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곡이 〈현승편〉에 대해 논박한 것에 대해 변론하는 글〔張谿谷駁玄繩編辨〕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장계곡이 “대저 이미 동한 상태를 정(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동하지 않았을 때를 성(性)이라고 한다면, 이미 동한 뒤에는 문득 성이 없어져 버린단 말인가. 정 백자(程伯子)가 말하기를 ‘성에는 내외(內外)가 없다.’라고 하였다. 일단 내외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동정(動靜)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 대한 변론.
《중용장구》에 이르기를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가 해석하기를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정이다. 그것이 발하기 전에는 성(性)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말한다면,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은 바로 구봉이 이른바 아직 동하지 않았을 때와 이미 동한 상태를 나눈 것이다. 이것에 무슨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가.
계곡이 인용한 정 백자의 설은 이것과는 다르다. 이는 바로 옛사람이 이른바 “세로를 가지고 가로에 맞추려고 하거나, 가로를 가지고 세로에 맞추려고 한다.”라는 것이다. 횡거(橫渠) 선생은 본디 “정성(定性)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서 오히려 외물(外物)에 누(累)가 된다.”라는 요지로 질문하였다. 그 뜻은 대개 성(性)과 외물은 서로 판이하여서 둘이 되어 서로 간에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거기에서 이른바 ‘정(定)’이라는 것도 역시 여기에서 한번 정해지면 저기에서 응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 백자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정(定)이라는 것은, 동(動)하여도 정(定)하고 정(靜)하여도 정(定)하여, 보내고 맞이함이 없고 안과 밖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잘못 아는 것을 바로잡아 주는 말을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자사(子思)가 중화(中和)에 대해 논하면서 곧장 도(道)의 체(體)와 용(用)을 가리켜 말하였다. 그러므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성(性)과 정(情)으로 삼은 것이다. 정명도(程明道)가 정성(定性)에 대해 논하면서는 체(體)와 용(用)이 일관(一貫)된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안과 밖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도가 나란히 행해져서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사가 이른바 “이미 발한 정〔已發之情〕”이라는 것이 어찌 능히 이 성(性)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명도가 이른바 “안과 밖의 성(性)이 없다.”라고 한 것 역시 어찌 능히 흐릿하여 동(動)과 정(靜)의 구분이 없는 것이겠는가.
지금 계곡은 ‘성(性)은 안과 밖이 없다.’는 이유로 드디어 ‘성은 미동(未動)이라고 할 수가 없다.’라고 하려 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고 텅 비게 되는 데로 귀결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어찌 그렇겠는가.
어떤 사람이 여기에 있을 경우, 음양(陰陽)이 바로 한 기(氣)라는 이유로 양의(兩儀)를 말하지 않으려고 하고, 태극(太極)이 바로 통체(統體)라는 이유로 각각 갖추어진 것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계곡은 반드시 그에 대해 그르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운운하였으니, 이 역시 자신의 말을 고집하느라 가리키는 것이 미혹됨을 면치 못한 것이다.
장계곡이 “악(惡)이 기(氣)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말이다. 대개 기의 본체로 말하면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반드시 흘러넘쳐 어긋나게 되고 나서야 바야흐로 악한 점이 있게 될 뿐이다. 무릇 기는 선과 악을 겸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오히려 본원(本源)과 말류(末流)를 제대로 따지지 못한 결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곧장 기는 악하다고 하였으니, 의리를 해치고 도(道)를 손상하는 잘못이 작지 않다고 하겠다.”라고 한 데 대한 변론.
“선(善)은 이(理)이고, 악(惡)은 기(氣)이다.”라고 한 말은 과연 원활하거나 주밀하지 못하다. 그러나 계곡이 변론한 것은 그 본지(本旨)를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 무릇 악은 참으로 기가 흘러넘치고 어긋난 소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해 물어 말하기를 “악이 이(理)가 되고 기(氣)가 되는 것을 장차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습니까.”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에 대해 응답하기를 “이것은 기이지 이가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대개 기의 본원은 비록 착하지 않은 바가 없더라도 발용(發用)하는 즈음에 흘러서 악이 되는 것은, 역시 그 이(理)이다. 그러니 어찌 본원이 선하다는 이유로 악을 기의 한쪽 편으로 귀결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봉 노인이 계한처(界限處)에서 말한 것 역시 잘못한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氣)’ 자만을 거론하고, 아래에 나오는 “흘러가서 악이 된다.〔流而爲惡〕”라는 한 구절을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계곡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역시 말뜻에 병통이 있는 것이다.
