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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홍섬洪暹
예로부터 신하가 벼슬을 이루고 명망이 선 뒤에는 몸을 거두어 한적한 곳에 물러나 노년을 보내려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대개 자유로이 하기 어려워 구차하게 용납함을 구하였다. 그 덕은 충분히 완악한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나이는 충분히 나라의 큰 원로가 되는데도, 초야에서 한산하게 살면서 만년의 절개를 보전한 사람을 지금 세상에서 찾아보면, 오직 효절(孝節) 이공(李公) 한 사람뿐이다.
공은 이름이 현보(賢輔), 자가 비중(斐仲)이다. 그 선조는 영천(永川) 사람이다. 휘 헌(軒)이 처음 예안현에 이거하여 드디어 현인(縣人)이 되었다. 벼슬은 군기 소윤인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소윤이 파(坡)를 낳았으니 의흥 현감이고, 현감이 효손(孝孫)을 낳았으니 통례문 봉례이고, 봉례가 흠(欽)을 낳았으니 인제 현감이다. 현감이 호군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13) 7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처음에 봉례공이 일찍이 산사에 논 적이 있는데 꿈에 신인이 아뢰기를 “선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나머지 경사가 있다.” 하였다. 잠을 깬 뒤에 권씨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이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공의 어릴 때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고, 자못 활 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전력하지 아니하였다. 향교에 가서 공부하고부터 비로소 발분하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되니 글 솜씨가 뛰어나 동류들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에게 수업하니 문광공이 그의 기국(器局)을 중히 여겼다.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무오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신유년(1501)에 예문관 검열에 추천되었는데, 처음 사필을 잡고 국사를 쓰는 데 구차하지 아니하였다. 임술년(1502)에 공이 연산주(燕山主)에 계달하기를 “사관은 임금의 언동을 기록하는 데 멀리 어탑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청컨대 임금 앞에 가까이 있으면서 기주(記注)하는 데 빠트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폐주가 언짢게 여겼으나 허락하였다.
갑자년(1504)에 성균관 전적에 올라 세자시강원 사서에 뽑혀 들어갔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 서연관의 잘못을 말하였는데, 이때 연산주가 언관(言官)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이로 인하여 매우 화를 내며 “간관들은 일이 있으면 즉시 계달하지, 어찌 늦추어 하루를 넘기는가.”라고 하고는 의금부로 내려보냈다가 마침내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으로 유배를 보냈다.
병인년(1506)에 중종이 반정하여 공이 배소로부터 일어나 호조 좌랑을 받고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곧아서 권세에 휘둘리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소주두루미〔燒酒陶甁〕’라 불렀으니, 대개 바깥은 거무스레하나 안은 맑고 맵다는 말이다.
무진년(1508)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형조 정랑에서 영천 군수로 나갔다. 계유년(1513)에 임기를 마치고 들어와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 갑술년(1515)에 밀양 부사로 나가서 잘 다스려 백성에 끼친 사랑이 컸다. 을해년(1515)에 사고로 파면되었고, 병자년(1516) 겨울에 선공감 부정을 제수 받았고 겨울에 충주 목사로 나갔다. 정축년(1517)에 조정에서 가까이서 어버이를 편하게 봉양하라고 안동으로 바꾸어 주었다.
공은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학교가 제일이라 하여 선비들을 크게 모으고 공궤를 넉넉히 하니 원근에서 모여들어 향교가 다 용납지 못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복시 정이 되고 사헌부 집의로 옮겼다가 다시 군자감 부정으로 바뀌었다. 얼마지 않아 성주 목사로 나가니 임금이 공이 가는 곳에 정치가 아름답다 하여 표리(表裏)를 내리고 유서로 표창하였다. 을유년(1525)에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병술년(1526)에 다시 시강원 보덕에 제수되었고, 정해년(1527)에 특별히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병조 참지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무자년(1528)에 좌천되어 대구 부사가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축년(1529)에 영천 군수가 되었고, 신묘년(1531)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계사년(1533)에 복을 마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제학이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겼다.
