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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초기 기적의 표징 (2:19-25)
모압과의 전쟁 중 엘리사(3장)
이스라엘의 궁핍한 자들을 위한 엘리사의 사역(4장)
엘리사가 나아만을 고치다(5장)
선지자 중 한 사람을 구출한 엘리사(6:1-7)
엘리사가 아람 침략자들로부터 요람을 구출함 (6:8-23)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사마리아에 대한 아람의 포위가 해제됨 (6:24;7:20)
수넴 여인의 땅이 회복되다 (8:1-6)
엘리사가 하사엘의 이스라엘 압제를 예언하다 (8:7-15)
요시야(22:1;23:30)
성전 수리; 율법책의 발견(22장)
언약의 갱신; 요시야 통치의 끝 (23:1-30)
이집트로 유배된 여호아하스 (23:31-35)
여호야김: 최초의 바빌론 유배 (23:36;24:7)
여호야긴: 두 번째 바빌론 유배 (24:8-17)
시드기야: 세 번째 바빌로니아 포로 (24:18;25:21)
남은 자들을 애굽으로 옮기다 (25:22-26)
바빌론에서 여호야긴을 높이다 (25:27-30)
(열왕기상하 종합 참고 : 열왕기상에 언급된)
Title
1 and 2 Kings (like 1 and 2 Samuel and 1 and 2 Chronicles) are actually one literary work, called in Hebrew tradition simply "Kings." The division of this work into two books was introduced by the translators of the Septuagint (the pre-Christian Greek translation of the OT) and subsequently followed in the Latin Vulgate (c. a.d. 400) and most modern versions.
제목
열왕기상하는 사무엘상하, 역대상하 처럼 히브리 (관습·신앙등의구전에의한) 전승(구전口傳/구비口碑)을 통해 단순히 "열왕"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문학 작품입니다. 이 책을 두 권의 책으로 나누는 것은 칠십인역(기독교 이전의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의 번역자들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라틴어역 성서(라틴 불가타 성경, 서기 400년 경)와 현대판 성경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In 1448 the division into two sections also appeared in a Hebrew manuscript and was perpetuated in later printed editions of the Hebrew text. Both the Septuagint and the Latin Vulgate further designated Samuel and Kings in a way that emphasized the relationship of these two works (Septuagint: First, Second, Third and Fourth Book of Kingdoms; Latin Vulgate: First, Second, Third and Fourth Kings). Together Samuel and Kings relate the whole history of the monarchy, from its rise under the ministry of Samuel to its fall at the hands of the Babylonians.
1448년에는 히브리어 사본에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부분이 나타나 있으며 이후 히브리어 본문의 인쇄판에도 계속 적용되었습니다. 칠십인역과 라틴어역 성서는 이 두 작품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추가로 명시했습니다(칠십인역: 왕국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책; 라틴어역: 열왕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사무엘기와 열왕기는 함께 사무엘의 사역 하에서 흥성한 것부터 바빌로니아인들의 손에 멸망하기까지 군주제의 전체 역사를 설명합니다.
The division between 1 and 2 Kings has been made at a somewhat arbitrary and yet appropriate place, shortly after the deaths of Ahab of the northern kingdom (22:37) and Jehoshaphat of the southern kingdom (22:50). Placing the division at this point causes the account of the reign of Ahaziah of Israel to overlap the end of 1 Kings (22:51-53) and the beginning of 2 Kings (ch. 1). The same is true of the narration of the ministry of Elijah, which for the most part appears in 1 Kings (chs. 17 - 19). However, his final act of judgment and the passing of his cloak to Elisha at the moment of his ascension to heaven in a whirlwind are contained in 2 Kings 1:1 -- 2:17.
열왕기상하 사이의 구분점은 다소 자의적이지만 적절한 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왕국의 아합의 죽음(22:37)과 남왕국의 여호사밧의 죽음(22:50) 직후를 분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구분하였기에 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의 통치 이야기가 열왕기상의 끝부분(22:51-53)과 열왕기하 시작부분(1장)과 겹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열왕기상(17-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사역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순간 그의 마지막 심판과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열왕기하(1:1-2:17)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성경) (열왕기상22:37) 왕은 죽고, 사람들은 그 주검을 사마리아로 가지고 가서, 그 곳에 묻었다. (열왕기상22:50) 여호사밧이 숨을 거두니, '다윗 성'에다가 조상들과 함께 그를 장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서,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열왕기상22:51-53)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 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는 두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리게 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은 길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는 바알을 섬기고, 그것에 절을 하여서, 그의 아버지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
Author, Sources and Date
There is little conclusive evidence as to the identity of the author of 1,2 Kings. Although Jewish tradition credits Jeremiah, few today accept this as likely. Whoever the author was, it is clear that he was familiar with the book of Deuteronomy -- as were many of Israel's prophets. It is also clear that he used a variety of sources in compiling his history of the monarchy. Three such sources are named: "the book of the annals of Solomon" (11:41),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el" (14:19),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Judah" (14:29). It is likely that other written sources were also employed (such as those mentioned in Chronicles; see below).
