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무엇이 밥 먹여주냐, 라고 하며, 자신이 보기에 쓸데 없는 짓을 하는 남을 타박하는 사람 치고 평소에 식생활에 실제로 큰 관심을 쏟거나 자기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 매번 주의하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에게 밥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 걸까. 밥이 아닌 다른 어떤 행위가 그에게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와는 대척점에 선 말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들 수 있다. 전북 진안군 저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외갓집을 내가 수능 보기 전까지는 자주 가서 농번기에 도와드렸던 기억이 난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눈을 부라리며 달겨드는 고구마 밭과, 뙤약볕만큼 매운 고추밭도 온몸이 배배 꼬이도록 힘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가을에 깨를 털 때였다. 깨를 털기 위해 외할머니가 미리 깻대를 다 잘라 한데 모아서 말리고 나면, 날이 좋을 때 길고 검은 농사용 검정 비닐을 깔고 한 손에는 깻대를, 다른 손에는 도리깨나 작대기를 들고 깨를 탁탁 후려야 한다. 중광 스님이 10년 먹을 갈면 부처도 갈아버린다고 했던 것처럼, 깨 후리는 작업은 연륜이 필요해서, 나같은 도시 초짜는 15분도 안 되어 팔과 어깨가 시큰시큰해졌지고 눈에 습기가 그득 찼지만, 외할머니는 몇 시간 동안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깨를 후리며 '그러게 공부가 가장 쉬운 것이여'라고 넌지시 농을 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고 나서 먹는 저녁밥이 어찌나 꿀떡꿀떡 잘도 들어가던지! 외갓집 옥상이 아직 틔여있을 때면 가족들이 다 올라가 삼겹살을 굽고, 삼촌들은 늘 그렇듯 소주를 한두 병씩 까고, 나랑 사촌동생들은 모기장 안에 들어가 이내 잠에 빠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밥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직접 생고생을 했으니 내가 어찌 밥을 함부로 남기겠는가. 지금도 나는 외갓집에서 가르쳤던 대로 내 그릇에 오른 음식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유럽에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버릇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를 목격했다. 저번 주 카니발 시즌에 길거리 여기저기 흩뿌려진 식음료들을 보곤 괜히 아쉽기도 했다.
서론이 길었다. 밥 먹으려고 산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식에서 위안을 찾는 나같은 사람도 여럿 있다고 짐작을 해본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오래 함께 해온 특정 인형이나 이불에 애착을 가지듯이, 많은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들이 모국의 식문화를 그리워하고 어떻게든 회복하려 한다. 비록 그가 지금 먹는 해외의 한식이 원래와 같은 아우라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틸부르흐에 온 한국 친구들이 지난 1월 마지막 날부터 2월 첫날까지, 설 명절에 아시안 마트부터 들러 가래떡을 숭덩숭덩 썰고 소고기를 다지고, 사골 육수를 내서 기어코 떡국을 끓여냈던 이유이다. 이 정도면 가히 의지의 한국인이라 칭해줄 만 하다. 여기에 비견할 만한 애착의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기네 고장 음식에 가지는 자부심 정도이다. B 씨가 특히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그나마 한국에 대한 일말의 그리움이라도 가지는 경우가 두어 번 있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한식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애초에 네덜란드는 현지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로 전통 식문화랄 것이 없는 동네이므로.
틸부르흐에 도착하고 나서 개강까지 일주일 정도 텀이 있었다.(네덜란드는 1월 마지막 날에 2번째 학기가 시작하고, 첫 학기는 8월 중순이나 말은 되어야 시작한다) 그 기간 동안은 밤마다 술, 술, 술이었다. 네덜란드는 도수가 높은 주류는 일찍 문을 닫는 리쿼 스토어에서 평일에 사야하고, 마트 주류코너에 가도 늘 직원이 따라붙는 등 술을 사는 게 한국보다 어려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와인과 맥주를 한 아름씩 들고 와서는, 오늘은 3층 공용공간에서, 다음 날은 옆 건물 2층에서, 이런 식으로 파티를 벌이는 것이었다. 분명 기숙사 규정에는 밤 9시 이후론 조용히 하자고 명시가 되어있었지만, 그걸 지키면 유러피언이 아니지. (반골 기질이라기보단, 그냥 신경을 별로 안 쓰는 것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교 개강 직전이겠다, 코로나로 인해 다른 아웃도어 활동도 못하겠다, 보상 심리 같은 것이 발동한 기숙사 학생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태생이 아싸인 나는 이렇게 밤마다 파티를 하는 것이 좀 뜨악했지만, 한국처럼 2차, 3차씩 가는 회식을 하거나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느껴졌다. 이 동네에서 이것도 안 하면 클럽 가는 것 외에 같이 뭘 하겠는가. 그리고 다른 한국 친구와도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지만, 유럽 대학생들은 한국처럼 하드코어하게 술을 권하거나 마구 술게임을 하는 문화는 없어서, 이 점도 내가 밤마다 술을 마시게 하는 데에 편안함을 느끼게끔 해줬다. 기숙사 내에서 파티를 하면, 한국에서 건대 다닐 때처럼 막차 끊길 염려는 안해도 되고, 내가 알아서 기숙사에 돌아갈 수 있다고 판단한 친구들이 그냥 나를 먼저 혼자 보냈다가 그 다음날 새벽에 내가 학교에서 3km는 떨어진 처음 보는 국도 아스팔트 바닥에서 안경, 지갑, 필통 등을 다 잃어버린 채 발견되었던 일도 다시 발생하지는 않겠지! (이 드라마틱한 모험을 다음에 다시 술회할 기회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결론적으로 나는 그 주엔 밤마다 술을 마셨다. 다행히도 한국 술이 없어서, 외국 술을 한국보다 싼 가격에 많이 맛볼 수 있다는 핑계로 말이다. (참이슬이나 카스가 한류가 되지 않아 다행이다) 아빠는 이런 버릇마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자기를 닮았다고 통탄했었다.