갑오년(1534) 봄에 경주 부윤으로 나가서 폐해를 없애고 간소화하여 다스린 효과가 더욱 드러났다. 병신년(1536)에 부모님의 연세가 더욱 높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봉양하였다. 겨울에 이조 참의로 불렀다가 미처 나아가기도 전에 발탁해 올려 가선대부 경상도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공은 본도에는 친구들이 있고 감사는 풍헌(風憲)을 겸하였으니 사사로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법이 문란해질까 하여 엄격하게 막았다. 이에 자제와 친구들이 감히 공관에 찾아오지 아니하고 온 도가 숙연해졌다. 정유년(1537)에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때 연세가 71세인데도 아우들을 데리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기해년(1539)에 삼년상을 마치고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공이 본래 물러가 쉬려는 뜻이 있었기에, 경자년(1540) 가을에 이르러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초정(椒井)에 목욕을 청하였다. 이때 나의 선군인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이 정승이 되어 공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만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속히 돌아오라 명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겨울에 호조 참판에 옮겼다.
임인년(1542) 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가을에 또 병을 이유로 목욕을 청하고 배를 빌려 동쪽으로 돌아오니, 한 시대 관료들인 의정 이하가 도성문 밖에 나와 전별하는데 천막이 한강까지 늘어서고 수레가 즐비하여 보는 사람들이 근고에 없던 일이라고 하였다. 계묘년(1543)에 중종이 공의 은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황고(皇考)를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여 표창하고, 선대에 은혜를 미루어 부친을 의정부 좌참찬에, 모부인을 정부인에, 조부를 이조 참판에, 증조를 병조 참의에 증직하였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즉위하니, 공은 노병으로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뜻을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정치의 요령은 사람을 얻는 데 있으니 처음 임명할 때 밝게 분별하고 임명한 뒤에는 믿고 맡겨야 합니다. 선왕께서 어진 이와 선비를 좋아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나, 혹 어진 이와 간사한 무리가 서로 섞이고 끝까지 맡겨 쓰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직접 보고 들으신 것입니다. 부디 간절한 마음으로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하고 조화롭게 하고 전일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글을 본 자가 깊이 노성한 분이 임금께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고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자헌의 품계로 올려 포상하였다. 이해 가을에 인종이 승하하였는데, 공은 초야에 있으면서도 두 임금이 연이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으며 병든 몸을 이끌고 빈소로 달려가려 하였으나, 자제들이 공의 쇠병이 심하다 하여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명종 기유년(1549)에 찬성 김광준(金光準)이 절의 포장을 청하여 정헌의 품계를 더 올려주었고, 이해에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예를 시행하여 또 숭정(崇政)의 품계를 제수하였다. 갑인년(1554)에 한 간관이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나라의 기덕(耆德)이요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불러오면 반드시 유익한 건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글을 내려 아름다움을 포장하고 역마를 타고 조정으로 오게 하였다. 공은 포장하시는 말씀이 지나침을 황공하게 여기고 글을 올려 사양하고, 그 김에 건의하기를 “선과(禪科)의 복설(復設)과 사원(寺院)의 수선(修繕)은 전하의 선을 향한 마음이 끊어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였다. 말뜻이 절실하여 초야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 충성은 늙어도 더욱 돈독하였다.
을묘년(1555) 5월에 병이 들어 6월 13일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올라가니 상이 놀라서 슬퍼하시고 좌우에 이르기를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더니 이젠 그만이구나. 내가 심히 슬프고 비통하구나. 부의를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해 8월 28일 고을 북쪽 용두산(龍頭山) 남쪽 도곡(道谷)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어버이 봉양을 급선무로 여겼기에, 조정에서 임금을 섬김에 은총과 대우가 소홀하지 않았는데도 잇따라 소장을 올려 사직과 목욕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도 그 지극한 마음을 알아 그 뜻대로 하도록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고을 원으로 내보내 봉양하게 한 것이 여덟 고을이었다. 분천(汾川)에 살면서 그 위에 집을 지어 ‘애일당(愛日堂)’이라 하고 모시면서 놀고 즐기는 장소로 삼았고, 그 바위를 농암(聾巖)이라 하여 뜻을 붙였다.