저자, 자료와 저작연대
열왕기상하의 저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비록 유대 전승은 예레미야를 자자로 보지만 오늘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저자이든 간에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신명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료로는 세 개 즉 '솔로몬 왕의 실록'(11:41),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14:19), '유대왕 역대지략'(14:29)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자료들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역대기에 언급된 자료들; 아래 참조)
Although some scholars have concluded that the three sources specifically cited in 1,2 Kings are to be viewed as official court annals from the royal archives in Jerusalem and Samaria, this is by no means certain. It seems at least questionable whether official court annals would have included details of conspiracies such as those referred to in 16:20; 2Ki 15:15. It is also questionable whether official court annals would have been readily accessible for public scrutiny, as the author clearly implies in his references to them. Such considerations have led some scholars to conclude that these sources were probably records of the reigns of the kings of Israel and Judah compiled by the succession of Israel's prophets spanning the kingdom period.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상하에 구체적으로 인용된 세 자료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있는 왕실기록 보관소에서 나온 공적인 왕실 연대기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것은 확실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공적인 왕실 연대기(16:20)나 열왕기하(15:15)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음모의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가 분명히 출처를 이야기 하면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왕실 연대기가 공적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였을 가능성도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 사항들을 고려한 결과 학자들은 이런 자료들은 왕정 시대에 활동하던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연속적으로 기록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통치 기록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데 도달하였습니다.
1,2 Chronicles makes reference to a number of such writings: "the records of Samuel the seer, the records of Nathan the prophet and the records of Gad the seer" (1Ch 29:29), "the prophecy of Ahijah the Shilonite" and "the visions of Iddo the seer" (2Ch 9:29), "the records of Shemaiah the prophet" (2Ch 12:15), "the annals of Jehu son of Hanani" (2Ch 20:34), "the annotations on the book of the kings" (2Ch 24:27), the "events of Uzziah's reign . . . recorded by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2Ch 26:22; see also 2Ch 32:32) -- and there may have been others. It is most likely, for example, that for the ministries of Elijah and Elisha the author depended on a prophetic source (perhaps from the eighth century) that had drawn up an account of those two prophets in which they were already compared with Moses and Joshua.
역대상하는 "선견자 사무엘의 기록과 선지자 나단의 기록과 선견자 갓의 기록"(대상 29:29),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서"와 같은 여러 기록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선견자 잇도의 묵시록"(대하 9:29), "스마야 예언자의 역사책"(대하 12:15),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역사책"(대하 20:34), "열왕기 주석"(대하 24:27), "웃시야의 통치에 관한 일들...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한 일"(대하 26:22; 또한 대하 32:32 참조),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럿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 두 선지자를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와 비교한 기록을 가지고 만들어 낸 선지자적 자료(아마도 8세기경)에 근거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번역성경) (대상29:29) 다윗 왕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견자 사무엘의 기록과 선지자 나단의 기록과 선견자 갓의 기록에 다 올라 있는데, (대하9:29) 솔로몬의 나머지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단 예언자의 역사책'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서'와 '잇도 선견자의 묵시록',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어 있다. (대하12:15) 르호보암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마야 예언자의 역사책'과 '잇도 선견자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은 사는 날 동안, 그들은 늘 싸웠다. (대하 20:34) 여호사밧의 나머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역사책'에 다 기록되었고, 그것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올랐다. (대하 24:27) 요아스의 아들들의 이야기와, 요아스가 중대한 경책을 받은 것과, 하나님의 성전을 보수한 사적은, 모두 '열왕기 주석'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대하 26:22) 웃시야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다른 사건들은, 초기의 것에서부터 후대의 것에 이르기까지,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하여 두었다. (대하32:32) 히스기야 통치 때에 있었던 그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주님께 헌신한 일은,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의 묵시록'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
Some scholars place the date of composition of 1,2 Kings in the time subsequent to Jehoiachin's release from prison (562 b.c.; 2Ki 25:27-30) and prior to the end of the Babylonian exile in 538. This position is challenged by others on the basis of statements in 1,2 Kings that speak of certain things in the preexilic period that are said to have continued in existence "to this day" (see, e.g., 8:8, the poles used to carry the ark; 9:20-21, conscripted labor; 12:19, Israel in rebellion against the house of David; 2Ki 8:22, Edom in rebellion against the kingdom of Judah).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상하의 저작 연대를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주전 562년; 왕하 25:27-30)와 538년 바빌로니아 유배가 끝나기 이전으로 본다. 이 입장은 "오늘날까지"존재하고 있다고 말한 열왕기상하의 왕들의 진술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전 받고 있습니다 (다음 예시 참조, 8:8, 방주를 운반하는 데 사용되는 채; 9 20-21, 강제 노역, 12:19,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에 반역함, 왕하 8:22, 에돔이 유다 왕국에 반역함).
