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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고전 』 중에서
공정한 행위를 위한 사회 계약
존롤스 <정의론> l971년
현대 미디어 사회에서는 인간처럼 책도 문제가 된다 책은 주목을 끌어야 하며, 가능한 한 눈에 띄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기대에 찬 관객에게 놀랄 만한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으로 믿게 해야 한다 그리고 관객이 그러한 것을 결코 스쳐 지나갈 수 없도록 해야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일이 없다. 광고를 독자적인 산업으로 만든 광고 업자들은 책이 세상에 나와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한다. 더군다나 작가가 매체 이용에 능숙하고 텔레비전에 적합한 인물이라면, 그는 토크 쇼나 난상토의 , 문화적 행사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철학 저서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철학 저서도 광고 산업의 생산물이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세기 중반 이후 모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철학 작품으로 생각하는 책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맨 처음에 마치 '아센푸텔(그림 형제가 쓴 동화의 여주인공. 신데렐라와 같은 존재)'처럼 국제적인 철학적 토론의 장에 등장했다. 그 책은 명망 높은 하버드대학의 출판사에서 1971년에 출간되었는데, 소박한 녹색 표지에 수백 장에 이르는 두꺼운 외형과 약간은 건조하고 현학적인 영어로 씌어진 책이었다. 따라서 그 책은 전형적으로 잘 팔리지 않는 책의 모든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광고나 선전, 명성 들을 싫어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책 표지와 신문 기사에서 항상 같은 모습을 한 그의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뿔테 안경을 걸친 깡마른 전형적인 교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의론>이 발간되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이 책과 씨름을 벌인 논문만 2,000개가 넘었다. 롤스의 책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확고한 지반을 형성했다. 이 책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 논증을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정치철학의 영역에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금세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롤스가 이 책을 통해 또 다시 모든 문화와 시기에 타당할 수 있는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드디어 롤스를 통해 현대까지 이르는 철학사에 영향을 끼쳤던 정의에 관한 다른 이론, 즉 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정식화시킨 이상 국가론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엄격하게 구분된 세 개의 계급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각자가 자신의 것을!’·이라는 플라톤적 정의론의 기본 정식에 롤스는 '공정성으로서 정의'라는 주장을 대립시킨다. 롤스에게는 플라톤처럼 국민의 요구로부터 지켜내야만 할 국가의 안정성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침해될 수 없는 권리라고 표현되는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길 원했다. 서구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원칙들은 사회 복지 국가의 업적들과 결합해야만 했다
롤스는 사회를 공정한 행위의 원칙에 기초한, 시민 모두를 포괄한 사회 계약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했다. 롤스는 사회 계약론의 새로운 형식을 통해 20세기에 인간의 권리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정의론>은 계몽주의 시대에 생겨난 정의에 대한 이해 , 즉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는 유명한 구호들로 표현되었던 것에 새로운 이론적 면모를 부여했다. 인간의 기본권은 포기될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이미 미국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존 롤스도 인간은 선하며 정의로운 세계는 가능하다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세계관과 정치에 관한 물음들을 제기했다. 그의 부모는 시민의 권리를 위한 봉사에 참여했는데, 롤스의 어머니는 여성 권리운동에 참여했고,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는 민주당의 추종자였으며 메릴랜드주 지사의 측근이기도 했다. 잇 남부의 경계 지역인 이곳은1861년에서 1865년 사이에 일어난 남북전쟁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남북전쟁에서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의 지도로북부는 노예 해방을 위해 싸웠다. 시민의 권리를 위해 싸운 선구자로서 링컨은 롤스에게 평생 동안 모범이 되었다. 롤스는 인종, 출신, 종교 또는 그 이외의 것들에 근거를 둔, 소위 '출생'에 근거한 불평등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립학교와 엘리트대학교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문제와 사회적 기득권의 분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2차 세계대전은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그는 프린스던 대학교에서 학사를 마친 후 1943년에 군인으로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졌다 미국이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여했을 때, 그는 비록 미국의 전쟁 참여에 대한 정당성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행위를 아주 정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 1946년부터 롤스는 프린스턴대학교와 코넬대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계속했고 1950년에 철학박사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이미 그의 관심의 중심에는 윤리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앵글로 색슨 국가들에서 분식철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에 철학의 방향은 언어의 정확한 관계와 철학적 개념과 논증들에 대한 '분석'에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 롤스도 정확함과 신중성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구성하는 것을 배웠다는 점에서 분석철학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확성과 신중성은 이따금 독자들에게 너무 까다롭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롤스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경험적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정확함을 우선시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롤스는 자기 연구의 내용과 방향에 관련해서는 분석철학으로부터 영향을 적게 받았다. 분석철학은 규칙과 가치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천명하고 도덕적 개념과 평가가 가진 의미에 대한 연구에 스스로를 국한했다. 그러나 롤스는 형식에서 내용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는 우리 인간들 사이의 행위와 사회적 행위를 규정하는 도덕적 원칙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동시에 그는 무엇보다도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덕 이론인 공리주의와 대결했다. 공리주의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벤담과 밀에 의해 창시되었다. 라틴어 'utile(유용한)'에서 나온 공리주의는 행위의 규범들이 유용한 것으로 드러나면, 즉 행위의 규범들이 공동의 이익에 봉사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공리주의는 항상 행위의 결과에 주목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러한 결과는 '개개의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벤담이 도덕적 행위의 목적과 척도는 '최대다수의 최대 이익'이라고 정식화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다. 