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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3절.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
에베소서 1-3장은 교리편이고, 4-6장은 실천편입니다.
전반부는 주제가 <교회의 비밀>이고, 후반부는 교회의 일치를 지킬 것(4:1-16), 새 사람의 생활(4:17-5:21),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5:22-6:9), 마귀를 대적하는 그리스도인의 무장(6:10-18)입니다.
교리 부분에서 교회의 일치를 논한 바울은(2:11-22) 실천편에서도 먼저 교회의 일치를 권면하면서, 교회 일치의 권면(4:1-3), 일치의 이유(4:4-6), 일치 중에 다른 은사들(4:7-16)을 말씀합니다.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I, the prisoner of the Lord, implore you to walk in a manner worthy of the calling with which you have been called,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Παρακαλῶ οὖν ὑμᾶς ἐγὼ, ὁ δέσμιος ἐν Κυρίῳ
I exhort therefore you I, the prisoner in Lord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권하노니’(Παρακαλῶ)는 현재형입니다(exhort)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ἀξίως περιπατῆσαι τῆς κλήσεως, ἧς ἐκλήθητε,
worthily to walk of the calling, to which you were called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ἐκλήθητε)은 부정과거 수동태로서(you were called ) 과거에 확실하게 부름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행하여’(περιπατ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walk) 확실한 모습으로 실천하는 것을 가리키고, 구문상 앞의 ‘내가 권한다’(Παρακαλῶ:exhort)에 연결되어 ‘합당하게 행하도록 내가 권고한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는 교리편과 실천편을 나누는 접두어로서 로마서 12장 1절에도 똑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갇힌’이란 표현은 지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고 이 편지가 옥중서신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권하노니’는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르심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란 표현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에베소 2:19).
이러한 신분 의식은 모든 교훈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2.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삶’이란 에베소서에서는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것이고, 로마서 12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라고 했고요(로마서 12:10),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율법주의에 종노릇하지 말고’(13절) ‘성령으로 행하라’(25절)고 했고요,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3. ‘그러므로’란 말씀은 교리적인 교훈에서 실천적인 삶이 비롯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감격에 대한 교리를 올바로 알아야, 감사와 봉사와 충성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없는데, 여러 가지 실천을 강조하면, 무거운 율법적인 짐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는데, 봉사하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서로 말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면, 상사병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결혼한다면, 그것도 몹시 괴로울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못할 때, 젖 몸살이 심하다고 합니다.
배고픈 것보다도 대소변을 배설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더 큽니다.
아이들이 배설의 기쁨을 갖지 못하도록, 오줌 싸고 똥 쌀 때, 자꾸 괴롭히면 아이들이 짜증 나고 성질이 나빠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감격으로 가득 차면, 실천편에 나오는 권면이 부담이 되지 않고, 사랑을 발산할 수 있는 좋은 길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엄청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쁨으로 섬겼고, 자기 민족을 용서하고 구원해주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자기 목숨을 거두워달라고까지 했습니다.( 출애굽기 32:32, 로마서 9:3)
3. 한편 ‘그러므로’란 딱딱한 교리 신앙에만 빠지지 말고, 개인적인 신비주의에만 빠지지 말고, 구원의 감격을 생활 속의 실천을 통해서 더 큰 감격적인 체험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공부와 설교 때 받는 은혜도 중요하지만, 성도의 심방과 구제와 전도를 통해서 얻는 은혜와 감격은 보다 더 크다는 것을 실천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도 내가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젖을 먹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더욱 강렬한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실천적 교훈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더 큰 은혜와 감격과 행복을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4. ‘주 안에 갇힌 나’라는 것도 바울이 실천적인 복음 전도를 통해서 감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만일 바울이 주님의 명령을 배반하고 전도하지 않고 가만있었다면, 감옥에 갇힐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인 괴수를 용서하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 사랑의 복음 전도를 실천하다가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옥에 갇힌 것을 원망하지 않고, 가슴에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감격을 가지고 ‘주 안에 갇힌 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께서는 영 죽을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바울 같은 폭행자도 불러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우상숭배 가정에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도 어부인데 불러주셨습니다.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대통령이 불러주어도 대단히 자랑할 것입니다.
임금님의 양자로 입적되어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예수님이 나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학생은 학생답게 살아야 하고, 군인은 군인답게 살아야 하고, 공무원은 공무원답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옛날 명문 가정의 양반집 자제들은 함부로 처신하지 않았고, 신분에 맞게 고상하게 처신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고귀한 처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합당한 생활의 구체적인 지침으로서 2-3절에 ‘겸손으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가장 기초는 성도가 하나 되고 평안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에서 가장 안 좋은 모습은 서로 싸우고, 불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교인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평안을 유지하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교회의 직분자로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하고 심방하고 이웃을 돌아보고 전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showing tolerance for one another in love,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μετὰ πάσης ταπεινοφροσύνης καὶ πραΰτητος, μετὰ μακροθυμίας,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ἀνεχόμενοι ἀλλήλων ἐν ἀγάπῃ,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용납하고’(ἀνεχόμενοι)는 현재 분사로서(bearing with) ‘용납하면서’란 뜻입니다.