(새번역성경) (열왕기하25:27-30) 유다의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간 지 서른일곱 해가 되는 해 곧 바빌로니아의 11)에윌므로닥 왕이 왕위에 오른 그 해 12)열두째 달 이십칠일에, 에윌므로닥 왕은 유다의 왕 여호야긴 왕에게 특사를 베풀어, 그를 옥에서 석방하였다. 그는 여호야긴에게 친절하게 대접하여 주면서, 그와 함께 있는 바빌로니아의 다른 왕들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여호야긴에게 주었다. 그래서 여호야긴은 죄수복을 벗고, 남은 생애 동안 늘 왕과 한 상에서 먹었다. 왕은 그에게 평생 동안 계속해서 매일 일정하게 생계비를 대주었다. (열왕기상8:8) 궤에서 삐죽 나온 두 개의 채는 길어서, 그 끝이 지성소의 정면에 있는 성소에서도 보였다. 그러나 성소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채는 오늘날까지 그 곳에 그대로 놓여 있다.) (열왕기상9:20-21)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가운데서 살아 남은 백성이 있었다. 솔로몬은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 강제 노역에 동원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 진멸할 수 없어서 그 땅에 그대로 남겨 둔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노예로 남아 있다. (열왕기상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에 반역하여서, 오늘에 이르렀다. (열왕기하8:22) 이와 같이 에돔은 유다에 반역하여 그 지배를 벗어나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그 때에 립나 역시 반역을 일으켰다. |
("오늘날까지"와 관련된 참고사항) 법궤를 운반하는 채가 오늘까지 있다는 언급(8:8), 강제노동이 오늘까지(9:20-21), 다윗의 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이 오늘까지(12:19), 유다 왕국에 대한 에돔의 반역이 오늘까지 이르렀다는 언급(왕하8:22) |
From such statements it is argued that the writer must have been a person living in Judah in the preexilic period rather than in Babylon in postexilic times. If this argument is accepted, one must conclude that the original book was composed about the time of the death of Josiah and that the material pertaining to the time subsequent to his reign was added during the exile c. 550. While this "two-edition" viewpoint is possible, it rests largely on the "to this day" statements.
이러한 언급을 보면 저자는 유배 이후의 바빌론보다는 유배 이전의 시기에 유다에 살았던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원래 열왕기는 요시야가 죽은 시기에 대해 쓰여졌고, 그의 통치 이후의 시기와 관련된 자료는 망명 기간인 550년경에 추가되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이 "두 판(원판, 증보판)" 관점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주로 "오늘날까지"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An alternative is to understand these statements as those of the original source used by the author rather than statements of the author himself. A comparison of 2Ch 5:9 with 1Ki 8:8 suggests that this is a legitimate conclusion. Chronicles is clearly a postexilic writing, yet the wording of the statement concerning the poles used to carry the ark ("they are still there today") is the same in Chronicles as it is in Kings. Probably the Chronicler was simply quoting his source, namely, 1Ki 8:8. There is no reason that the author of 1,2 Kings could not have done the same thing in quoting from his earlier sources. This explanation allows for positing a single author living in exile and using the source materials at his disposal.