일찍이 부제학으로서 근친하여, 당시 94세인 참찬공, 92세인 숙부 균(鈞), 82세인 외숙 첨지 권수익(權受益)에다가 향인 중 나이 많은 사람 6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다. 자손이 앞에 가득한 자리에서 공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기쁘게 해드리니, 영예와 효성이 성대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 초상과 장례의 비용을 아우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집에서 다 마련하였고, 문족(門族) 중에 곤궁한 자가 있으면 힘써 도와주어서 혼기를 놓치지 않게 하였으며, 때때로 임금의 하사품이 있으면 친척과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 가득 찬 것을 깊이 경계하여 한 계급이 오를 때마다 두려워하며 편치 않게 여긴 것이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한때에 세 아들이 고을 원이 되어 와서 봉양하는데도 도리어 걱정으로 여기고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다.
의복과 일용품이 간소하고 검소하였고, 몸가짐을 경건하고 신중하게 하였다. 비록 평상시라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고 나와 종일 주렴을 내린 서재에서 안석에 의지하여 있었으며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남을 위한 일에는 부지런하고 집안 살림에는 서툴렀으며, 성품이 고결하였으나 남을 접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도 무시하지 않고 술과 음식을 가지고 초대하면 억지로 사양하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부형처럼 사랑하고 흠모하였다. 고을에서 처신할 때는 사적인 일로 공적인 도리를 범하지 않았다.
본 현은 백성이 적고 형편이 피폐한데, 한 집에 장정 1명의 부역을 부과하니 폐단이 거의 구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공이 비로소 의견을 내놓아 8결에 장정 1명을 내도록 하니, 세금이 가볍고 부역이 고르게 되어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일을 헤아림에 밝고 세밀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었고, 자신의 과실이 있으면 남에게 감추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공의 공평하고 정직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담박하여 욕심이 적고 명성과 이익을 흠모하지 않았으며, 집 주변에 작은 당(堂)을 지어 ‘명농(明農)’이라는 편액을 걸고 벽에 〈도연명귀거래도(陶淵明歸去來圖)〉를 붙이니 사람들도 공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치사할 연세가 넘어 예법을 따라 애써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공의 근력과 이목이 아직 쇠퇴하지 않았으니 사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물러나왔는데도 벼슬이 높아지고 초야에 있으면서 직함을 띠고 있는 것을 이처럼 그저 딱하게 여겼고, 어름어름 넘어가다가는 끝내 뜻을 이룰 날이 없을 것이며, 이는 신하가 의리에 따라 진퇴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에 경자년 이후로 끊임없이 물러나기를 청하여 기필코 물러난 뒤라야 그만두리라고 기약하고, 집에서 녹봉을 받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로써 집에서 지낸 것이 14년이 되었는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나아갔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다르지 않았다.
몸이 한가롭게 되자 더욱 산수를 즐겨,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숲을 찾고 산등성이에 올랐는데, 농부와 목동이 그를 만나도 그가 재상을 지낸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즐거이 작은 배를 타고 임강사(臨江寺)를 왕래하여 서식(栖息)하는 곳으로 삼으니 풍신(風神)이 소탈하고 운치가 고매하였다. 술이 약간 취하면 시중드는 아이에게 〈어부사(漁父詞)〉를 부르게 하고 초연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 있는 생각이 있었다. 시를 읊으면 뜻이 청신하여 젊은이의 성대한 작품으로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임종할 때 아들들이 울부짖으니 공이 이르기를 “내 나이 90이고 너희들이 모두 있고 국은(國恩)을 후히 받았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초상을 검소하게 치르고 장사는 시기를 넘기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공은 안동 권씨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 석량(碩樑)은 요절하였고, 다음 문량(文樑)은 평릉도 찰방이고, 다음 희량(希樑)은 봉화 현감이고, 다음 중량(仲樑)은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가 되고 바야흐로 우뚝한 이름이 있다. 다음 계량(季樑)은 의흥 현감이고, 딸은 군수 김부인(金富仁)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 2남을 두었으니 윤량(閏樑)은 태의(太醫)가 되었고,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문량은 이승손(李承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원승(元承)이다. 장녀는 황준량(黃俊良), 다음은 금응신(琴應侁), 다음은 김기보(金箕報)에게 출가하였다.
희량은 황정(黃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선승(善承)과 극승(克承)이며 딸은 송복숭(宋福崇)에게 출가하였다.
중량은 습독 반사형(潘士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영승(令承)이다.
