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처럼 휘어진 1킬로미터가 넘는 보길도 예송리 해수욕장은 온통 흑진주 같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철석-” 하고 파도가 치면 “차르르르---” 하고 조약돌이 서로 몸을 부딪쳐서 소리를 냈다.
조약돌이 내는 소리가 음악 소리 같다. 젊은 엄마가 맑은 음성으로 부르는 자장가 소리 같기도 하고, 달리 들으면 이기고 돌아오는 경기병대(輕騎兵隊)의 경쾌한 편자 울림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야외무도회장의 왈츠연주소리 같기도 하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소리다.
파도와 조약돌은 수만 년 또는 수십만 년을,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세월을 저렇게 곡을 연주 해왔을 것이다. 자갈들이 처음에는 박 덩어리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에 깎여서 마침내 주먹만한 조약돌로 변했으리라.
“차르르르---. 차르르르---.”
조약돌의 연주소리는 자신들의 몸을 서로 부딪치면서 마모시키는 소리다. 아니 인고(忍苦)의 세월을 살아온 삶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보석세공사가 다듬어 놓은 흑진주 같은 까만 조약돌의 아름다움이 한 배에 내린 병아리들처럼 뗄 수 없는 정이 느껴졌다.
조약돌은 파도소리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은 다 마모되어 없어지고 ‘차르르르---’소리만 남아서 조약돌의 결정체가 된 것 같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첫수다.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詩歌)에 쌍벽을 이루는 명시조다. 왜 벗을 다섯만 쳤을까. 동산에 달 오를 때 윤선도는 이 해변을 거닐면서 저 조약돌의 노래를 듣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 호가 해옹(海翁)이기도한 분이다. 동산에 달 오를 때 이 해변을 거닐면서 조약돌의 노래를 즐겨 듣지 않았을 리 없는데 조약돌 노래는 왜 벗으로 안 쳤는지 알 수 없다. 달빛 찬란한 밤의 조약돌 노랫소리는 더없이 맑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당연히 ‘동산에 달 오르니 조약돌 노래 맑다’고 읊고 육우가(六友歌)라고 제목을 달아야 옳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들으면 들을수록 검은 조약돌의 노랫소리는 맑고 곱다. 조약돌을 몇 개 가져가고 싶어졌다. 달밤이면 전등불을 끄고 창문에 비추는 달빛 아래 조약돌을 놓아두면 ‘차르르르--- 차르르르---’ 노래를 불러줄 것만 같다. 그래서 이 무뢰한은 다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새까맣게 윤이 나는 조약돌을 몇 개 골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본 사람이 없으려니 했는데 하늘이 보고 바다가 보고 택시기사가 보았다.
“이곳에서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가져갈 수 없습니다.”
택시기사가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규칙을 말했다. 그리고 관광지 택시 기사답게 공원관리법을 위반한 내게 우회적으로 알아듣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돌을 육지로 가지고 나가면 용왕님이 노하십니다. 용왕님이 신하를 당신 집까지 보내서 저주해요.” 그 말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듣고 보니까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미신이지 뭐-’ 하는 오기에 택시기사의 말을 무시했다. 나만 조약돌을 주워 넣는 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조약돌 몇 개씩을 주머니에 주어 넣는 눈치였다.
“조약돌은 조약돌이 있을 자리에 모여 있어야 아름답지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그저 조약돌일 뿐입니다.”
택시기사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우리에게 들어보라는 말 같았다. 관광자원을 가지고 먹고 사는 지방의 택시 운전기사답게 점잔을 빼는 게 오히려 모욕감을 준다. 그 소리를 듣고 L 수필가는 들었던 조약돌을 해변에 다시 내려놓는데 나는 오기가 생겨서 내려놓지 않았다.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제자리를 차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들은 타의든 자의든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제자리가 아닌 자리를 넘본다. 그것은 야망과는 다르다. 야망은 타당성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지만, 자리를 넘보는 것은 타당성 여부에 불구하고 덤비는 부당한 짓이다.
국무총리의 경우 제자리를 차지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고 왈가왈부 편을 갈라서 설전(舌戰)을 벌인다. 자리에 대한 공방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 시대의 오욕이 나는 실망스럽다. 권력이 존재하는 자리는 변기의 좌대(座臺)만치나 비위생적인 자리인 모양이다.
나는 도서관의 도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자리가 편하다. 내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다. 그러나 도서관에 도서를 열람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제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일지 의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몸에 배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게 나로서는 청문회를 통과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내 책상에 가져다 놓으면 그 자리가 조약돌의 자리일까 생각해본다. 보는 사람마다 ‘어쩜 이렇게 앙증맞고……’하는 찬사를 받으면 조약돌은 행복할까. 아니다. 그건 조약돌의 불행이다. ‘철썩 쏴 아’ 하는 소리만 들어온 조약돌은 그 자리가 윤선도의 유배 자리처럼 피 말리는 자리에 불과할 뿐이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것이고, 바닷바람도 그리워질 것이고, 달밤의 파도소리가 그리워 시름시름 앓을 것이다. 그 불편한 자리에 앉아 있는 조약돌에 나는 싫증을 느끼고 종단에는 냇가에 버리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짠 내를 토하는 갯돌을 냇가의 조약돌은 ‘어디서 이런 게 왔어-.’ 하고 텃세를 하며 왕따를 시킬 것이 뻔하다. 그러면 정말 용왕님이 신하를 보내서 나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택시기사의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을 마치고 승선을 기다리다가 보길도 관광안내 지도를 한 장 얻을까 하고 매표소에 들렸더니 면사무소에 가보란다. 그 말대로 보길면사무소를 찾아갔으나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되돌아 나오는데 면사무소 화단에 곱게 깔린 조약돌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쩐지 화단에 놓인 조약돌에서는 반짝거림도 없고, 파도에 출렁이며 부르던 노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조약돌의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저씨 우리를 육지로 데려가지 마세요. 제발-.’
조약돌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행에서 벗어나 다시 예송리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든 조약돌을 꺼내서 조약돌 사이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밀려온 파도에 흑진주 같은 조약돌이 “차르르르---.” 하고 나에게 더욱 맑고 고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었다.
택시기사가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관광자원은 내 것이란 애착심이 생겼다.
출처 : 수도일보(http://www.soodo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