대안은 이러한 언급들(오늘날까지)을 열왕기 저자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사용한 원본 자료들에서 나오는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역대하(5 : 9)와 열왕기상(8 : 8)을 비교하면 이것이 합리적인 결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기는 분명히
바빌론의 유배 이후의 글이지만, 법궤를 운반하는 데 사용 된 채에 관한 언급 (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은 역대기나 열왕기나 동일합니다. 아마도 역대기 저자가 단순히 자료, 즉 열왕기상(8 : 8)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상하의 저자도 이전 자료를 인용하면서 동일하게 할 수 없었다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유배기에 살았던 단일 저자가 열왕기 전체를 기록하었고 그의 손에 있었던 자료들을 사용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Theme: Kingship and Covenant
1,2 Kings contains no explicit statement of purpose or theme. Reflection on its content, however, reveals that the author has selected and arranged his material in a manner that provides a sequel to the history found in 1,2 Samuel -- a history of kingship regulated by covenant. In general, 1,2 Kings describes the history of the kings of Israel and Judah in the light of God's covenants. The guiding thesis of the book is that the welfare of Israel and her kings depended on their submission to and reliance on Israel's covenant God -- their obedience to the Sinaitic covenant regulations and their faithful response to God's prophets.
주제: 왕권과 언약
열왕기상하에는 목적이나 주제에 대한 명시적인 진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가 사무엘상하에 나오는 역사, 즉 언약에 의해 규정된 왕권의 역사에 대한 속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료를 선택하고 정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왕기상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비추어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역사를 그리고있습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이스라엘과 그 왕들의 안녕과 복지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신뢰 즉 시내산 언약규정에 대한 복종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에 대한 신실한 응답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It is clearly not the author's intention to present a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of Israel's monarchy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s of modern historiography. The author repeatedly refers the reader to other sources for more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reigns of the various kings (see, e.g., 11:41; 14:19,29; 15:7,31; 16:5,14,20,27), and he gives a covenantal rather than a social or political or economic assessment of their reigns. From the standpoint of a political historian, Omri would be considered one of the more important rulers in the northern kingdom. He established a powerful dynasty and made Samaria the capital city. According to the Moabite Stone, Omri was the ruler who subjugated the Moabites to the northern kingdom. Long after Omri's death, Assyrian rulers referred to Jehu as the "son of Omri" (either mistakenly or merely in accordance with their literary conventions when speaking of a later king of a realm). Yet in spite of Omri's political importance, his reign is dismissed in six verses (16:23-28) with the statement that he "did evil in the eyes of the Lord and sinned more than all those before him" (16:25). Similarly, the reign of Jeroboam II, who presided over the northern kingdom during the time of its greatest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is treated only briefly (2Ki 14:23-29).
현대 역사 기술의 원칙에 따라 이스라엘 군주제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역사를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저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저자는 여러 왕들의 통치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독자들에게 여러 자료를 반복해서 언급합니다(예를 들어, 11:41; 14:19,29; 15:7,31; 16:5,14,20,27 참조). ), 그리고 그는 그들의 통치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평가보다는 언약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정치 역사가의 관점에서 보면 오므리는 북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는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모아브비석에 따르면 오므리는 모압족속을 북쪽 왕국에 복종시킨 통치자였습니다. 오므리가 죽은 지 오랜 후,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습니다(오해해서 그랬는지 또는 그 왕국의 후대 왕에 대해 말할 때 단지 그들의 문학적 관습에 따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므리의 정치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여섯 구절(16:23-28)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었다"(16:25)는 진술과 함께 요약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시기에 북왕국을 다스렸던 여로보암 2세의 통치도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습니다(왕하 14:23-29).
Moab·ite Stone a monument erected by Mesha, king of Moab, in c. 850 bc which describes (in an early form of the Hebrew language) the campaign between Moab and ancient Israel (2 Kings 3), and bears an early example of an inscription in the Phoenician alphabet. It is now in the Louvre in Paris. 모아브 비석 모압 왕 메사가 기원전 850년경에 초기 히브리어로 모압과 고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열왕기하 3장)을 설명하고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된 비문의 초기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습니다. *** 모아브 비석: Moab왕 Mesha가 이스라엘인에게서 거둔 승리를 적은 기념비. |
Another example of the writer's covenantal rather than merely political or economic interest can be seen in the description of the reign of Josiah of Judah. Nothing is said about the early years of his reign, but a detailed description is given of the reformation and renewal of the covenant that he promoted in his 18th year as king (2Ki 22:3 -- 23:28). Nor is anything said of the motives leading Josiah to oppose Pharaoh Neco of Egypt at Megiddo, or of the major shift in geopolitical power from Assyria to Babylon that was connected with this incident (see notes on 2Ki 23:29-30).