1. 여기에 기록된 덕목들은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1) ‘겸손’은 당시에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이 멸시하던 것이었고, 예수님은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9).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빌립보서 2:3)
어거스틴은 겸손을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강조했습니다.
궁극적으로 겸손은 자의적 겸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다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겸손히 고백했습니다(누가복음 5:8).
예수님이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요한복음 13:4-5)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5:5).
(2) ‘온유’(πρᾳΰτης)란 말(meekiness, mildness, gentleness)은 원래 잘 길들여진 말과 소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부드럽게 잘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오래 참음’이란 사랑의 첫째 덕목이고(고린도전 13:1),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죄인들이 거역한 것들을 모두 참으셨고(히브리서 12:3), 사울(바울)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셨고(디모데전서 1:16), 지금도 최후의 심판을 오래 참고 계십니다(베드로전서 3:9).
2. 원래 로마시대에는 ‘겸손’과 ‘온유’란 노예가 주인에게 굽신거리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일반 사람들은 ‘겸손’이란 나쁜 모습이고, ‘당당한 태도’를 건전한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
그리고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4-6.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이처럼 겸손과 온유는 하나님과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종으로서 순종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교만하고 거역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22:42).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다 멸망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셨으나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처럼 예수님이 종처럼 겸손하고 온유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교만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멸망하게 되나,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잠언 18:12.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잠언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시편 37:11.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3. 어떻게 하면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교만하고 악한 사람은 멸망하고 속히 망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2)
시편 37:1-6.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겸손이나 온유나 오래 참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이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용납한다’는 단어(ἀνέχομαι)는 ‘견딘다, 용납한다, 참는다’(endure, bear with, have patience with, suffer)는 뜻입니다.
한쪽만 참는 것이 아니고 서로 참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면 허다한 죄도 덮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6.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을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의 기도처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가정생활과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와 행복이 가득한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 바라고, 주님이 재물과 영광과 장수의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ing diligent to preserve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σπουδάζοντες τηρεῖν τὴν ἑνότητα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ἐν τῷ συνδέσμῳ τῆς εἰρήνης·
being diligent to keep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the peace.
직역하면 ‘평화의 띠로 그 영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힘쓰면서’란 뜻입니다.
‘지키기 위해’(τηρ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keep), ‘힘쓰면서’(σπουδάζοντες)는 현재 분사로서(being diligent) 항상 힘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평안’(εἰρήνη)이란 교인들 간의 ‘평화’를 가리킵니다.
교인들 가운데 평화가 이루어질 때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교인들 간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교인들 간의 ‘연합을 유지하도록 힘쓰라’(being diligent to keep the unity)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연합은 성령님께서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the unity of the Spirit).
즉 성령님께서 이루어주신 교회의 연합을 우리들이 힘써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나 교인들끼리 물고 찢는 행위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 육체의 일이고 사탄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교회 안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도 있고, 자유인과 노예도 있고, 여자와 남자도 있고, 어른과 어린아이도 있고,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차이가 많고, 이 차이를 극복하려면 힘써 연합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남녀가 결혼하면, 서로 자라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싸우지만 서로 이해하고 맞추어가면서 나중에는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차이가 많은 사람들끼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서 평화와 연합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2. ‘평안’(평화)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평안한 것이 더 위대한 일입니다.
즉 평화가 먼저이고, 일이 나중입니다.
가정에서도 ‘가화는 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 안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차별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녀들 간의 화목과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끼리 싸우면서 부모에게 고기와 돈을 드린다고 해도, 그 부모의 마음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교회들끼리 싸우면, 기뻐하지 않으시고, 성령님께서 근심하실 것입니다.
교인들끼리의 화평은 성령님이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
그러나 원수 맺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당 짓는 것은 육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20).
화평을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3.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이 덮어집니다.
베드로전서 4:8.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꾸 허물만 보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잘못된 것이 200가지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정 엄마가 딸 집에 가면, 도와줄 것이 200가지가 보인답니다.
이것은 며느리가 잘못하고 딸이 잘 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눈인가 미움의 눈인가의 차이입니다.
교회에서도 사랑의 눈으로 보면, 사랑스런 것이 수없이 보이고, 미운 눈으로 보면 탈 잡을 것이 수없이 보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허다한 죄가 덮어진다고 했으니, 기도 많이 하시고,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4.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셨으면 그만이지, 왜 사람이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까?
성령님이 교회에 운행하셔서 하나되게 하시는데, 사람들이 성령님을 따라가야지, 사람들이 성령님을 거스려서 싸우고 다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할례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항상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심을 거스립니다.
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거스리지 않고 화목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13)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성질 부리고 교회의 화평을 깨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화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욕에서 나오는 것은 싸우고 다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힘써 지키라’는 것은 교회의 화평을 이루어가는 것이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추구해가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싸우지 않고 평안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방심하면, 교회는 싸우고 분열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피로 하나 되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역사하심을 따라, 열심을 다해 교회의 화평을 이루어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행복한 가운데, 든든히 서가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