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번째 이야기 - 책을 왜 읽으시나요?
7시부터 9시까지 두시간의 빡센 토론이 끝나면 우리는 어김없이 뒷풀이를 했다.
공부방 옆 카페 1994.
차를 주문하면 양껏 빵을 먹을 수 있는 카페에서 접시에 쌓을 수 있는 만큼 빵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다음(두번은 담을 수 없으므로) 네버엔딩스토리를 이어갔다. 어떤 때는 주인장 먼저 퇴근 시키고 불꺼진 카페 정원에서 철 이른 모기떼를 휘휘 쫒아가며 새벽까지 앉아있었다.
할 말이 많아서 였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좋으니 헤어지기 싫고 그래서 할말을 핑계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체면치레를 하고 살아야할 연령대의 사람들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수북이 담은 공짜빵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며 행복한 표정으로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속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속세에서 비켜난 생각을 하려 노력하는 사람들.
내가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처음 뒷풀이 때를 기억한다.
아직 낯이 설어 조심스럽고, 그래서 서로 존댓말 챙겨서 할 때 였다.
약간은 어색한 첫 뒷풀이 자리에서,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 책을 왜 읽으시나요 ?그니까 여러분에게 책은 무엇인가요?>라고.
무슨 말이 오갔는 지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지만 대략의 내용은 기억한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더불어 무척 똑똑해서 만 5세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는 B.
나중에 인생의 책 목록을 말할 때 B가 1순위로 꼽았던 책은 어릴때 읽은 <원색생물학습도감>과 <구약성경>이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잘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H. H는 책을 통해 삶의 위로를 얻고 공부가 삶의 힘이 된다고 했다.
몇 년간 뇌과학을 공부했다는 H는 판타지 소설 마니아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로 통치는 <반지의 제왕>같은 것을 H는 책으로도 섭렵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반지의 제왕도 시리즈별로 내용이 뒤섞여서, 반지랑 주인공이 어떻게 됐는 지 지금 잘 모르겠다.
K는 천편일률적인 다른 모임과 달리 책 읽기 모임이 주는 재미와 보람이 있다고 했다.
짐작컨대 다른 사람은 물라도 K는 천편일률적인 다양한 모임에도 종종 참석한다는 느낌을 그때 받았다. 아닌게 아니라 한동안 K는 카라를 바짝 세워서 목을 감싸는 골프 웨어를 입고 토론에 나오기도 했다.
나는 뭐라고 했더라. 아마 책 만한 친구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지, 얼마나 많은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지. 가성비 최고이지 않은가. 싫으면 잠시 덮어도 되고.
공교롭게도 우리중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N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빙긋이 웃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16년 3월부터 5인 체제로 시작한 고전읽기.
한 달에 두 번, 격주로 모이기.
처음 읽은 책은 데이비드 흄의 <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서양 철학의 시작을 앞부분 다 잘라먹고 덜컥 근대철학으로 시작한 무모한 도전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희안하게도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들이 철학책 속에 들어있으면 그 의미는 개념의 틀안에 갖혀버린다.
어색한 침묵을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며, 우리들은 과묵하게 말을 아끼며 누군가가 먼저 토론의 먹잇감을 던져주기를 바랐다. 아무도 먹잇감을 던져주지 않을 때는 우리 스스로 먹잇감이 되면 된다.
몰라서 공부하는 건데 쫌 무식하면 어떻고 핵심을 비켜가면 어떤가.
철학이며 사상이 신성불가침의 영역도 아니고, 무엇보다 철학과 사상에 정해진 답이 어딨나.
구루프로 잘 말아낸 금발 머리 가발을 뒤집어쓴 후덕하고 귀티나게 생긴 흄은 소유권의 법적 보장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박식한 N은 소유권 보장이 갖는 사회사상적 의미를 강조했고, 꼬장한 나는 이 귀족 남자가 왜 소유권의 법적 보장을 처음 주장했는 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아닌데, 상충은 커녕 토론을 풍부하게 하는 보완재인데, 우리 둘은 종종 이런식으로 티격태격 했다.
공부방법의 차이, 즉 공부 마인드의 차이 때문이다.
텍스트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이면을 보려는 사람도 있다.
텍스트에 집중하는 사람의 지식전달에 그 이면을 보려는 사람은 늘 <근데 있잖아요 질문있는데요>를 외치게 된다.
두 달, 총 4회에 걸쳐 흄 읽기가 끝났다.
두 달간 우리는 당연히 총 4회의 뒷풀이를 하며 수많은 얘기들을 쏟아내며 돈독한 정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정만 쌓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