계량은 김옥견(金玉堅)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광승(光承)이고 큰딸은 양한신(楊漢臣), 차녀는 임균(任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숙량은 이복신(李復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군수 김부인은 4남을 두었으니 호(壕)ㆍ전(㙉)ㆍ탄(坦)ㆍ기(圻)이다.
승지공이 탈상하고 퇴계 이황(李滉)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신도비문을 지어 달라 부탁하였다. 아, 공은 나의 선친과 사마시에 같은 해에 합격하였고, 공이 옥당(玉堂) 장관 때 내가 박사로 재임하면서 오랫동안 훈도를 받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더욱이 퇴계가 공의 심사(心事)를 기술한 것이 이미 자세하면서 극진하고 그 말이 후세에 전하여 믿을 만하기에 서두에 모두 퇴계의 글을 사용하였다. 이어 명(銘)을 짓는다.
아름다운 덕이 사람에게 있으니 懿德在人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네 莫先於孝
공이 효를 다하였으니 公能盡孝
증자와 민자건을 이었네 曾閔是紹
귀한 것은 벼슬이 아닌데 可貴匪爵
벼슬이 와서 나를 얽매었네 爵來縻我
몸은 물러나도 벼슬은 높였으니 身退秩崇
남이 나를 버리지 않았네 人不我捨
구십을 모라고 하니 九十曰耄
성인도 꼭 가질 수 없는 수명 聖未必有
공은 능히 누렸으니 公能享之
하늘이 부여한 것이 매우 두터웠네 天賦孔厚
덕과 벼슬과 나이를 德爵與齒
달존이라 하였는데 是謂達尊
이 세 가지를 겸하였으니 兼斯三者
예전부터 드문 일이네 從古鮮存
명농당이 있으니 明農有堂
내가 갈고 매는 것이 즐겁네 樂我耕耘
바위를 귀머거리라 불렀으니 喚巖以聾
알고 듣는 것을 끊어버릴 참이었네 擬斷知聞
양조(兩朝 중종ㆍ인종)에 상소를 올려 貢疏兩朝
요순 시대를 기약하였고 期以華勛
효도를 미루어 충성을 다하니 忠由孝推
내 임금을 어찌 잊겠는가 敢忘吾君
임금께서 원로를 생각하여 王念老成
예우하여 애써 불렀네 禮辟空勤
백성들 어찌하란 말인가 如蒼生何
앞날이 저물어간다고 하고 前途告曛
효성으로 날을 아꼈으니 誠乎愛日
효도에 게으른 자 분발하였고 怠孝者企
명성과 이욕이 몸을 더럽히겠다 여겼으니 聲利若浼
나아가기를 탐하는 자 부끄러웠네 嗜進者恥
나약한 자 서게 하고 완악한 자 청렴하게 하니 懦立頑廉
돌아가신 후에 청풍이 남았네 沒餘淸風
돌에 사실을 기재하여 石于紀實
무궁토록 밝게 전하노라 式昭無窮
가정(嘉靖) 45년(1566) 병인 2월 일에 대제학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쓰다.
[주1] 홍섬(洪暹) : 1504~158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2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다.
[주2] 송인(宋寅) : 1517~1584.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庵),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이황(李滉), 조식(曺植), 이민구(李敏求), 정렴(鄭𥖝),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저서로 《이암유고(頤庵遺稿)》가 있다.
