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는 권한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는 사람
우리가 주민자치를 시작한다고 하면서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사람이 바뀌는 것보다 먼저, 대표라는 자리의 의미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대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누가 회장이 되는가?”
“누가 대표가 되는가?”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
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주민자치가 제대로 시작되려면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누가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
이 질문이 먼저 나와야 한다.
대표는 권한을 얻기 위해 뽑히는 사람이 아니다.
주민의 재산과 생활을 대신 살펴보고, 주민에게 설명하고,
문제가 생기면 앞에 서서 책임지기 위해 뽑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우리 대표회의가 구성된다면
10명의 대표에게 10개의 역할을 나누어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대표를 열 명의 작은 회장으로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회장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기지 말고, 각 대표가 자기 분야를 공부하고 책임지게 하자는 것이다.
시설을 맡은 대표라면 우리 단지의 시설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
회계를 맡은 대표라면 관리비와 예산, 결산을 주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복지를 맡은 대표라면 경로당과 어르신들의 불편을 살피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홍보와 소통을 맡은 대표라면 대표회의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린이집과 교육·보육 문제를 맡은 대표라면 어린이집 운영자와 주민의 입장을 모두 듣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장기수선과 시설투자를 맡은 대표라면
“좋은 것이니까 하자”가 아니라
“필요한가, 얼마가 드는가, 언제 해야 하는가, 주민에게 어떤 부담이 생기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리고 각 대표는 자기 분야에서 발생한 일을 회장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공부하고 확인하고 의견을 정리하여 대표회의에 가져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회장도 모든 것을 혼자 알아야 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회장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다.
대신 각 대표가 제대로 준비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전체를 조정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직무를 나누었다면 책임도 나누어야 한다.
직무만 나누고 책임은 회장에게 몰아준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시설 담당 대표가 시설에 관한 안건을 검토하면서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 대표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회계 담당 대표가 예산과 지출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면 역시 책임이 있다.
주민에게 알리는 일을 맡은 대표가 중요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자기 직무에 대한 책임이다.
이 책임은 누군가를 벌주자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 있게 공부하자는 뜻이다.
대표가 된다는 것은 명함 하나를 얻는 일이 아니라
주민에게 “내가 이 일을 맡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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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나는 앞으로 대표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그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맡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 일을 맡기 위해 무엇을 공부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
체육시설을 없애고 연못을 만들자는 것처럼 그럴듯한 사업 하나를 내놓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그러나 주민의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유지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기존 시설을 없애면서 생기는 문제는 무엇인지, 5년 뒤에도 필요한 사업인지까지 따져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업을 벌이는 능력보다 사업을 하지 않아야 할 때를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는 욕심이 아니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는 판단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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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
13년 동안 임대아파트라는 이름 아래에서 살아왔고,
이제 우리의 살림을 우리 손으로 운영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제대로 해보자.
대표회의가 구성되면 먼저 각 대표가 맡을 일을 정하고,
그 일을 담당할 사람이 충분히 공부하도록 하자.
그리고 대표회의에서 중요한 안건을 다룰 때는
“누가 찬성했는가?”
보다
“어떤 자료를 가지고 판단했는가?”
를 남기자.
“회장이 결정했다.”
가 아니라
“담당 대표가 조사하고, 대표회의가 검토하고, 주민에게 설명한 뒤 결정했다.”
라는 기록을 남기자.
그것이 훗날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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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대표를 뽑는 일도 선거에서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우리 단지의 어느 일을 맡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표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회장이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맡아 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대표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먼저 잘 만들어 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내가 맡은 분야를 더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경쟁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서로 이기려는 경쟁이 아니라
우리 단지를 더 잘 만들기 위한 선의의 경쟁이다.
대표 열 명이 서로의 자리를 넘보는 조직이 아니라,
열 명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도와주는 조직.
나는 그것이 우리가 처음 만들어야 할 주민자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거창한 사업도, 돈이 많이 드는 시설도 아니다.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
어쩌면 주민자치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권한을 갖는 사람보다 책임을 맡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아파트의 진짜 자치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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