[주1] 박세채(朴世采) : 1631~1695.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이다. 노론의 송시열(宋時烈), 소론의 윤증(尹拯) 등과 두루 교유하였고,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주2] 횡거(横渠) : 송(宋)나라 신종(神宗)ㆍ철종(哲宗) 때의 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자는 자후(子厚), 시호는 명공(明公)이다. 벼슬은 운암 현령(雲巖縣令)ㆍ지태상례원(知太常禮院)을 지냈다. 저서에 《정몽(正蒙)》, 《서명(西銘)》, 《역설(易說)》이 있다. 도학(道學)이 깊었고, 그의 학을 관학(關學)이라 한다. 《宋史 道學列傳 張載》 《宋元學案 卷17, 卷18 橫渠學案》
[주3] 정성(定性) : 절대적 본체라 할 천리(天理) 즉 성(性)에 입각하여 외물에 끌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송(宋)나라 정호(程顥)가 장재의 정성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 정성서(定性書)에 나온 말로, 일이 지나갈 적에 보냄도 없고 일이 올 적에 미리 맞이함도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지도, 사물의 근원을 앉아서 상상하지도 않는 것이 올바른 마음공부라는 말이다. 《近思錄 卷2 爲學》
[주4] 자사(子思)가 …… 말하였다 : 자사는 공자(孔子)의 손자로 《중용》을 지었다 한다. 중화는 성정(性情)의 덕(德)을 말하는데, 정(靜) 공부를 잘하
張谿谷駁玄繩編辨 南溪朴世采
夫謂已動是情可也。若曰未動是性。則已動之後。便謂無性耶。程伯子言性無內外。旣無內外。則何有動靜。中庸曰。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朱子釋之曰。喜怒哀樂。情也。其未發則性也。由此言之。未發已發。卽龜峯所謂未動已動之分。此豈有可疑者耶。谿谷所引程伯子之說。與此不同。正古人所謂以豎準橫。以橫合豎者也。橫渠先生本以定性未能不動。猶累於外物爲問。其意蓋以性與外物。判而二之。爲不相干涉。其所謂定者。亦欲一定於此。而不應於彼。故伯子解之曰。所謂定者。動亦定靜亦定。無將迎無內外。捄失之言。豈不然乎。夫子思論中和。直指道之體用。故以未發已發爲性情。明道論定性。
欲明體用之一貫。故以性爲無內外。此可謂道竝行而不相悖者也。且子思所謂已發之情。豈能有外於此性。而明道所謂無內外之性。亦豈能漫無動靜之分耶。今谿谷欲以性無內外之故。遂以性不可謂未動。而憂其歸於偏枯空缺。豈其然乎。有人於此。以陰陽是一氣之故。而不欲言兩儀。太極是統體之故。而不欲言各具。則谿谷必以爲非。而今云云。是亦不免於執言迷指者矣。
若曰惡是氣也。十分不是。蓋氣之本。元無不善。必其流蕩乖戾而後方爲惡耳。夫謂氣兼善惡。猶欠 於本末源流之辨矣。今直以爲惡。其害義傷道。非細失也。
善是理也。惡是氣也之言。果未圓活周徧。然谿谷之辨。則失其本旨者多矣。夫惡固是氣之流蕩乖戾之所致。然人有問之曰。惡之其爲理與氣。將何所分別耶。則必應之曰。是氣也。非理也。蓋氣之本源。雖無所不善。而發用之際。流而爲惡者。亦其理也。何可以本源之善之故。而不以惡歸之氣之一邊耶。龜老之言於界限處。亦未有所失。但只擧氣字。而不擧下一節流而爲惡者。故以起谿谷之疑。而是亦語意之不能無病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