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 리
(NELLY)/제7회
그렇게 사람과 개가 모두 녹초가 될 만큼 휘 젖고서야 겨우 팥죽 같은 혈변을 주르륵 흘린다.
그것도 갈수록 심해졌다. 변이라기 보다는 피가 썩은 오물같이 비릿하게 역한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혈변이 손등에 묻고 얼굴에 튕겨도 따라다니며 바닥에 신문지를 까느라 야단했지만 곧 카펫까지도
포기해 버렸다.
이런 난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때없이 반복됐다. 아내는 임시 휴가까지 내었다.
나도 지쳤지만, 아내는 지치다 못해 마음까지 내던지는 눈치였다.
넬리가 커가는 사이에
약속은 안 했는데도 식구들은 저마다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분담되었다. 아침에
산책과 용변은 내 차지였고, 먹이는 챙기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
외에 목욕을 시키고 병원에 드나드는 일들은 딸아이가 맡았다. 넬리에게 제일 정성을 쏟기는 딸아이였지만,
넬리가 제일 따르기는 오히려 먹이를 주는 아내였다.
식구들은 모두 지쳐갔지만 오히려 넬리를 돌보는 일은 갈수록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차츰 대화를 잃으면서도 누구 하나 꾀를 부리거나 싫증을 내는 식구는 없었다.
신경은 유리의 파편처럼 파랗게 날을 세웠지만 서로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밤을 지키는
일은 주로 아내와 내가 맡고, 대신 낮에 고생한 아이들은 재웠다. 우리
둘도 한 사람은 소파에 박혀 새우잠을 자다가 증세가 시작되면 허겁지겁 상대를 깨운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눈을 붙이려면 매우 불안해 했다. 아내가 나를 의지하고 싶어 하는 걸 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내가 쓰고 있는 우산 속으로 밀고 들어 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건 영락없는
예전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들과 딸아이 둘만
놔두면 언제 험악한 분위기가 될 지 모른다는 걱정도 기우였다.
아들은 그 동안 넬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딸아이가 보는 앞에서 발길로 툭툭 지르고
‘깽’
소리가 나도록 완력으로 찍어 누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딸아이는 자기가 모욕을 당하듯
도끼눈으로 맞섰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놀랍게도 수많은 넬리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로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있었다. 부모가 사준 게 아니라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샀으니 말은 안 했지만, 사치스러운 데 돈을 낭비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 보았던 디지털 카메라였다. 사고가 나자
다른 식구들이 의아할 정도로 넬리에게 집착하던 아들이 꺼내 놓은 넬리의 사진이었다.
사고가 며칠이나 되었다고 넬리의 생생한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사고를
당하던 날 아침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밖에 있는 식구들을 유리를 통하여 바라보며 뒷발은 앉았고,
윗몸은 바짝 일으킨 뒷모습 사진이었다. 갑자기 그런 넬리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바람이 열망처럼 끓어 올랐다. 나와 아내는 물론이고, 딸아이는 너무나
감동하여 동생의 진심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무심코 넘겼던 아들의 행동도 떠 올랐다.
아들은 개밥으로는 고급인 고기 통조림을 슬며시 사다 놓곤 했었다.
“넬리야,
너 몰랐지? 오빠가 너 그렇게 사랑한 거…….”
딸아이는 엎드려 지쳐있는 넬리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너무나 감동하여 때없이 눈물을 훌쩍였다. 아들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넬리이기 때문에 대놓고는 못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애정을 담았던 모양이다.
그날 밤에 악몽 같던 일이 떠 올랐다. 아들과 딸이 견원지간이 되어 집안 분위기를 흉가처럼
황량하게 만든 사단은 아들의 연행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했다.
애매하게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음날 돌아 온 아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 없었다.
하지만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원래도 침착한 아이였지만 말수가 더욱 적어지고
책상에 앉는 시간이 길어져 모범생의 면모가 확연했다. 사실상 성적도 올랐다. 그만 또래들의 유행은 경멸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부터 아들이 딸아이와 일체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의 방황이 절정에
달해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으로 외박이 잦던 어느날 밤, 갑자기
경찰 두 명이 들이 닥쳤다. 가슴부터 쿵 하고 내려 앉을 이유는 충분했다. 경찰은 무례하지 않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요컨대 딸아이의 방을 수색하겠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투박한 구두를 신고 뚜벅뚜벅 올라오는 모습이 침략자 같았다. 칼부림 사건이었다.
사내놈들 사이의 사건이니 딸아이가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겠지만 공포가 밀려왔다. 수색영장은
내밀지 않았지만 내 쪽에서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때였다. 경찰이 개입되면 내 힘으로는 속수무책이던
딸아이의 방황을 해결할 길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에서였다.
경찰은 주로 전화번호와
메모쪽지를 뒤졌다. 무슨 조직 관계를 알아내려는 의도 같았다. 경찰의 수첩에는 아들의 이름도 있었다. 의아했지만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딸을 구하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은 혐의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지만,
딸아이 친구들 수첩에 아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이해했다. 자다 깬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다음날 돌아 온 아들은 물어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별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웃음기와 밀수가 적어졌다.
첫댓글 이틀 전인가, 아들이 식탁에서 제게 그러더군요.
'엄마, 내가 아직 이렇게 멍쩡하니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요. 어려서 길을 잃어서 영영 미아가 될 뻔한 일부터 엘레베이터에서 떨어진 일, 놀이터에서 떨어져서 이빨이 부러진 일, 유리창에 뛰어들어 머리를 다친 일 등 숱한 사고를 겪으면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란 말에 저도 동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저 애들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사연과 사고를 겪으며 컸을까, 늘 숙연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전쟁이 나 피란을 갔을 때니까 여덟 살쯤?
갯펄에서 조개를 잡다 심심하면 진흙 미끄럼틀을 만들어 배를 깔고 펄 속에 처박히곤 했는데, 그러다 흙 속에 박혀 있던 조개껍질에 배가 갈라져 밸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이 있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었지요.
국민학교 때는 새 둥지를 뒤지려 새까만 나뭇가지 끝으로 기어가다 떨어져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지요.
뒷산에는 국학대학을 지을 때여서 바위들을 깎고 있었는데, 숱하게 많은 다이너마이트 구멍을 파놓고 연결해 놓은 전깃줄을 훔친다며 밤이면 기어가 성냥불로 태워 줄을 자르기도 했었지요. 구멍 속에는 화약이 잔뜩 잔뜩씩 들어 있었는 게 보이는 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