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옥류동 물
작은 물병 하나 집사람에게 준다. 거기에는 금강산 옥류동 골짜기에서 흐르던 물이 들어 있다.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하며 떠온 물이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 물을 마시며 다시 한 번 금강산을 다녀온 감회에 젖어 본다. 내자는 물맛이 깐깐해 좋다고 한다. 내 입에는 시중에서 사서 먹는 일반 식수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아내가 물병 뚜껑을 닫으며 남은 물은 어머니께 갖다 드린단다. 코끝이 찡함을 느낀다.
금강산의 겨울 이름은 개골산이다. 산은 온통 눈으로 덮였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꽁꽁 언 얼음 밑에 모습을 감추고 가끔 숨쉬기 위한 구멍으로 맑고 투명한 하늘을 안고 있다. 졸졸졸 좔좔좔 물소리는 들리나 물은 보이지 않는다. 크고 아름답고 모양이 기괴한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있다는 생각이다. 그 바위들이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엉키어 동물이나 사람 모양으로 또는 다른 자연의 모습을 흉내 내며 절경을 연출한다. 바위 사이사이 한 줌의 흙이라도 있는 곳에는 금강송이 비집고 뿌리 내려 추위에도 푸름을 자랑하며 위용을 뽐낸다.
온정각에서 목련각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주변에는 붉으면서도 미끈한 금강송이 쭉쭉 하늘로 곧게 뻗어 있다. 성삼문이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라 노래한 소나무다. 남은 사진 한 장을 근거로 최근에 복원했다는 신라의 고찰 ‘신계사’가 단청도 하지 않은 채 말쑥한 차림으로 서 있다. 안내원의 말로는 조계종에서 불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한때는 스님까지 와 있었단다. 지금은 북측 스님이 절 관리를 위해 상주한다.
목련각을 벗어나 조금 오르니 길이 얼어 아이젠을 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하며 계곡 따라 이어진 길을 오른다. 꽁꽁 언 길이 매우 미끄럽다. 조심조심 천천히 걷는다. 가끔 뒤도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가슴에 담는다. 날씨가 어중간해 설화가 활짝 핀 금강산의 겨울 풍광은 볼 수 없으나 흰 눈과 푸른 금강송, 검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며 그려내는 그림이 발길을 옮길 때마다 새롭다.
왼쪽에 ‘金剛門 玉龍關(금강문 옥룡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틈으로 난 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본 설경과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계곡은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다. 흐르는 물 따라 생긴 웅덩이의 얼음이 연두색으로 맑고 투명하다. 넓고 긴 이 계곡이 금강산 옥류동이다.
연세가 지긋한 안노인 한 분이 아들인 듯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미끄러운 길을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구룡폭포를 가려다 도저히 갈 수 없어 돌아섰단다. 안노인의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하다. 곁에서 부축하고 있는 사람이 뭐라 위로의 말을 계속한다. 내려가는 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니 갑자기 요양병원 병상에서 온종일 누워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도 이번 여행이 어머니와 함께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태 전 가을이다. 금강산 옥류동 골짜기 활엽수들이 울긋불긋 물들어 따사로운 볕을 받으며 산들바람에 반짝이고 있다. 계곡 바닥에는 크고 넓은 흰 돌이 오랜 세월 물에 깎여 반들반들했다. 바위가 깊게 패어 웅덩이가 된 곳도 있다. 물이 얕은 곳은 희게 보였으나 웅덩이의 물은 연두색이다. 금강산 물은 지구에서 제일 맑고 깨끗하다고 한다. 그중에도 옥류동 물이 제일이란다. 손이라도 한번 씻고 싶었다. 어디에서 호각 소리가 났다. 북측 안내원이 물에 손을 담그는 것까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계곡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만나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흘러갔다. 물속에 가을 금강산의 그림자와 파란 하늘이 함께 떠내려가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늘 그때의 감흥을 재연하고자 했으나 계절이 허락하지 않는다. 얼음 덮인 골짜기에는 물소리만 정겹다.
‘내려갈 때 옥류동의 물을 병에 담아가야겠다.’ 어머니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 음식도 미음과 음료수 외는 잘 먹지 못한다. 밖 출입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온종일 병상에 있다. 어머니께 금강산 옥류동 물 한 모금 드리고 싶다.
옥류동을 지나 만난 연주담, 비봉폭포, 무봉폭포의 물까지 모두 얼었다. 얼음이 맑고 깨끗해 유리처럼 투명하다. 길에 쌓인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녹지 않은 눈이 작은 알갱이로 굴러다닌다. 최치원이 ‘만 섬의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 하다고 노래했다는 구룡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관폭정’ 정자에 오른다. 웅장한 물줄기가 ‘와’ 하고 요란하게 소리치며 떨어지던 폭포가 조용하다. 물줄기가 얼어 큰 얼음기둥 하나 하늘을 받치고 있다.
옥류동 물은 내 마음대로 담아 갈 수 있을까. 지난번에 왔을 때 손을 씻으려다 북측 안내원의 제지로 물에 손을 담그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지금은 계곡 전체가 얼어 물을 병에 담기가 여간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측 안내원이 제지하면 어떻게 할까.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숨어 있는 ‘상팔담’을 오른다. 자연이 오지 말라고 가파른 절벽이 되어 있는데 사람은 쇠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고 있다. 쌓인 눈 때문에 몹시 힘이 든다. 산 정상은 아니나 ‘상팔담’이란 표지석이 있고 골짜기 아래 가는 물줄기로 이어진 서너 개의 담소가 보인다. 모두 여덟 개로 되어 있으나 한 자리에서는 다 보이지 않는다. 장소를 옮겨 가면서 내려다본다. 저것 중 어느 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목욕하다가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겼을까. 내 생각에 저렇게 맑고 깨끗한 담소라면 어느 곳이라도 좋을 듯하다. 계절은 이맘때가 아니라 늦봄이나 여름이 아니었을까.
내려올 때 옥류동 계곡을 살핀다. 마침 얼음 숨구멍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 물을 병에 담는다. 북측 안내원을 만나면 어머니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인간적으로 이해를 구할 생각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평생 한 번 가기도 어렵다는 금강산을 이번에 두 번째로 다녀왔다. 금강산이 왜 아름다운지 어떻게 아름다운지 이제 겨우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마음 한편 서운하고 아쉬움이 나를 괴롭힌다. 아내가 챙겨 놓은 물병이나 들고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이나 다녀올까 보다. ♡
(2008.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