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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록 무진년(1748, 영조24) 〔南遊錄 戊辰〕
팔공산八公山은 웅장히 영남 지역의 강기綱紀가 되며 기괴하고 절묘한 볼거리가 많다. 동쪽의 한 갈래 길을 가다 서쪽으로 돌아 수십 리를 가면 대암(臺巖)이고 또 그 아래가 칠계(漆溪)라는 마을인데 바로 최군 여호(崔君汝浩)의 집이 있는 곳이다. 내가 한번 유람하고 싶었는데 일찍이 그러지 못했다.
금년 봄에 마침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여호汝浩를 방문하기 위해 능성綾城을 넘어 칠현漆峴에서 내려갔다. 골짜기는 깊고 기암괴석이 많았으며 졸졸 흐르는 시내에 상수리나무가 우거졌는데, 인가는 10여 호에 불과하였다. 여호와 그의 동생인 진숙(進叔), 입부(立夫)가 날마다 한가로이 지내며 효성스럽게 부모를 모시고 예를 갖춰 제사를 지내니 집안의 분위기가 엄숙하였다. 내가 온 것을 보고는 의관을 갖춰 입고서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었으며, 또 나를 붙잡아 며칠 머물게 하였다. 고금의 일을 말하면서 간혹 명리(名理)를 분석하였는데 모두 경외스러울 정도로 정밀하였으며, 간간이 내가 의견을 내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으니 또한 수용하는 도량도 있었다.
여호가 말하기를 “조군 중길(曺君仲吉)이 나와는 막역한 사이인데 그 또한 그대를 흠모하고 있으며, 또 이전에 팔공산을 함께 가자던 약속이 있으니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편지로 그를 불렀다. 조공이 말이 없어 소를 타고 왔다. 날이 이미 저문 뒤에는 세찬 바람에 매우 추웠는데, 등불을 밝히며 대화를 하다 보니 잠자리에 미쳐 닭이 세 번 울었다. 조공이 일이 있어 하루를 머물고 돌아가야 했는데 떠날 때에 한마디 말을 청했더니, 조공이 흐뭇한 표정으로 “나는 참으로 이러이러하고자 합니다. 군자는 참으로 의지(意志)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기(氣)를 포악하게 하지 말아야 하니, 반드시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 깊고 두터워야 무거운 임무를 담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군자는 어둠으로써 밝게 하니, 옥산(玉山) 선생이 평소 힘쓴 것은 모두 이것입니다. 퇴계 선생은 직접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탄식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세상에 발을 디뎠는데 사람들은 혹 이 도(道)라는 이름을 그대에게 돌리기도 하니, 이것은 조물주가 꺼리는 바입니다. 어찌 스스로 살피면서 날마다 힘쓰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일어나 절하고서 말하기를 “두 마디 말씀은 참으로 약이 될 것이니, 말씀의 뜻을 감히 밤낮으로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조공이 또 나에게 한마디 말을 청하기에 바로 대답하기를 “가만히 공의 학식을 살펴보니 이미 폭넓게 갖추셨습니다. 정상의 위치에서 한 걸음 더 진보하여 혹 요약의 경지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공이 한참 만에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내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공과 이별한 뒤에 여호와 함께 짐을 꾸려 부인사(夫仁寺)로 향했는데, 그의 아들 주진 공보(周鎭公普)가 우리를 따랐다. 해 질 녘에 종지촌(宗智村)에 묵고 다음 날 부인사로 올라갔다. 산세가 웅장하고 시야가 탁 트였다. 두루 유람을 마치고 승방(僧房)에 투숙하였다. 