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우리의 역사 “I Can Speak”
때 : 2017년 10월15일 14시15 ~16시: 10분
장소 : 서울 은평구 구파발동 롯데몰 시네마 6관 F 07.08
누가 : 아내와 단둘이서
무엇 : “I Can Speak”관람
이번 달에는 화제작이라는 풍문이 무성한 “I Can Speak”을 보기로 하였다. 집에서 가깝고 다니기 편리함 때문에 구파발 롯데몰의 롯데시네마를 찾았다. 우리가 들어간 시간대는 비교적 한산한 시간이긴 하였지만 예상보다 훨씬 낮은 20여명으로 상영이 시작 되었다. 마지막 나오면서 보아도 30여명 밖에 안 들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영화 줄거리를 중심으로 간추려 보면
꼭…하고 싶은 말이 있고,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온 동네를 휘저으며 무려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어 도깨비 할매라고 불리는 ‘옥분’.
20여 년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그녀 앞에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가 나타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민원 접수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하던 영어가 좀처럼 늘지 않아 의기소침한 ‘옥분’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본 후 선생님이 되어 달라며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둘만의 특별한 거래를 통해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영어 수업이 시작되고, 함께하는 시간이 계속 될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게 되면서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간다.
‘옥분’이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가 내내 궁금하던 ‘민재’는 어느 날, 그녀가 영어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옥분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친구인 문정심과 종종 만나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떠는데, 정심은 원로배우 손숙씨가 특별출연을 하셨네요.
정심은 영어도 잘 하고, 옥분에게 같이 여행 다니자고 하기도 하는데 옥분은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행이 뭔가 의미심장한 여행이라는 느낌이 들죠.
나중에 알고 보면, 정심과 옥분은 소녀시절 일본군 위안부였고 ,정심은 그 억울하고 슬픈 진실을 전세계를 다니며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었고, 옥분은 굳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살고 있어서, 정심이 함께하자고 설득하는 거였어요.
영화는 위안부라는 소재를 겉에 내세우지 않고, 영화 중후반부까지도 숨기고 있다가 정심의 병세가 악화되고 나서야 이 사실을 드러내는데, 이게 아주 잘 짠 플롯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라고 했으면 이런 톤의 영화로 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암튼, 옥분할머니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긴 했습니다.
나이 신경 쓰지 않고 학생들이 다니는 학원도 돈을 내고 다니고 있었는데, 수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까 학원 측에서 그만 나와 달라고 요청을 하기에 이르고, 그런데 그때! 마침 그 학원에서! 고급반까지 마치고 이제 학원을 그만둔다는 민재를 마주치게 됩니다!
옥분할머니는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데, 하지만 민재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도깨비 할매 옥분이 그냥 물러서지 않고 끝내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7급공무원 시험준비 시간을 빼앗은 미안함에 양복을 만들어 주는데, 면접을 보러 가서 양복주머니를 보니 부적이 있고, 뒷면에는 손글씨도 있었어요. 힘내서 면접을 본 민재는 당당히 합격!
다른 나라에서 온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뒤에 옥분이 증언을 하러 나가는데 너무 떨립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하우↘아↗유↘?" 민재의 목소리. 좀 인위적이긴 하지만, 옥분의 증언 가능 여부가 불투명해졌을 때 민재는 할머니가 한번 보여줬었던 위안부 단체사진을 옷장에서 꺼내어 미국으로 날아온 것.
민재의 응원에 힘입어 옥분은 자신감을 되찾고 각오를 한 뒤, 배에 새겨진 고문의 흔적들과 일본군들이 새겨놓은 일본어글자 문신을 드러내며, 위안부였다는 증거가 없다니, 내가 증거라며 한국말로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준비해갔던 영어발표까지 멋지게 마치죠.
현장에 있던 뻔뻔한 일본인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받을 수 없었지만, 대기실에서 로스엔젤레스 아니고 LA에 사는 남동생과 재회하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옥분과 민재가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데, 민재는 7급 공무원이 되어있고, 옥분은 이번엔 샌프란시스코에 증언하러 간다며 오래오래 건강해서 증언하고 다닐 거라고 열심히 파워워킹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수요집회 현장을 매달 한 번씩은 찾고 있을 만큼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것은 고조부께서 한말 마지막 오위장을 지내시다가 신식군대 때문에 쫓겨나셨고, 나중에 임오군란 때에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는 등으로 일본에게 쫓겨 정남진까지 피난을 가셔야 했던 집안의 항일정신이 박힐 수밖에 없는 내력도 있지만, 내가 교감으로 근무하던 일산초등학교에서 1996년 가을쯤이라고 생각 되는데, 교육부위 공문에 의해 위안부로 차출된 학생을 조사하여 보고 하게 되어서 그 당시<1940년대 해방전 무렵>의 학적부를 뒤져서 확인한 결과 16~18명 정도의 어린 소녀들<초등학교 4학년도 2명이 있었음>이 끌려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 하였던 기억 때문에 늘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동안 몇 차례 눈물이 눈을 가려 손수건을 꺼내어야만 하였는데 옆에 앉은 아내에게 미안하였다.
2017.10.16.22:45‘<1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