롤스도 처음에는 공리주의와 가까웠다. 그의 이론은 수 차례 개별적 단계를 거치면서 공리주의의 확장으로부터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했던 2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생겨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단지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 속에서 항상 지속적인 사유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벤담, 밀과 더불어 공리주의의 세 번째 대표자로서 헨리 시지윅은 롤스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윤리학의 방법'』에서 도덕적 원칙들은 상식 , 즉 건강한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며 단지 공익의 양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의롭고 공정한 분배에도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롤스는 시지윅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선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일상적 상황과 지각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그는 처음부터 어떻게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말해 우리가 특정 행위들이 사회에 좋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척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연구했다. 롤스는 초창기 논문에서 각각의 도덕적 문제를 '충분히 숙고된 도덕적 판단'들에 의지한 '전문적인 도덕 판단자'가 해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영국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해에 그는 모델 상황, 즉 사람들이 자신을 도덕적 판단자로서 투영시켜 생각해야만 하는 상상된 입장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는 그러한 입장을 '원초적 입장'이라 불렀고 독일어로는 '원초적 상태'라고 번역했다. 도덕적 결정을 해야만 하는 인간은 평등한 토대 위에서 도덕적 판단을 위한 규칙과 척도 들에 대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 속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해놓고 생각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규칙과 척도 들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받아들여져야만 하며 또한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롤스는 공리주의의 순수한 이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떤 한 행위는 우선 그것의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인정된 규칙들에 따른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검토되어야만 한다. 롤스는 1955년 자신의 논문 “규칙의 두 개념” 에서 그가 주장하는 규칙이 어떠한 종류인가를 명확하게 밝히고자 시도했다. 그것은 소위 '사회적 실천'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는 규칙을 모든 사회에 도입해 우리에게 규정된 상황 속에서 규정된 행위를 하도록 하게 하는 행동 양식으로 이해했다. 내가 누군가와 계약을 체결하고 난 다음 계약 체결의 결과나 유용함이 갑자기 의심스럽다고 해서 간단히 계약을 폐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계약이 이행될 수 있는 게임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롤스는 일종의 '규칙 공리주의'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의 행복은 이성적인 사회의 규칙 체계의 준수에 달려 있다. 롤스는 이제 최종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 문제 , 즉 정치 및 사회철학의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를 사로잡은 주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 사회의 정의 (正意)는 어떻게 정의 (定義)될 수 있을까? 공리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한 사회의 정의를 어떻게 종속시킬 수 있는가?" 롤스는 가능한 한 커다란 사회 전체의 복지를 축적하는 일과 우리의 정의감이 무조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공리주의적 척도에 따르면, 예를 들어 소수가 매우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다수가 거의 소유한 것이 없는 경우나 노예 노동을 통해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경우를 철저하게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롤스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귀결을 배제한다. 그에게 정의란 모든 시민들의 존엄성이 소위 전체의 행복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롤스는 각각의 시민들이 지닌 침해될 수 없는 권리나 사회적 권익 보호에 관해 충분히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는 공리주의와 결별한다. 이제 그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각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욕구를 적절하게 고려할 수 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어떻게 이론적인 기초를 세울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원초적 상태에 관한 모델로부터 공정을 위한 척도들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57년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논문에서 그는 이러한 모델을 결정적인 초석으로 삼았다 정의의 원리들에 관해 원초적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무지의 베일'의 상태에서 행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원초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사회에서 차지하게 될 어떤 위치, 즉 성공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의 위치를 모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행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이미 1950년대에 이러한 기본 이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점차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1962년에 하버드대학은 교수가 되었고 그 근방의 렉싱턴으로 이사한 후에, 마침내 자신의 『정의론』에 대한초고를 완성했다. 그의 삶은 외적으로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롤스는 저술과 학문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조용한 생활을 했다. 1960년대는 그의 저서가 탄생하기 위한 결정적인 10년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해가는 초고를 대학의 세미나를 위한 강의안으로 반복적으로 이용했다 미국과 다른 서구 나라에서 학생 운동이 정점에 다다르고 마르크스주의가 대학의 정치적 토론을 지배했으며 베트남 전쟁이 가장 고조된 시기에 그의 『정의론』이 완성되었다. 롤스는 저서에서 사회의 근본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그가 볼 때 세계의 인식을 위해서는 진리가 근본적이듯 인간의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는 정의가 근본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들에 속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깊이 자리잡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 것이다.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상태는 기존의 부정의가 제거될 수 있을 때에만 변화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여겨지는 이론은 새로운 이론을 통해 오류의 수가 감소될 때에만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롤스에 따르면 정의는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학에서 정의와 선(善)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분명하게 정의의 편을 든다. 