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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이드 필름 현상해 주실 수 있는 분 있으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항구적으로 간직하기 위해 슬라이드 필름을 만들어 놓았더니, 현상소에서는 인화를 못해
준다 하내요. 너무 시간 소모가 많다고...
그래서 앞으로 인용할 몇몇 사진은 슬라이드 필름을 컴 화면에 비추어 핸펀으로 찍은
것입니다...
러시아를 떠나오면서 마음 속에 두 여인의 눈물을 안고 떠나 온 것 같습니다.
그 중 한분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언어를 가르쳤던 “라이사 알렉산드로브나” 선생님입니다.
사진의 아름다운 여인인데요, 이때는 제가 모스크바를 떠나온 지 3년이 지나 다시 찾아
뵈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말기 암 투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오래전 제자의 연락을 받고 호텔로 오셔서 출장 온
공사 간부들과 환담을 하다 찍은 사진입니다.
떠나갔다 다시 찾아온 사람은 제가 유일하다고 하시면서, 헤어질 때는 나지막하게 대화
중 제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을 지적해 주신 저의 언어 선생님이셨습니다.
호텔에서 가장 좋은 차에 기사에게 팁을 잔뜩 주고,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리라 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떠나시는 뒤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나중 한국에 돌아와 전화를 드리니, 동네 사람들이 화려한 차에서
내려 에스코트 받으며 아파트로 들어가는 자신을 너무도 부러워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1991년 3월 어느 날 선생님을 발쇼이쩨아뜨르(볼쇼이 극장)에 초청했습니다. 가격이
너무 비싸 가지 않겠다는 분을 이미 구한 표를 보여 드리고 저녁에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백조의 호수를 보면서 전혀 슬픈 장면이 아닌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저 역시 이 시대의 상황에 처한 지식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90년 가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극장의 티켓은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2~4루블... 선생님의 월급이 135 루블 정도 되었으니 한 달에 한두번은
공연을 보러 오셨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은 4불 20센트. 즉 120루블이 되었으니,
선생님의 월급을 가지고는 절대 올 수 없는 그 다른 누군가만을 위한 공연장이 되었고,
여기를 찾는 사람들은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선생님보다 훨씬 못한 외국인들이거나
당시의 혼란에서 정보와 물자를 쥐고 러시아 사람들이었습니다.
몇십프로도 아니고, 두서너 배도 아니고, 매우 단기간에 삼십배, 육십배, 심지어 백배
이상 물가가 뛴 것이 상상이 가시나요?
만약 여러분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6개월 정도 한국을 떠나왔다 돌아와 영화관에
가니 영화 한편이 30만원이나 심지어 90만원이 되었다면... 그래서 발걸음을 끊어야
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 또는 어떤 충격을 받으시겠습니까...
러시아 강단에 선 교수들은 자신들의 월급이 매우 작기에 남편이든 부인은 대부분
노동자계급이어야 했습니다. 1달러에 30루블을 기준으로 라이사 선생님(48세)은
4.50센트, 제 과의 정교수님(60세)은 7불을 받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남편은
노동자로 있다 개혁개방의 시기에 맞추어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월급이 1천루블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30불이 채 되지 않은 월급으로는 이전에 들렸던 공연장이나
식당을 갈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단 1년이란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물밀듯이 밀려온 서구의 물자와 사람들로 인해 몇 년간 러시아
사람들은 극심한 절대적,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
이번 소개할 시장은 르이낙이라 불리는 자유시장입니다.
이 시장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러시아 시장을 말할 수 없다 할 정도로 자유시장의 규모와
거기서 팔리는 제품 및 이용자의 수는 절대적으로 다른 시장을 압도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르이낙과 같이 반드시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은 “다차”라는 곳으로 제가 러시아를 오기
전까지 사전적 뜻만 알고 있었는데, 사전에서는 다차=여름별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삶을 이해하는데 이 자유시장과 다차를 모르면, 러시아 삶의 1/2 이상은 놓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유시장은 우리로 치면 한 구에 하나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이 구를 라이온이라
하고, 각 라이온에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자유시장이 있어 보였습니다. 제가 다닌 자유시장은
몇 군데가 되지 않아, 그 수가 정확이 몇 개인지 모르겠으나, 매우 쉽게 어디서든 찾아갈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버스나 뜨람바이(괘도전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자유시장을 자주 갔습니다.
