록 역사한다. 참사랑은 성도로 하여금 겸손하도록 역사한다. 참사랑은 성도로 하여금 무례하고,이기적이고, 악과 성내는 불의를 떠나게 한다.
또한 참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성도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떠한 어려움도 어떤 상황에서도 참을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견딜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망가운데 참고 견디도록 역사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믿음 과 소망과 사랑은 기독교에서 꼭 필요한 기독교의 진수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면, 그 기초가 사랑이 되어야 한다.
또한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천국 가기까지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이요, 정작 하늘나라에 가서는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미 믿음과 소망으로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영원한 것이고, 폐하여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것이다(고전13:13).
따라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진리대로 행함으로 영적인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겠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여야 한다.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 되겠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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