여독이 덜 풀린 상태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술이 자꾸 들어가다보니 몸이 버티다 버티다 기권을 선언했다.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가 기억 못하는 쓰레기통이 침대 머리맡에 비치되어있고, 세상이 빙빙 돌던 것이 기억난다. 편두통이 계속되었고, 물 이외에 다른 것을 먹으면 계속 토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얕은 기침을 자꾸 했고, 몸이 뜨끈뜨끈했다. 대단한 숙취구나, 어제 베일리스랑 와인을 마시다가 곳곳에서 모인 구소련 출신 애들하고 보드카를 계속 스트레이트로 퍼마셔서 그런가보다. 특히 몰도바, 리투아니아, 카자흐스탄 친구들이 내가 러시아어를 약간 한다는 걸 알고 놀라서 '안드류하'(내 영어 이름이 앤드류다)라고 애칭을 지어주고 다같이 남자답게 보드카로 달렸던 게 화근이었다. 따듯한 꿀물을 외엔 마실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샤워를 한 뒤에 계속 잤다. 저녁에 토마토 수프를 약간 먹은 것 외엔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정신을 못 차렸다.
다음날 아침은 확실히 몸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숨쉬는 게 불편한 것 아닌가. 상기도 부분이 계속 자극을 받아서 쓰라렸고, 기침이 계속 나왔다. 특히 인후 부분에 집중적인 불편함이 있었다. 계속해서 오한이 들었다. 아하, 위산이 역류해서 목이 상했나보다. 물을 많이 마셔야지. 기가 허해졌으니 밥도 잘 먹어야겠어. 내가 이 층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회복을 제대로 못 하는 티가 나는구나. 우리 기숙사 같은 층에 미국 여자애가 자가격리에 들어간 것은 그날 오후부터였다. 나는 수프를 먹으면서 그것 참 갑갑하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다가올 일은 예상도 못한 채 말이다.
금요일. 일어나보니 이번엔 코가 꽉 막히고, 콧물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가만히 있으면 맑은 콧물, 코를 풀면 어두운 콧물이었다. 원래 눈치가 없는 편인 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숙취가 3일을 가진 않을텐데. 기숙사 바로 맞은 편에 사는 대만 친구가 그날 아침에 자가검사 결과 코로나에 걸렸다고 모두에게 알려왔다. GGD에 전화로 문의해본 결과 무료 코로나 검사 키트를 지금 신청하면 1주일 안에 도착한다고 했다. 여기서 전산으로 되는 것은 없었으며, 나는 주소와 이름, 이메일을 한 글자 한 글자 전화 너머로 불러줘야 했다. 무료 검사 키트를 기다리는 동안 코로나를 이겨내고 음성 결과값을 얻으라는 네덜란드 보건당국의 자비로움에 혀를 내두르며, 이미 코로나에 걸렸었던 프랑스 친구에게서 자가검사 키트를 빌려 내 방에서 진단을 해보았다. 포장을 뜯고 콧속 깊숙히 면봉을 찔러넣은 뒤, 시약에 면봉을 휘젓는동안 드는 생각은 '내가 기숙사 친구들에게 나도 모르는 새에 전염시킨거라면 어쩌지'하는 미안함과, '밥은 어떻게 해먹지'하는 걱정이었다. 정확히는 보균자 상태로 수요일, 목요일 동안 돌아다닌 것에 대한 죄책감과 앞으로의 막막함이 컸다.
아주 선명한 두 줄. 양성. 제기랄. 숙취랑 코로나도 구분을 못 하는 멍청이 같으니라구. 다모클레스의 검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일단 나는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Whatsapp으로 주변에 알리고, 한국에서처럼 어디서든 계속 마스크를 써야지. 정부 지침대로 GGD에서 PCR검사를 받아 결과를 확정짓기 위해 일요일 오후에 브라반트 지역 코로나 검사장으로 가는 것 외에는 최대한 방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많이 자야한다. 가족한테는 알려야 하나?
가족에게 내가 아프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대체로 건강 체질이 아니며, 강건한 편도 아니다. 제일 큰 손주가 이 시국에 해외 나갔다가 역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엄마 아빠 동생 속이 얼마나 꺼멓게 타들어가겠는가. 할머니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걱정으로 건강이 상하실 거다. 더군다나 그 분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는 상황이다. 내가 그들 마음에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감추자. 아예 파티용으로 샀던 유니콘 뿔장식에 러버덕 문양 잠옷바지까지 차려입고 잘 지내고 있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자.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오롯이 나만이 감당해야할 일이라는 걸 깨닫자 조금 씁쓸한 감이 들었다. 어른이 되는 기분 말이다. 지금까지도 내 친한 한국 친구 두세 명만 내 확진 사실을 알지, 가족들은 내가 코로나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거짓말에 후회는 없다.
다행히 친구들이 도움을 주었다. 다른 한국 학생 두엇도 확진 판정을 받아서, 아직 건강하고 부엌 출입이 자유로운 분들이 떡국과 파스타 잡채(당면을 못 찾았다), 삼겹살 김치볶음을 방으로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나도 출국할 때 바리바리 싸들고 온 즉석식품을 열심히 먹어치웠다. 일요일에 GGD에 걸어갔을 때는 오히려 몸이 제법 거뜬해진 느낌도 들었다. 물론 출입구가 하도 이상한데에 있어서 찾느라 기력이 빠지긴 했지만. 분명히 나는 회복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 차례 고비가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학기가 시작하는 1월의 마지막 날.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후각이 완전히 상실된 거 빼고.
-피곤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뒤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