당시 자유시장은 대부분 야채, 과일, 생선, 고기, 반찬 등 식료품을 판매하였으나, 계절에
따라 꽃도 팔았고, 시간이 갈 수록 공산품 특히 옷가게들이 점차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버스나 뜨람바이에 오르면, 미리 사 놓았던 가로,세로 4-5센티 되는 티겟을 각 창문 근처에
붙어 있는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내릴 때 버립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감시원이 타서 조사는
하지만, 99.9프로의 승객들은 알아서 티켓에 구멍을 냅니다. 만약 걸리면 80배의 벌금을
부과 한다고 했지만, 누구도 벌금이 무섭다기 보다는 지켜야할 약속으로 알고 스스로 요금을
정산하는 것으로 있는 내내 느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차비는 버스, 뜨람바이, 지하철 할 것 없이 모스크바 시내 어디를 가든 모두 5 까뻬이까 였습니다.
1루블이 100 까뻬이까 이니까, 1/20 루블이 되겠습니다.
1990년 연말에 한국에서 달러를 구매할 때 1달러가 780원 정도 되었고, 1991년 1달러가
약 27~32루블 이었으니, 5 까뻬이까는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루블=26원. 이것을 20으로 나누면, 1원30전...
즉 모든 교통수단의 1회 이용료가 1원 30전 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인이 러시아에서 누릴 영화(?)가 짐작이 가시나요?
그런데 이 5 까뻬이까라는 운임은 1990년에도 5 까뻬이까였고, 1991년 3월에도, 4월에도,
5월에도 5 까뻬이까였습니다.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발쇼이쩨아뜨르(아무도 볼쇼이라 하지 않아서, 한국에 와서도 볼쇼이라
하면 오금이 좀 저립니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인에, 조금 러시아 스럽게 발음해서 똘스또이라
하면, 이는 뚱뚱하다는 말이기에 딸스또이라 해야 알아 듣습니다. 딸스또이 기념관에 가서
처음 톨, 또는 똘스또이 그러면, 안내원이 바로 “니엣~ 후도이”라고 하는데 뚱뚱하지 않고,
오히려 마른 편이라는 말입니다.)의 티켓을 비롯한 많은 상품의 가격이 수십배가 올랐지만,
시민들이 누구나 사용하는 대중교통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1991년 러시아의 물가 대폭등이 일어난 시기에, 이런 공공물가와 지금 언급할 식료품의 가격은
가장 느리게 올랐고, 그 폭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인플레이션을 이해하는데 있어 첫 번째 특이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러시아가 정치, 경제적으로 대 격변기를 겪을 때도, 러시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감자, 야채
등의 가격을 지켜 준 것은 유통의 핵으로 르이낙이라는 자유시장이 있었고, 여기에 상품을
공급한 다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합니다.
자유시장은 보통 큰 건물 하나와 땅 바닥에 설치한 지붕이 있는 좌판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고, 학교 체육관 몇 개를 합친 규모이며, 지붕이 있는
좌판들도 보통 3평정도의 크기로 수백개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자주 방문한 자유시장은 사실 러시아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가지 말라는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비싸다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대학은 전세계 유학생들의 집합소이고,
특히 유럽과 북미와 일본등에서 유학을 많이 오기 때문에 이런 외국인이 많이 찾는 학교 근처의
자유시장은 비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는데, 물건값이 너무 싸다고
생각되어, 가격을 흥정도 하지 않고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런
먹이감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기에 물건 값이 비싸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비싼 느낌이지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가격 천국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991년 3월 처음 찾은 자유시장에서 구매를 한 것은 정말 먹음직 스럽게 생긴 석류였습니다.
모스크바는 4월 중순까지도 눈이 녹지 않고 있었기에, 석류는 분명 우즈벡이나 타직스탄등
남부지역 공화국에서 올라왔을 것입니다. 10루블 짜리 한 장을 주면서 이 돈만큼 주라 했더니,
1kg이 넘게 달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만원도 훌쩍 넘었을 석류를 단돈 230원에 산 것이죠.
러시아 선생님이 바가지를 써도 크게 썼다고 한 그날의 물건과 값을 적어 보겠습니다.
석류 1kg = 10루블=230원
사과 1kg = 20루블=460원
마늘 한쪽당 1루블씩 하여 10개 = 10루블 =230원
오렌지 1kg =30루블 =690원
달걀 20개 = 17루블= 390원
감자 3kg = 12루블 = 276원
총 99루블 2,277 원을 지불하고, 성인 남성 1명이 보름을 먹어야 하는 식료품을 사왔기에
저는 매우 뿌듯했지만, 본인 월급의 80프로 가까이를 지불하고 온 제자가 선생님은 무척
안타까우셨나 봅니다.