공리주의는 정의로운, 즉 올바른 행위는 선, 즉 좋은 행위를 통해 단지 사회의 '기본구조'를 규정해야만 하는 기본원칙들만이 확정된다고 한다.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롤스 역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존재이기에 이성이 제한 없이 효력을 발휘하는 상태에서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기본 원칙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삶에 타당성을 지닌 척도를 합리적 숙고를 통해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롤스가 생각하는 이성이란 무엇보다 '목적 합리성'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미리 주어진 목적을 위해 최선의 수단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은 훌륭하게 질서가 잡힌 사회이다. 이 상상된 원초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전제조건들을 가지며 결코 외적인 강제를 당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나 동시에 그러한 이익 추구가 오직 사회적 구조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들 모두는 '무지의 베일' 아래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자신이 사회에서 성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실패를 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롤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정도로 정의된 원초적 상태는 확실히 사람들로 하여금 비당파적이고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려하게 만든다. 롤스는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연결해줄 끈을 만들어냈다 나 역시 사회적 약자의 역할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항상 사회적 약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나는 어느 누구도 사회에서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에 관심을 갖는 일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롤스에 의하면 원초적 상태는 '숙고의 균형'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각각의 참여자들이 상황에 맞추어 갖게 되는 정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사이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원초적 상태에서는 단순한 의견과 확실한 숙고를 분리해내고 확실한 숙고 가운데 공동적인 것을 가려냄으로써 개별적 이익과 전체적 이익을 결합시키려 한다. 롤스는 상호 대립적인 이익과 숙고를 검토할 경우 최소 위험의 전략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여기에서 경제적 결정 이론의 도움을 받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주식을 사고자 한다면, 주식을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주식을 산다고 한다면, 그러한 경우에는 급격한 주가의 상승이나 갑작스러운 하락의 위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위험 부담을 안고 주식 투자를 할 수도 있는데, 그때에는 엄청난 이익이나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첫 번째의 전략을 '최소의 극대화'로부터 도출되는 '최소극대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것과는 반대로 내가 나중에 빈손이 필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가장 커다란 이익을 얻기를 바라며 투자하는 것을 '최대극대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롤스에 따르면 인간은 원초적 상태에서 최소화 전략을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중에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놓이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그러한 원칙을 선택하게 된다. 롤스는 이것으로부터 두 개의 유명한 정의의 원칙에 도달하게 된다
"1. 각각의 인간들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장해 주는 (사회의) 전체 시스템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이 권리는 모든 사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어야만한다. a) 그러한 불평등은 '저축 원칙'의 제한 아래서 (사회적으로) 최소수혜를 받는 사람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어야 한다. b) 그러한 불평등은 공정한 기회의 균등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 직책과 결합되어야만 한다. "롤스는 첫 번째 원칙으로 고전적 자유주의에 의지하고 있다. 모든 시민은 다른 시민과의 자유와 일치할 수 있는 한에서 기본적 자유권과 시민권에 대한 최대의 원칙을 요구한다. 이러한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는 모두에게 동등해야만 하며 침해될 수 없다. 두 번째 원칙에서는 물질적 재화의 처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정의의 두 관점을 다루고 있다. 그 두 관점은 특히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분배의 정의'와 모든 시민에게 교육과 사회적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의 정의'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평등과 박애라는 옛 가치가 다시 문제된다. 롤스에 의해 새롭게 강조된 것은 2a에 등장한 소위 '차등의 원칙 혹은 '구분의 원칙'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서 사회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반대로 항상 판단의 결정적 기준으로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주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한 기준 안에서 '최소극대화전략'과 사회 국가의 이념이 실현된다. 만약 내가 두 개의 사회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면, 즉 내가 매우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빈곤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사회와 다른 한편으로 재산의 양이 제한되어 있지만. 가난한 자를 위해 사회적 안전 장치가 훌릅하게 정비된 사회 중에서 하나를 결정한다면, 나는 후자의 사회를 결정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최상의 사회적 안전 장치가 보장되는 사회가 선택될 것이다. 롤스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지 않지만, 박애의 의미에서, 가난한자들이 항상 사회 전체의 부로부터 이익을 얻어야 하는 사회를 주장한다. 그는 부자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장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배려가 항상 나아져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롤스는 기회의 균등과 보장된 박애만으로는 사회가 정의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건강이나 지능과 같은 성질을 우리는 업적으로 간주할 수 없다. 출생과 배경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항상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정치 체제에 대한 경험은 정의에 대한 상이한 주장들이 서로 충돌해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사회적 부정의를 참아낼 때, 자유의 원리는 종종 제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사회 정의는 종종 자유의 제한을 통해서만 획득되기도 한다. 또한 사회 복지국가의 조치들은 항상 경제적 효율성의 침해를 가져왔다. 생겨날 수 있는 이러한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롤스는 자신의 정의론의 다양한 원칙들에 분명한 순위를 매긴다. 우선 그러한 순위를 통해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현실화된다 소위 '우선 순위의 규칙'이 그러한 것을 위해 사용된다. 그는 근본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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