단순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관심이 아닌 필자의 언약적 관심에 대한 또 다른 예는 유다의 요시야 통치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 초기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으나, 그가 왕으로 재위 18년에 추진한 언약의 개혁과 갱신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왕하 22:3-23:28).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느고 군대를 막아선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된 거대한 권력이동, 즉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의 지정학적 권력 이동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왕하 23:29-30 참조).
(새번역성경) (왕하23:29-30)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 요시야 왕이 그를 맞아 싸우려고 므깃도로 올라갔으나, 바로 느고에게 죽고 말았다. 요시야의 신하들은 죽은 왕을 병거에 실어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 그의 무덤에 안장하였다.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였다. |
It becomes apparent, then, that the kings who receive the most attention in 1,2 Kings are those during whose reigns there was either notable deviation from or affirmation of the covenant (or significant interaction between a king and God's prophet; see below). Ahab son of Omri is an example of the former (16:29 -- 22:39). His reign is given extensive treatment, not so much because of its extraordinary political importance, but because of the serious threat to covenant fidelity and continuity that arose in the northern kingdom during his reign. Ultimately the pagan influence of Ahab's wife Jezebel through Ahab's daughter Athaliah (whether she was Jezebel's daughter is unknown) nearly led to the extermination of the house of David in Judah (see 2Ki 11:1-3).
그렇다면 열왕기상하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왕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언약에서 주목할 만한 일탈이나 언약에 신실한 왕들이라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또는 왕과 하나님의 선지자 사이의 중요한 상호 작용, 아래 참조).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전자의 예입니다(16:29-22:39). 그의 통치는 특별한 정치적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왕국에서 일어난 언약의 충실성과 연속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 때문에 광범위하고 길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믿었던 이방종교의 영향이 아합의 딸 아달랴(그녀가 이세벨의 딸인지는 알 수 없음)를 통해 내려오면서 유다의 다윗 가문이 거의 멸절의 지경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 11:1-3 참조).
Manasseh (2Ki 21:1-18) is an example of a similar sort. Here again it is deviation from the covenant that is emphasized in the account of his reign rather than political features, such as involvement in the Assyrian-Egyptian conflict (mentioned in Assyrian records but not in 2 Kings). The extreme apostasy characterizing Manasseh's reign made exile for Judah inevitable (2Ki 21:10-15; 23:26-27).
므낫세(왕하 21:1-18)도 이와 비슷한 유형의 왑입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통치 기록에서 강조되는 것은 앗수르-애굽 분쟁(앗수르 기록에는 언급되지만 열왕기 하에는 언급되지 않음)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언약으로부터의 이탈이 그의 기사 가운데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므낫세의 통치를 특징짓는 극단적 배교(背敎)는 끝내유다로 하여금 포로 생활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왕하 21:10-15; 23:26-27).
* 배교(背敎) 하다 : 믿던 종교를 배반하다. 다른 종교로 바꾸거나 무종교인이 되는 일을 이른다.
On the positive side, Hezekiah (2Ki 18:1 -- 20:21) and Josiah (2Ki 22:1 -- 23:29) are given extensive treatment because of their involvement in covenant renewal. These are the only two kings given unqualified approval by the writer for their loyalty to the Lord (2Ki 18:3; 22:2). It is noteworthy that all the kings of the northern kingdom are said to have done evil in the eyes of the Lord and walked in the ways of Jeroboam, who caused Israel to sin (see, e.g., 16:26,31; 22:52; 2Ki 3:3; 10:29). It was Jeroboam who established the golden calf worship at Bethel and Dan shortly after the division of the kingdom (see 12:26-33; 13:1-6).
긍정적인 면에서는 히스기야(왕하 18:1 - 20:21)와 요시야(왕하 22:1 - 23:29)가 언약 갱신에 관여한 왕이기 때문에 길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왕은 주님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왕입니다(왕하 18:3; 22:2). 주목할 점은 북왕국의 모든 왕들이 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예: 16:26, 31; 22:52; 2기 3:3; 10:29 참조). 왕국이 분열된 직후 베델과 단에 황금 송아지 예배를 시작한 왕이 바로 여로보암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2:26-33; 13:1-6 참조).