밤에 《심경(心經)》의 몇 장(章)을 강론하다 기질의 편벽한 점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저는 공부를 하며 늘 강구하고 탐색하는 것이 많지만 일상의 행동에서 왕왕 전혀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를 가만히 살펴보면 오로지 근본에 마음을 써서 진실되이 의거할 곳이 있지만, 행하면서 밝게 알고 익히면서 잘 살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여호가 말하기를 “이 말이 실로 합당하니,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음 날 출발하려 할 때에 여호가 말하기를 “본래 사관(寺觀)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기회는 평소 없던 것이니, 기록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나에게 법당의 서쪽 문미(門楣)에 이름을 쓰라고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골짜기를 나오는데 덕기(德基)라는 승려가 앞장을 섰다. 인동(仁洞)의 강사(講舍)에서 잠시 쉬었는데, 건물을 새로 지었고 콸콸 흐르는 냇물이 섬돌을 감돌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순박하여 꾸미거나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호가 때때로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를 불러 효공(孝恭)과 충신(忠信)의 도를 말해 주고 백성들은 한결같이 최공의 말을 따르니, 온 동네의 풍속이 모두 순후하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니 폭포 하나가 바위 사이에서 쏟아지는데 한 길쯤 되는 높이에 물은 맑고 얕아 마음에 들었으며, 좌우로 큰 바위가 휑하니 마주 보며 치솟았는데 정자를 지어 굽어보면 좋을 듯하였다. 또 그 수백 보 아래에서 동쪽으로 꺾인 곳에 농연(聾淵)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양쪽으로 큰 바위가 옆으로 누워 있어 대나무 안석 같았다. 길이가 예닐곱 자 정도에 물이 그 안으로 쏟아지는데 깊이도 그만큼 되었다. 서녘의 산기슭은 초목이 울창하고 벽면은 모두 분칠한 듯이 희어 골짜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호의 선조인 대암공(臺巖公)이 일찍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 그 터가 남아 있고, 여호가 다시 지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또 남쪽으로 꺾인 곳에 고연(鼓淵)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한 길 남짓 폭포가 쏟아졌다. 산골짜기는 깊고 조용하며 큰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그 위에 작은 집을 지을 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곳은 부인동(夫仁洞)이고 물은 종지촌(宗智村)에서부터 흘러나오니, 훗날 집이 완성되면 이름을 ‘인지(仁智)’라고 짓고서 산수의 즐거움을 붙여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여호가 “네.”라고 답하였다.
이어 동화사(桐華寺)로 향했는데 골짜기가 깊고 흰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맑은 시냇물 소리 굽이굽이 들려왔고 서로 둘러보며 즐겼다. 몇 리를 들어가니 소년대(少年臺)라는 곳이 있었다. 큰 바위가 시냇가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반쯤 시든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기대앉아 막걸리 몇 잔 기울이고 있자니 초윤(楚玧)이라는 승려가 와서 맞이하였다. 서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중천까지 깎아질러 서 있어 골짜기에 화표(華表)를 세워 놓은 듯하였다. 시냇가를 천천히 배회하니, 승려의 말이 봄이 아직 일러 안타깝게도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하였다. 천천히 몇 리를 가니, 물소리와 산 빛이 갖갖으로 빼어나 참으로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봉황문(鳳凰門)으로 들어가서 종루(鐘樓)에 올라 잠시 쉬는데 웅장한 암벽이 뒤에 병풍처럼 둘리어 있었다.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우뚝 솟은 것이 마치 인장을 올려놓는 궤안 같았다. 산세가 모여들어 주위를 감도니, 세상 사람들이 동화사가 팔공산의 으뜸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약사전(藥師殿)에서 묵고, 다음 날 염불암(念佛庵)에 올랐다.