碑銘[洪暹]
自古人臣。當宦成名立之後。非不欲斂身而退老於閒適。率多難於自由。苟且求容。其德足以廉頑立懦。年足以爲國大老。蕭散丘園。能保晩節。求之近世。惟孝節李公一人而已。公諱賢輔。字棐仲。其先永川人。有諱軒。始移居于禮安縣。遂爲縣人。官至軍器少尹。於公爲高祖。少尹生諱坡。義興縣監。縣監生諱孝孫。通禮門奉禮。奉禮生諱欽。麟蹄縣監。縣監娶護軍權謙之女。以成化丁亥七月二十九日生公。初。奉禮公嘗遊山寺。夢有神人告曰。積善之家。必有餘慶。旣寤。聞權氏婦生男。心異之。故公少名有慶。公生而穎秀。骨相不凡。頗好弋獵。不肯專意學問。自遊鄕校。始發憤讀書。爲詞章。造語警拔。見重流輩。受業於文匡公 洪貴達。爲文匡所器重。中乙卯司馬試。捷戊午科。初補校書館正字。辛酉。見薦爲藝文館檢閱。始秉史筆。書事不苟。壬戌。公啓于燕山主曰。史官記人主言動。而遠伏榻下。請稍近榻前。使記注無疏漏。主心咈而且許之。甲子。陞成均典籍。選入侍講院爲司書。司諫院正言。論書筵官所失。是時。燕山方讎視言官。因此恚甚曰。諫官。當有聞卽啓。何以淹至一日。下禁府。竟配安東之安奇驛。丙寅。中廟反正。公起自謫籍。授戶曹佐郞。陞敍司憲府持平。直不撓權。時人號爲燒酒陶甁。蓋以外黭然而內實淸烈也。戊辰。以親老。由刑曹正郞。出守永川郡。癸酉秩滿。入爲軍資僉正。陞司諫院司諫。甲戌。出爲密陽府使。善治取最。遺愛在民。乙亥。因事罷。丙子。授繕工副正。冬。出牧忠州。丁丑。朝廷欲使近其親便養。許換安東。公以化民之本莫先學校。大會儒士。贍養有方。遠近輳集。黌舍不能容。入爲司僕寺正。移司憲府執義。遞爲軍資監副正。未幾。出牧星州。上以公所至有美政。賜以表裏。下書褒奬。乙酉。以親老辭歸。丙戌。還拜侍講院輔德。丁亥。特陞通政。爲兵曹參知。尋爲同副承旨。戊子。因事左遷。出爲大丘府使。未久棄官歸。己丑。出守榮川郡。辛卯。遭外艱。癸巳。服闋。拜刑曹參議。轉入弘文館爲副提學。移右副承旨。甲午春。出爲慶州府尹。剗弊尙簡。治效尤著。丙申。以親年益老。解官歸養。冬。以禮曹參議徵。未及就命。擢陞嘉善階。觀察慶尙道。公以本道親舊所在。監司職兼風憲。若許私謁。則法由此壞。峻爲之防。子弟親舊。無敢伺候於公館者。一道肅然。丁酉。因事罷。丁內艱。公時年七十有一。猶能率諸弟廬墓三年。己亥服闋。拜刑曹參判。公雅有退休之志。至庚子秋。上章乞骸骨。不許。請浴椒井。時吾先君文僖公爲相。知公欲不復來。請留之。上引見公。諭令遄歸。以是志不果遂。冬。遷戶曹參判。壬寅春。遞拜同知樞府。秋。又引疾請浴。買舟東歸。一時搢紳。自議政以下出餞都門外。列幕至于漢濱。車馬騈闐。觀者以謂近古所未有之盛事。癸卯。中廟嘉公恬退。特授知中樞府事以奬之。推恩先世。追贈皇考以議政府左參贊。母夫人以貞夫人。祖考以吏曹參判。曾祖以兵曹參議。乙巳。仁廟嗣位。公以老病不能造闕。因拜疏陳請。大略以謂爲治之要。在乎得人。明以辨之於受任之初。信以委之於旣任之後。先王非不好賢樂士。而或致賢邪相混。任用不終。此殿下耳目之所及也。惓惓以難愼和一。爲新政之要。見者以爲深得老成告君之體。上嘉之。 特陞資憲階以褒之。是年秋。仁廟昇遐。公方在野。二聖相繼賓天。聞喪呼慟。欲輿疾赴臨。子弟以公衰病已甚。挽而力止之。及今上己酉。金贊成光準。請褒節義。命加正憲階。是年。國擧優老之典。又授公崇政階。甲寅。有一諫官啓于上曰。李某國之耆德。精力不衰。苟能召致。必有獻替之益。上降書褒美。仍命乘馹赴闕。公以褒辭太過。懼不敢當。上箋辭謝。因獻言曰。