While the writer depicts Israel's obedience or disobedience to the Sinai covenant as decisive for her historical destiny, he also recognizes the far-reaching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Davidic covenant, which promised that David's dynasty would endure forever. This is particularly noticeable in references to the "lamp" that the Lord had promised David (see 11:36 and note; 15:4; 2Ki 8:19; see also note on 2Sa 21:17). It also appears in more general references to the promise to David (8:20,25) and its consequences for specific historical developments in Judah's later history (11:12-13,32; 2Ki 19:34; 20:6). In addition, the writer uses the life and reign of David as a standard by which the lives of later kings are measured (see, e.g., 9:4; 11:4,6, 33,38; 14:8; 15:3,5,11; 2Ki 16:2; 18:3; 22:2).
열왕기 기자는 시내산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가 이스라엘의 역사적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묘사하는 한편, 다윗 왕조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약속한 다윗 언약의 광범위한 역사적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등불"에 대해 열왕기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11:36; 15:4; 왕하 8:19; 삼하 21:17). 그것은 또한 다윗에게 행한 약속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인 언급들(8:20,25)이나, 유다의 후기 역사 안에 나타난 구체적인 역사적 발전에 대한 영향들에 대해 언급할(11:12-13,32; 왕하 19:34; 20:6) 때도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다윗의 생애와 통치를 후대 왕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합니다(9:4; 11:4,6, 33,38; 14:8; 15:3,5,11; 왕하 16:2; 18:3; 22:2 참조).
the "lamp" that the Lord had promised David Symbolically, it reminded the Israelites that God was their true Light. King David declared, “You are my lamp, O LORD; the LORD shall enlighten my darkness” (2 Sam. 22:29). The menorah’s light symbolizes the Messiah’s purpose: to be “the light of the world” (Jn. 8:12; 9:5).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등불" 상징적으로 lamp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참 빛이심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다윗 왕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이다. 여호와께서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촛대의 빛은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 9:5)이 되시려는 메시아의 목적을 상징합니다. |
Another prominent feature of the narratives of 1,2 Kings is the emphasi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prophecy and fulfillment in the historical developments of the monarchy. On at least 11 occasions a prophecy is recorded that is later said to have been fulfilled (see, e.g., 2Sa 7:13 and 1Ki 8:20; 1Ki 11:29-39 and 1Ki 12:15; 1Ki 13 and 2Ki 23:16-18). The result of this emphasis is that the history of the kingdom is not presented as a chain of chance occurrences or the mere interplay of human actions but as the unfolding of Israel's historical destiny under the guidance of an omniscient and omnipotent God -- Israel's covenant Lord, who rules all history in accordance with his sovereign purposes (see 8:56; 2Ki 10:10).
열왕기상하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군주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예언과 성취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예언이 적어도 11번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 7:13, 왕상 8:20; 왕상 11:29-39, 왕상 12:15; 왕상 13장 , 왕하 23: 16-18). 이러한 강조의 결과 왕국의 역사가 일련의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나 인간 행동의 단순한 상호 작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언약의 주님의 인도 아래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체성의 발현으로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주권적 목적에 따라 모든 역사를 다스리십니다(참조 8:56; 왕하 10:10).
The author also stresses the importance of the prophets themselves in their role as official emissaries from the court of Israel's covenant Lord, the Great King to whom Israel and her king were bound in service through the covenant. The Lord sent a long succession of such prophets to call king and people back to covenant loyalty (2Ki 17:13). For the most part their warnings and exhortations fell on deaf ears. Many of these prophets are mentioned in the narratives of 1,2 Kings (see, e.g., Ahijah, 11:29-40; 14:5-18; Shemaiah, 12:22-24; Micaiah, 22:8-28; Jonah, 2Ki 14:25; Isaiah, 2Ki 19:1-7,20-34; Huldah, 2Ki 22:14-20), but particular attention is given to the ministries of Elijah and Elisha (1Ki 17-19; 2Ki 1-13).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주의 궁정에서 파송된 공적인 사신으로 선지자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왕은 언약을 통해 대왕이신 여호와 한 분만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왕과 백성을 다시 언약에 충성할 것을 요청하시기 위해 그러한 선지자들을 장기간 연속으로 보내셨습니다(왕하 17:13).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경고와 훈계는 무시되었습니다. 이 선지자들 중 다수가 열왕기상하의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예를 들어, 아히야, 11:29-40; 14:5-18; 스마야, 12:22-24; 미가야, 22:8-28; 요나, 왕하 14:25; 이사야, 왕하 19:1-7,20-34; 훌다, 왕하 22:14-20, 그러나 무엇보다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왕상17-19, 왕하1-13).