여호는 병이 나 걸을 수가 없어 나만 공보와 함께 갔다. 암벽을 기어 조금 오르니 염불암이 팔공산 꼭대기에 있었고 그 안에는 입정(入定)하고 있는 승려 몇이 있었다. 암자 뒤에는 큰 바위가 똑바로 서 있는데 호사가가 몇 길 높이의 미타상(彌陀像)을 새겨 놓았다. 또 그 뒤에 일인석(一人石)이라고도 부르는 왕좌석(王坐石)이 있는데, 승려의 말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골짜기 밖 10리에 신 장절(申壯節)이 절의를 다하여 죽은 곳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그 위 백 보쯤 되는 곳에 십수 명에게 그늘을 드리울 정도 크기의 석엄(石广)이 있는데,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이곳에서 입정(入定)하였다. 석면(石面)에 새겨진 ‘눌암(訥菴)’이라는 두 글자는 지금도 알아볼 수가 있다. 그 후로 선승(禪僧)들이 종종 와서 머물지만 대체로 오래 있지는 못한다. 꼭대기에 광석대(廣石臺)가 있는데 힘이 다하여 오를 수가 없었다. 공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가 승경을 찾아 깊이 들어왔다가 험준한 곳에 이르러 곧 쉬고 있으니, 또한 도리어 학문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바위에 이름을 남기고 양진암(養眞庵)으로 내려가니, 여호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천천히 내원암(內院庵)으로 내려갔다. 교승(敎僧)에게 강론을 하도록 하고 들은 뒤에,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모두 여기에 있구나. 우리 유가는 어디에서 이러한 기상을 얻을까?”라고 하였다. 또 부도암(浮屠庵)을 들렀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이번 여정에 선승 십여 명을 만났는데 탁월하게 도를 깨달은 자는 보지 못하였지만, 우리 도(道)의 사람들이 그들을 경시할 수야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은 그래도 면벽하여 손으로 염주를 돌리고 있으니 학문에 종사하면서 아직 지극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 유가는 바야흐로 명리(名利)를 좇아 돌아올 줄을 모르니 또 부끄러울 만하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조금 내리고 운무로 어두웠는데 삼나무와 회나무 사이에서 메아리치며 멀리 수풀 속에서 물레방아 소리가 들리니, 또 하나의 멋진 장면이었다.
내가 멀리 나와 있어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싶어 돌아가려고 하니, 여호가 마을 어귀까지 나와 한참을 서서 전별해 주었다. 전날에는 산수를 유람하였는데 혼자 가는 길이라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었다. 중간에 들르고 싶은 벗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마을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풀 수는 없었다. 이번 여정에서 여호 부자의 안내로 팔공산의 승경을 두루 가 보았는데,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본 것들은 거의 평소 접할 수 없던 것이었다. 다만 조공, 진숙, 입부가 함께 가지 못하였고, 은해사(銀海寺)의 승경도 둘러보려 했으나 실제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다 뜻대로 되기는 어려우니, 훗날로 남겨 두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헤어질 때에 여호가 승경에 대해 한마디 기록할 것을 청하였기에 결국 이 글을 쓰고 돌아가는 것이다. 또 이 글을 조공, 진숙, 입부에게 전하여 이어 와유(臥遊)를 이루도록 하였고, 나의 아우 휴문(休文)도 이러한 것을 무척 좋아하니 돌아가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무진년(1748, 영조24) 정월 소진일(小盡日)에 이상정 경문(李象靖景文)이 기록하였다.
[주1] 남유록(南遊錄) : 칠계(漆溪)에 은거하고 있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을 방문하여 함께 팔공산(八公山)을 유람했을 때의 기록이다. 《大山先生實紀 卷1 年譜》 최흥원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菴)이다. 학행으로 몇 차례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종사하였다. 대산과는 교유가 깊었으며 문집으로 《백불암집(百弗菴集)》이 있다.
[주2] 진숙(進叔), 입부(立夫) : 진숙은 최흥점(崔興漸)의 자이고, 입부는 최흥건(崔興建)의 자이다.
[주3] 조군 중길(曺君仲吉) : 조선적(曺善迪, 1697~1756)을 가리킨다. 중길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치재(耻齋)이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종사하였으며, 문집으로 《치재집(耻齋集)》이 있다.
[주4] 의지(意志)를 …… 하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의지는 기의 장수이고 기는 몸에 가득 찬 것이니, 의지가 으뜸이고 기가 다음이다. 그러므로 의지를 유지하고도 그 기를 포악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5] 어둠으로써 밝게 하니 : 《주역》 〈명이괘(明夷卦) 상(象)〉에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간 것이 명이이니, 군자가 대중을 대할 때에 어둠으로써 밝게 한다.〔明入地中 明夷 君子以 莅衆用晦而明〕”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6] 옥산(玉山) 선생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가리킨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경주(慶州) 자옥산(紫玉山)에 머물러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옥산 선생이라 부른다.
