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자재(無碍自在)의풍자시인 김삿갓
영월 김삿갓 유적지
烏巢獸穴皆有居(조소수혈개유거) : 새들이며 짐승이며 다들 돌아가 쉴 집이 있건만
顧我平生我自傷(고아평생아자상) : 나를 돌아보니 일생이 상처 투성 이구나
芒鞋竹杖路千里(망혜죽장로천리) : 짚신과 대지팡이로 강산을 헤매었으니
水性雲心家四方(수성운심가사방) : 물길 닿는대로 구름 흐르는대로 천지가내집이었네
김삿갓의 '漂浪一生嘆(표랑일생탄)'이라는 시다.
천지를 내집처럼 평생을 짚신과 대지팡이로 강산을 헤맨 방랑시인 김삿갓은 지금 영월 하동면 와석리에 영면해 있다. 그의 문학세계와 시대정신을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에는 그의 묘와 생가를 비롯해 시비와 문학관, 문학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문학관 내에는 그의 친필과 장원급제 시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그의 해학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김삿갓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했다는 자책감에 22세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시대상을 반영한 수많은 시들을 남기고57세(1863년)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일명 '김삿갓 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함께 기암괴석이 산재해 있어 탄성을 자아낸다. 가을철 계곡 주변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단풍도 일품이다. 그가 생전에 이곳을 '무릉계'로 부른 이유다.
樂莫樂兮新相知(낙막낙혜신상지) :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悲莫悲兮新別離(비막비혜신별리) : 새로운 친구와 헤어지는 것보다 큰 슬픔이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바위를 베개 삼아 전국을 떠돌며 수많은 풍자시를 남긴 천재시인 난고 김병연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봄으로써 새로운 친구를만들어보자.
방랑 전까지
김삿갓은 평생 권력을 풍자하고 민초들의 삶과 현실을 표현한 시를 남기며 낙엽 흩날리는 굴곡진 산길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1807년(순조 7년) 경기도 양주에서 명문 안동 김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다섯 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의 천재였다.
훗날 그는 "스스로 알고자 하면 늦게 알게 되고, 도움을 받아 알고자 하면 빨리 알게 된다"고 갈파했는데, 기록을 보니 그는 스스로 빨리 알게 된듯하다.
이후 그의 집안은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농민군에 투항하여 역모 혐의로 참형을 당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흔히 알려진 얘기로는 과거에 응시한 그가 '김익순의 죄를 논하라’는 시제에 대해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비판했다가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고 자책과 번민에 방랑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과거 시험 답안지에 부친 이름까지 적어야 할 만큼 가문을 중시하던 그 시대에 천재인 그가 다섯 살 때 죽은 할아버지 이름도 모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국 역적의 후손이라는 부끄러움에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방랑생활
嗟乎天地間南兒(차호천지간남아) : 슬프도다! 온 세상 남자들이여
知我平生者有誰(지아평생자유수) : 내 평생 지내 온 일 알아줄 이 그 누구인가
萍水三千里浪跡(평수삼천리랑적) : 삼천리강산 부평초같이 떠돌면서
琴書四十年虛飼(금서사십년허사) : 거문고 따라 시 읊던 40년 허사로다
김삿갓이 지은 '자탄(自嘆)'이라는 시다.
20세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쓰고 지팡이를 벗 삼아, 술을 벗 삼아, 하늘을 지붕 삼아, 석양에 비치는 산그림자를 노래하면서 방랑길에 올랐다. 한 조각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일생을 방랑하며 파격적인 해학시를 읊으면서 슬픈 일생을 보냈다.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산수를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로 한세상을 떠돌던 방랑시인 김삿갓. 뜬구름과 바람처럼 정처 없었던 그의 삶의 궤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략 금강산부터 전남 화순에서 객사할 때까지 35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수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그가 친구집에 잠시 쉬어갈 때다. 그가 떠난 뒤에 밥을 먹으려고 친구 부인이 파자로 “인량차팔(人良且八)" 하자 남편이 "월월산산(月月山山)"한다. 그러자 그는 "견자화중(犬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다”하고 껄껄대며 그 집을 나섰다. '人良且八'은 식구(食)이니 밥상 차릴까요 란 뜻이고, ‘月月山山은 ‘붕출(明出)'이니 '이 친구 나가거든'이란 뜻이며, 그가 한 말은 '저종가소(猪種可笑)'니 '이 돼지 새끼들아, 가소롭다'는 뜻이다.
풍자시
김삿갓은 기구하고도 기이하게 살다 갔지만 조선 후기 문학에 작지만 뚜렷한 한 획을 그었다. 천재시인, 민중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전형적인 한시의 주제와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으로 민초들의 삶을 현실적이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정해진 길 대신 방랑의 길을 택한 그의 여정을 닮은 것이다.
1천여 편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시 중 현재까지 약 450여 편의시가 전해진다. 이는 일제시대 때 월북 작가 이응수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그의 시들을 모아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그의 시집을 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세상을 조롱하면서도 뼈가 있는 뜻을 담아 풍자와 해학이 주는 웃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도 사회의 수많은 모순,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중에서 먼저 이중적인 표현이 일품인 '스무 나무 아래(二十樹下)'라는 시를 본다.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삽십식) :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다음은 김삿갓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기생 가련(可憐)에게 얼마간의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녀에게 적어주었던 시를 본다. 이름 '가련'과 형용사 '가련'을 교묘하게 섞어서 적은 게 일품이다. 결국 그도 한 여인에 정을 품었던 남자였다.
可憐行色可憐身(가련행색가련신) : 가련한 몰골의 가련한 이 몸
可憐門前訪可憐(가련문전방가련) : 가련의 문전에서 가련을 찾네
可憐此心傳可憐(가련차심전가련) : 가련한 이 심사 가련에게 전하니
可憐能知可憐心(가련능지가련심) : 가련은 능히 가련한 이 맘 알리라
무애자재(無碍自의 선(禪) 시인
生年不滿百(생년불만백) : 백년도 다 못 사는 주제에
常懷千歲憂(상회천세우) :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살아 숨 쉰 방랑시인 김삿갓.
靑雲灘力致非願(청운난력치비원) : 청운의 꿈 억지로 안 되니 원치도 않고
白髮惟公道不悲(백발유공도불비) : 백발은 공평한 길이니 슬퍼하지도 않네
驚罷還鄕夢起坐(경파환향몽기좌) : 귀향의 꿈꾸다가 문득 놀라 깨어 앉으니
三更越鳥聲南枝(삼경울조성남지) : 한밤중 공작새 소리 남쪽에서 들려오네
그는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화순에서 객사하는데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모셔진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시인이자, 모든 욕망을 초월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선(禪) 시인 김삿갓.
渴時一滴如甘露(갈시일적여감로) : 목마를 때 한잔 술은 단 이슬과 같으나
醉後添盃不如無(취후첨배불여무) : 취한 뒤에 또 마심은 없느니만 못하다.
酒不醉人人自醉(주불취인인자취) :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취하고
色不迷人人自迷(색부미인인자미) : 색이 남자를 미혹케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미친다
그가 지은 '(주색)'이라는 시다.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며 살라는 경구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경구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다.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