Reflection on these features of 1,2 Kings suggests that it was written to explain to a people in exile that the reason for their condition of humiliation was their stubborn persistence in breaking the covenant. In bringing the exile upon his people, God, after much patience, imposed the curses of the covenant, which had stood as a warning to them from the beginning (see Lev 26:27-45; Dt 28:64-68). This is made explicit with respect to the captivity of the northern kingdom in 2Ki 17:7-23; 18:9-12, and with respect to the southern kingdom in 2Ki 21:12-15. The reformation under Josiah in the southern kingdom is viewed as too little, too late (see 2Ki 23:26-27; 24:3).
열왕기상하의 이러한 특징들을 고찰해보면 그들이 굴욕의 상태에 처하에 된 이유가 언약을 깨뜨리려는 그들의 완강한 고집 때문임을 포로된 백성에게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오랜 인내 끝에 백성들을 포로로 보내심으로써 언약의 저주를 퍼무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경고하신 것이었습니다(레 26:27-45; 신 28:64-68 참조). 이런 사실은 북왕국의 포로 됨과 관련해서는 열왕기하 17:7-23; 18:9-12, 그리고 남왕국의 포로됨과 관련해서는 열왕기하 21:12-15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남왕국에서 요시야 치하의 개혁은 너무 미약하고 너무 늦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왕하 23:26-27; 24:3 참조).
The book, then, provides a retrospective analysis of Israel's history. It explains the reasons both for the destruction of Samaria and Jerusalem and their respective kingdoms and for the bitter experience of being forced into exile.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there is no hope for the future. The writer consistently keeps the promise to David in view as a basis on which Israel in exile may look to the future with hope rather than with despair. In this connection the final four verses of the book, reporting Jehoiachin's release from prison in Babylon and his elevation to a place of honor in the court there (2Ki 25:27-30), take on added significance. The future remains open for a new work of the Lord in faithfulness to his promise to the house of David.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분석한 회고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그리고 각 왕국들이 파괴된 이유와 강제로 추방당한 쓰라린 경험을 당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다윗과의 약속을 망명 중인 이스라엘이 절망보다는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근거로 일관되게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야긴이 바빌론의 감옥에서 풀려나 그곳의 궁정에서 명예로운 자리에 올랐다고 보고하는 책의 마지막 네 구절(2Ki 25:27-30)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다윗의 집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며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미래가 열려 있습니다.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although the author was undoubtedly a Judahite exile, and although the northern kingdom had been dispersed for well over a century and a half at the time of his writing, the scope of his concern was all Israel -- the whole covenant people. Neither he nor the prophets (see Isa 10:20-21; 11:11-13; Jer 31; Eze 48:1-29; Hos 11:8-11; Am 9:11-15; Zec 9:10-13) viewed the division of the Israelite kingdom as a divine rejection of the ten tribes, nor did they see the earlier exile of the northern kingdom as a final exclusion of the northern tribes from Israel's future. As a matter of fact, many from the north had fled south during the Assyrian invasions so that a significant remnant of the northern tribes lived on in the kingdom of Judah and shared in its continuing history.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유다인 망명자 였고 북왕국은 그 글을 쓸 당시 한 세기 반 동안 흩어져 있었지만 그의 관심의 범위는 모든 이스라엘 - 전체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도 선지자도(이사야 10:20-21; 11:11-13; 예레미야 31; 에스겔 48:1-29; 호세아 11:8-11; 아모스 9:11-15; 스가랴9:10-13 참조)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열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버리심으로 보지 않았고, 또한 북왕국이 먼저 포로 된 것을 북방지파를 끝내 버리셔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도 해석하지 않았다. 사실,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아시리아 침략 기간 동안 남쪽으로 피신하여 상당수의 남은 자들이 유다 왕국 안에 살면서 유다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Chronology
1,2 Kings presents the reader with abundant chronological data. Not only is the length of the reign of each king given, but during the period of the divided kingdom the beginning of the reign of each king is synchronized with the regnal year of the ruling king in the opposite kingdom. Often additional data, such as the age of the ruler at the time of his accession, are also provided.
연대기
열왕기상하는 독자들에게 풍부한 연대기 자료를 제시합니다. 각 왕의 재위 기간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분열 왕국 기간 동안 각 왕의 재위 시작은 상대 왕국의 통치하는 왕의 재위 연대와 연동되고 있니다. 종종 그의 즉위 당시 통치자의 나이와 같은 추가 데이터도 제공됩니다.