[주7] 퇴계 …… 탄식하였으니 : 이황이 이언적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선생은 당시에 이미 자신을 깊이 감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생이 도를 터득한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불초한 나도 일찍이 찾아가 직접 만났지만 또한 몽매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도를 깊이 물어 계발을 받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退溪集 卷49 晦齋李先生行狀, 韓國文集叢刊 30輯》
[주8] 주진 공보(周鎭公普) : 주진(周鎭)은 이름이고, 공보(公普)는 그의 자이다. 대산의 문인이기도 하다.
[주9] 행하면서 …… 모르겠습니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행하면서도 밝게 알지 못하고 익히면서도 잘 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행하면서도 그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行之而不著焉 習矣而不察焉 終身由之而不知其道者衆也〕”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주10] 대암공(臺巖公) : 최흥원의 5대조인 최동집(崔東集, 1586~1661)을 가리킨다. 대암은 그의 호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군이었던 효종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갈 때 사부로 임명되었으나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고, 이후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팔공산(八公山)의 농연(聾淵) 가에 은거하여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으로 《대암집(臺巖集)》이 있다. 그의 묘갈명과 재실(齋室)의 비문을 최흥원의 부탁으로 대산이 지었다. 《臺巖集 附錄 家狀》 《大山集 卷44 報本齋記, 卷48 大君師傅臺巖崔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227輯》
[주11] 신 장절(申壯節)이 …… 있으니 : 신 장절은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 ?~927)을 가리킨다. 장절은 그의 시호이다. 태조가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견훤과 맞서 싸우다 전세가 위태로워지자, 신숭겸이 태조를 피신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주12] 삼대(三代)의 …… 있구나 :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절에서 밥을 먹을 때에 서로 겸양하는 모습을 보고는 “삼대의 위의가 모두 여기에 있구나.〔三代威儀盡在是〕”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二程外書 卷12》
[주13] 와유(臥遊) :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직접 가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람기나 그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유람함을 말한다.
[주14] 휴문(休文) : 대산의 동생인 이광정(李光靖)의 자이다.
