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사 15〔其十五〕
기자묘(箕子墓)
평양의 토산에 무덤 하나 있으니 平壤兔山有塚原
면면한 세 성씨 후손임이 분명하네 綿綿三姓驗雲孫
지금까지 숭인전에 제사를 지내니 至今血食崇仁殿
만대토록 기자 은택 잊기 어렵다오 萬世難忘箕子恩
평양부(平壤府) 북쪽 토산(兔山)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이정귀(李廷龜)의 숭인전(崇仁殿)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한(馬韓) 말에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친(親)’으로 뒤에 한씨(韓氏)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평(平)’으로 기씨(奇氏)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양(諒)’으로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갔는데 뒤에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주] 시(詩) : 《무명자집》 시고 제6책에 실린 시는 작자 나이 67세인 정묘년(1807, 순조7) 세모에 지은 시부터 70세인 경오년(1810)에 지은 시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창작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명자집》 시고 제6책의 후반부에 실린 〈득실에 대해 읊다〔詠得失〕〉라는 시의 원주에 “모두 9수인데 한 수는 제8권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무명자집》 시고 제5책 〈영사 93〉의 주석에 ‘12권 기묘조(己卯條)’에도 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원래 제6책 이후로도 많은 시가 있어서, 최소한 12책 이상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811년에서 1826년 작고할 때까지 만년에 해당하는 15년간의 시는 산일된 듯하다.
[주1] 이정귀(李廷龜)의 숭인전(崇仁殿) 비문 : 이정귀(1564~1635)는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이며,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숭인전 비문’은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서문을 이른다. ‘숭인전’은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이며, 현재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2호로, 평양시 중구 서문동에 있다. 《月沙先生集 卷45 箕子廟碑銘》
[주2]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 : ‘용강’은 평안남도에 있다. 옛 황룡국(黃龍國)으로 고구려에 의해 합병되었다. 고려 때에 와서 황룡성(黃龍城)으로 불렀다가 뒤에 용강으로 고쳤다. 《기자지》에는 ‘황룡국’으로 되어 있다. 《權相老, 韓國地名沿革考, 서울:東國文化社, 단기4294(1961), 108쪽, 龍岡郡》 《箕子志 世系》
[주3] 뒤에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 원문은 ‘其後爲鮮于氏’이다. 이정귀의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에는 ‘以傳鮮于’로 되어 있다. 저본의 원문은 《동국역대총목》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지》에 따르면 기자조선(箕子朝鮮) 제2대 임금 장혜왕(莊惠王)의 동생 중(仲)을 우(于)에 봉했는데, 그 자손이 선(鮮)에도 있고 우(于)에도 있었기 때문에 이 두 나라를 합쳐 ‘선우’라는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月沙集 卷45 箕子廟碑銘》 《東國歷代總目 三韓 馬韓》 《箕子志 世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