By integrating Biblical data with those derived from Assyrian chronological records, the year 853 b.c. can be fixed as the year of Ahab's death and 841 as the year Jehu began to reign. The years in which Ahab and Jehu had contacts with Shalmaneser III of Assyria can also be given definite dates (by means of astronomical calculations based on an Assyrian reference to a solar eclipse). With these fixed points, it is then possible to work both forward and backward in the lines of the kings of Israel and Judah to give dates for each king. By the same means it can be determined that the division of the kingdom occurred in 930, that Samaria fell to the Assyrians in 722-721 and that Jerusalem fell to the Babylonians in 586.
성경자료를 아시리아 연대기 기록에서 나온 데이터와 통합시켜 보면 아합 왕이 죽은 연도는 주전 853년이고 예후 왕이 통치하기 시작한 해는 841년으로 확정할 수 있다. 아합과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와 접촉한 연도도 (아시리아의 일식에 대한 언급에 기초한 천문학적 계산을 통해) 꽤 정확하게 그 연도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정된 연대들을 확보해 놓으면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을 계보를 따라 앞뒤로 이동하면서 각 왕의 연대들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왕국의 분열이 930년에 발생했고, 사마리아가 722-721년에 앗수르에게 함락되었으며, 예루살렘이 586년에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The synchronistic data correlating the reigns of the kings of Israel and Judah present some knotty problems, which have long been considered nearly insoluble. In more recent times, most of these problems have been resolved in a satisfactory way through recognizing such possibilities as overlapping reigns, coregencies of sons with their fathers, differences in the time of the year in which the reign of a king officially began, and differences in the way a king's first year was reckoned (e.g., see notes on 15:33; 2Ki 8:25; see also chart, pp. 670-671.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통치를 연관시키는 상호 연동 자료는 일부 복잡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따라서 오랜동안 거의 풀기 어려운 문제로 간주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통치기간의 중첩,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정치, 공식적으로 왕의 통치가 시작된 연도 시작점의 차이, 왕의 통치 첫해를 계산하는 방식의 차이 등을 알 수 있게 되면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해결되었습니다(예를 들어, 15:33; 왕하 8:25에 대한 설명 참조; 또한 670-671면 도표 참조)
Content
1,2 Kings narrates the history of Israel during the period of the monarchy from the closing days of David's rule until the time of the Babylonian exile. After an extensive account of Solomon's reign, the narrative relates the division of the kingdom and then presents an interrelated account of developments within the two kingdoms. In this account,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the ministries of Elijah and Elisha in the northern kingdom, with almost a third of the book (nearly equal to the amount of narrative given to Solomon's reign) devoted to God's efforts through his prophets to turn that kingdom away from its apostasies back to covenant faithfulness (see note on 1Ki 12:25 -- 2Ki 17:41).
내용
열왕기상하는 다윗 통치 말기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왕정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이 끝난 후, 열왕기는 왕국의 분열에 대해 언급하면서 두 왕국 사이의 발전과정을 상호 연관시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는 북왕국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열왕기 전체의 거의 3분의 1(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의 양과 거의 동일)을 선지자들을 통해 북방왕국이 배도에서 벗어나 언약에의 신실함으로 돌아올 것을 권면하는 내용에 할애하고 있습니다(왕상 12:25 -- 왕하 17:41 주석 참조).
Kingship in the northern kingdom was plagued with instability and violence. Twenty rulers represented nine different dynasties during the approximately 210 years from the division of the kingdom in 930 b.c. to the fall of Samaria in 722-721. In the southern kingdom there were also 20 rulers, but these were all descendants of David (except Athaliah, whose usurping of the throne interrupted the sequence for a few years) and spanned a period of about 345 years from the division of the kingdom until the fall of Jerusalem in 586.
북왕국의 왕권은 불안정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주전 930년 왕국의 분열로부터 주전 722-721년의 사마리아 멸망에 이르는 약 210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왕조가 바뀌면서 20 명의 왕이 통치하는 격동기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남왕국에는 20 명의 왕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아달랴는 왕좌를 빼앗아 몇 년 동안 다윗 왕조의 계승을 중단시킨 기간 제외). 왕국의 분열에서부터 586 년에 예루살렘이 멸망 할 때까지 약 345 년의 기간을 보냈습니다.
From the NIV Study Bible, Introductions to the Books of the Bible, 2 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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