[주15] 소진일(小盡日) : 30일까지 있는 달이 큰달이고 29일까지 있는 달이 작은달인데, 큰달의 말일을 대진일(大盡日)이라고 하고 작은달의 말일을 소진일이라고 한다.
南遊錄 戊辰
八公之山。鬱然爲嶺之南紀。多瓌詭絶特之觀。東一支西轉數十里爲臺巖。又其下爲漆溪之洞。則崔君汝浩家焉。余欲一往遊其間。蓋夙昔而未諧也。今年春。適因事南下。爲訪汝浩。踰綾城從漆峴而下。澗谷幽深。多奇巖異石。溪流淙淙有聲。橡櫟蒙茂。居人戶僅十數。汝浩與弟進叔立夫。日遊處其中。事親孝。祭祀以禮。閨門之內斬如也。見余至。具冠帶。備客主之禮。且挽以信宿。語出入古今。往往談析名理。皆精密可畏。間有妄論。虛襟聽納。亦其容受有量也。汝浩曰。曹君仲吉。與余交而莫逆也。亦嘗傾嚮於子。且夙有八公之約。不可使不知也。遂招以書。曹公蓋無馬騎牛而至。時日已黑。風急寒甚。挑燈打話。及就寢。雞呼者三焉。曹公有故。留一日告歸。臨別。請一言爲贈。曹公欣然曰。吾固欲云云矣。君子固持志之爲貴。亦無㬥其氣。須養敎深厚。方可扛負重任。又曰。君子用晦而明。玉山先生平日用力盡在此。雖以陶叟親覿而有莫覺之歎。况餘人乎。吾子旣出脚世路而人或以此名見歸。此造物之所忌也。何不自省而日勉焉。象靖起而拜曰。二言者。眞藥石也。敢不敬蚤夜以毋負敎意。曹公又辱索一言則輒對曰。竊覸公之學之識。旣博而該矣。竿頭一步。倘可向約處進取否。曹公良久曰。君言是也。余當毋忘是矣。旣別。與汝浩束裝。向夫仁寺。其子周鎭公普從之。薄暮宿宗智村。翼日上夫仁。山勢雄偉。眼界明豁。旣周覽訖。投宿于僧房。夜論心經數章。仍語及氣質偏處。余曰。區區用工。每於講究探索處多。日用常行。往往全不得力。而竊見左右專用心於根本。所以愨實有據依。但未知於行著習察處何如耳。汝浩曰。此言實當。盍相與勉焉。明日將發。汝浩曰。素不喜留名寺觀。此會平生所未有。不可以無識。要余題名姓法堂之西楣。扶杖出洞門。僧德基者前行。少憇于仁洞講舍。堂宇新成。溪流㶁㶁循除。居民皆樸愚。不喜誇詐。汝浩時時招父老子弟。告以孝恭忠信之道。民一惟崔公之聽。環一洞之內。風俗皆厖如也。循溪而下。得一瀑布掛石罅。高可一丈。水淸淺可愛。左右巨石。谽谺對峙。可亭而俯焉。又其下數百步。東折而爲聾淵。兩旁巨石橫臥。如籠几然。長六七尺。水瀉其中。深亦如之。西畔巖麓悄蒨。面皆粉白。最爲一洞佳處。汝浩之先臺巖公嘗亭其上。今遺址在焉。汝浩蓋有意肯構而未及就也。又南折而爲鼓淵。瀑垂丈餘。巖壑窈深。大石盤陀。上可置小屋。余曰。此夫仁之洞而水自宗智出。異日堂成。命以仁智而寓山水之樂。何如。汝浩曰諾。遂向桐華寺。洞府幽深。白石齒齒。淸溪曲曲有聲。相與顧而樂之。入數里。得所謂少年臺者。巨石臨溪而蹲。有松生其上。枯其一半。蒼古可愛。倚坐良久。傾白酒數酌。釋楚玧者來謁。西望石峯。削立天半。爲洞門華表。溪畔躑躅盤生。僧言春尙早。恨不及花時也。徐行數里。泉聲岳色。種種奇絶。儘非人境也。入鳳凰門。上鐘樓少憇。見巖壁隱隱爲後障。南望石峯。屹立似印几。山勢回合。結構周匝。世傳桐華爲八公第一。有以也。宿藥師殿。明日上念佛庵。汝浩病不耐步。獨與公普偕。攀崖梯藤。分寸而上。庵在公山盡頭。中有入定僧數人。庵後大石人立。好事者刻爲彌陀像。高可數丈。又其後有王坐石。亦名一人。僧言麗祖避甄萱亂。嘗一登于此。因名焉。其虛實未可知。然洞外十里。有申壯節死義處。理或然也。又其上百步有石广。可蔭十數人。有普照國師知訥者入定于此。石面鑱訥菴二字。尙可認。其後禪宿往往來住。率不能久也。絶頂有廣石臺。力竭不能上。顧謂公普曰。吾輩選勝深入。到峻絶處便休。亦可反爲學問之戒。遂留名石間。迤下養眞庵。汝浩已來待矣。語數餉。徐下內院。使敎釋設講而聽曰。三代威儀盡在是矣。吾儒家何處得此氣象。又過浮屠庵。向夕而返。是行。見禪釋殆十數。未見其卓然有道者。况吾道中可易其人哉。雖然。彼猶面壁手珠。學焉而未至。吾儒方馳驟於名利而不知返。又可愧也。翼日曉起。天小雨。雲煙迷暗。杉檜響籟。遙聞水碓低仰林木間。又一段奇勝也。余以遠遊有方。遂戒歸。汝浩出洞門佇立以別。蓋余前日有山水之遊。輒獨往而無誰語。間有朋友肯相過者。而率在村閈巷曲之中。無以宣暢其湮鬱。今是行也。得汝浩父子。爲之先後。而遍歷公山之勝處。所以得於心而寓諸目者。殆平日未有也。但曹公進叔立夫未能與偕。而上遊銀海之勝。又指點而未果遊。斯爲介介。然天下事難得圓滿。留待異日。亦未晩也。臨別。汝浩要一言志其勝。遂書此以歸。且以貽曹公進叔立夫。以續成臥遊。吾弟休文頗有是癖。亦當歸以語之。戊辰正月小盡日。李象靖景文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