禪科之復。寺院之修。得非殿下向 善之心有所間斷乎。辭甚切至。其處畎畝不忘君。老而彌篤。乙卯五月。寢疾。至六月十三日。終于正寢。享年八十九。訃聞于朝。上震悼。謂左右曰。累召不來。今則已矣。予甚慘怛。賻贈有加。卜得是年八月二十八日。葬于縣北龍頭山南道谷先塋之側。公天性孝友。急於奉養。立朝事主。恩眷不衰。而乞閒請浴。上章相繼。朝廷亦知其至情。無不順適其意。故專城以養者幾八邑。卜居汾川築室其上。名堂以愛日。以爲侍親遊玩之所。又名其巖曰聾巖。以寓意焉。嘗以副提學來覲。是時參贊公年九十四。叔父鈞年九十二。舅權僉知受益年八十二。又聚鄕人年高者六人。作九老會。子孫盈前。公親戲綵以娛之。榮孝之盛。聳動觀聽。親旣沒。喪葬之資。不責諸弟。取辦於家。力周門族之窮者。令不失嫁娶之期。時得君賜。輒分戚隣。深以滿盈爲戒。一級之陞。每瞿然不寧者久之。一時三子以三城來養。而反以爲憂。不以爲榮。服用簡儉。敬謹自將。雖當燕居。必晨興盥漱。正衣冠而出。終日簾閣據几。不以寒暑而廢。勤於爲人。拙於謀家。性雖高介。接人以誠。不遺愚賤。酒食邀請。亦不強辭。鄕曲愛慕。視以父兄。居鄕。不肯干公以私。本縣民小邑 凋。戶出一夫。弊幾不可捄。公始倡議。請以八結出夫。賦輕役均。民賴其賜。料事明審。如有疑則虛懷以咨。已有失則對人不諱。人服公公直之量。澹泊寡欲。不慕聲利。構小堂于宅邊。扁以明農。壁畫陶潛歸去來圖。人亦知公志之有在。年踰致仕。據禮力辭。朝廷以公筋力耳目未覺衰替。不可引去。公自料身退而秩進。處野而朝銜。因循悶抑。如此則是終無遂志之日。非臣子進退以義之道。自庚子以不。求退不已。期於必退然後已。禁家不受祿俸。因而家食者十四年。而愛君憂國。不以進退異其心。身旣閒。益以溪山 自娛。竹杖芒鞋。穿林陟巘。田夫牧豎遇之。不知其爲宰相也。喜乘小艇往來臨江寺。以爲棲息之地。風神脫洒。韻致森逸。酒微醺。令侍兒歌漁父詞。超然有遺世獨立之想。吟成詩句。立意淸新。有非少年盛作之所能及也。臨終。諸子在傍號泣。公曰。吾年九十。汝輩俱存。厚受 國恩。死無可憾。喪務儉約。葬無過期。言訖而絶。公娶安東權氏忠順衛孝誠之女。生六男一女。男長曰碩樑。夭。次文樑。平陵道察訪。次希樑。奉化縣監。次仲樑。登甲午文科。爲承旨。方有時名。次季樑。義興縣監。次叔樑。進士。女適郡守金富仁。側室生二男。閏樑。屬太醫。次曰衍樑。文樑娶李承孫之女。生一男三女。男曰元承。女長適黃俊良。次適琴應洗。次適金箕報。希樑娶黃珽女。生二男一女。男曰善承,克承。女嫁宋福崇。承旨娶習讀潘士洞女。生一男。曰令承。季樑娶金玉堅女。生一男二女。男曰光承。女長適楊漢臣。次適任鈞。叔樑娶李復新女。郡守生四男。曰壕,㙉,坦,圻。承旨公旣免喪。携退溪李知事滉之狀。囑暹以神道之文。嗚呼。公與吾先人同年司馬。公之長玉署。吾忝博士。熏炙旣久。義不敢辭。況退溪述公心事旣詳且盡。而其言足以信後世。故爲序悉用退溪之文。而綴以銘曰。懿德在人莫先於孝。公能盡孝曾閔是紹。可貴匪爵爵來縻我。身退秩崇人不我捨。九十曰耄聖未必有。公能享之天賦孔厚。德爵與齒是謂達尊。兼斯三者從古鮮存。明農有堂樂我耕耘。喚巖以聾擬斷知聞。貢疏兩朝期以華勛。忠由孝推敢忘吾君。王念老成禮辟空勤。如蒼生何前途告曛。誠乎愛日怠孝者企。聲利若浼嗜進者恥。懦立頑廉沒餘淸風。石于紀實式昭無窮。嘉靖四十五年丙寅二月日。大提學洪暹 撰。礪城君宋寅。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