그러나 국영상점에 물건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상황과 나와도 경험삼아 두세시간 줄을 설 수
있을 지 몰라도 1년 남짓 유학생활을 하는 저에게는 시간이 더 중요했고, 가격도 한국 기준으로
십분의 일 또는 심지어 백분의 일의 가격도 되지 않았기에 가장 비싸다는 학교 근처의 자유시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위의 식료품 가격들은 제가 떠나 올 때인 12월 말까지 종류에 따라 2배내지 5배까지 올랐지만,
이는 다른 물가가 오른 것에 비해 사실 올랐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공산품이나 수입품,
외국인이 구매하는 물품이나 이용료는 수십배에서 백배 이상 까지도 올랐기 때문이죠.
자유시장 한 켠에는 트럭들이 와서 각종 야채와 과일을 내려주고 가는 하역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상인들이 물건을 받아 자신의 상점에 물건을 전시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상인들의
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따리를 들고와 상점에서 물건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자유시장을 갈 때마다 저는 우리나라 5일장을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누가 자유시장에 물건을 공급하는가?
종류에 따라 여러 공화국에서도 올 수 있고, 모스크바 근교에 전문적으로 감자나 야채를 기르는
밭도 있었고, 다차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전혀 알 수 없었던...
러시아 사회에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차...
먼저 아래 사진을 보시겠습니다.
목가적으로 보이시나요?
그럼 다음 사진을 보시겠습니다.
고단한 삶이 느껴지시나요?
다차를 한국말로 옮기면, “농경지가 딸린 15~20평 정도의 시골 목재 집” 정도가 그나마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다차는 참 다양한 기능을 그때나 지금이나 러시아 사회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기능은 식량공급과 삶의 휴식공간 제공이라 하겠습니다.
식량 공급원으로서 다차에 대해서는...
러시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금요일 4시30분이 넘어서면 이미 다차로 움직입니다. 러시아에 1
년 남짓 살았고, 이후 24년간 간헐적으로 다닌 러시아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을 위한 다차가 있었습니다.
이 다차에서 봄부터 늦가을 까지 심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심어 지극정성으로 가꿉니다.
교과서에서는 보통 700평 정도라고 말하지만, 각 가정마다 자기들이 경작할 수 있는 땅만큼을
해당 지방관청에서 영구임대 형태로 받았는데, 각 다차마다 경작하는 면적이 달랐습니다.
제가 보거나 방문한 다차는 보통 200평 정도의 밭을 경작했습니다.
비록 국영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지만, 러시아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국영상점에서 줄을 서서
희망하는 것을 원하는 시점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밭을 경작해
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 대부분 크고 작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데, 아파트의 작은 한 공간은 난방이
되지 않는 반 지하구조로 되어 있어, 다차에서 수확한 야채와 과일들을 1년 내내 저장할 수 가 있었습니다.
이러했기에, 러시아에서 구테타가 발생하고, 3일 동안 국영시장의 기능이 멈춰서고, 학교의
빵집까지 문을 닫아야 했을 때도, 러시아 시민들은 식료품 관련해서는 큰 동요가 없었습니다.
다차에서 수확된 경작물은 이웃간에 물물교환도 하고, 시장으로 나와 판매도 되는데, 그 판매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자유시장이었습니다.
정확한 퍼센트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모든 이가 다차에서 경작을 하고 있었으니, 제 눈에는
전 국민이 소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 다차에서 공급되는 막대한 생산물이 러시아가 아무리 어려워도 식료품의 가격이 다른
상품에 비해 가장 안정된 가격을 오랫동안 유지해 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생각합니다.
휴식공간으로서의 다차는...
1991년의 러시아는 자유보다는 감시와 보고가 더 어울리는 사회였습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공연관람들 몇 가지를 말했는데, 선생님의 자문자답은 러시아의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9시가 넘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여기가 905호실이냐 물었을 때,
아닙니다. 여기는 906호실이라 대답하고
문을 걸어 잠글 때 가장 행복함을 느낍니다“
저녁에 찾아오는 사람은 KGB나 경찰이고 저녁에 나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올 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유럽이 대체로 5시가 넘으면 거리가 한산하지만, 1991년의 러시아의 거리는 일반 유럽의 나라보다 훨
씬 더 한산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해방의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다차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차로 와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오순도순 모여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대화들을 나누었고,
아주 작지만, 건식사우나도 만들어 사우나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차는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해방공간이었고, 러시아 식료품의 가격이 치솟지 못하게
막았던 최후의 보루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다른 시장을 언급하기 앞서 소득이 없었던 모스크바 학생들의 당시 삶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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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이 안보이네요~~
잘 읽고있읍니다.. 러시아는 잘 모르지만
중국寧波에서 카페트를 수입하는 친구를 따라 1994년 上海엘 처음 가봤는데,
당시의 상해 재래시장에서 사람주먹 크기 만한 만두를 먹는데,
1불정도로 환전되는 현지통화 금액으로 50여개를 받아서 화들짝 놀란 일이 갑자기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