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 임꺽정 탄생의 시대상
임꺽정의 활동은 1559년(명종 14) 3월부터 그가 처형당한 1562년(명종 17) 1월까지 3년
이상 황해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다. 그의 활동은 그 기세가 엄청나서 가히 반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이처럼 임꺽정 일당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의 정
치 기강 문란과 군정의 해이로 인한 농촌사회의 피폐, 자영농민의 몰락해가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6세기(중종-명종-선조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도시화가 진전되고 훈척이나 지주세력들
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기존의 경제활동이 미미했
던 지역을 개발하고 수탈하려는 욕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정치, 군
사적인 이유로 경제활동이 통제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새롭고 주목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이 지역에 쌀 거래를 금지하고 소금의 생산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16
세기부터 그것이 허락되자 훈척 세력들은 이 지역의 개간과 이권을 독점하여 수탈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해변의 이생지(개펄
이 모여 평야가 된 땅)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땅이었는데, 권세 있는 훈척 가문
들이 이를 모두 빼앗아 점거하였으므로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심화되었다.
당시에는 수령들의 가렴주구도 심하였다. 중앙의 훈척 고관들은 부패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하였므로, 지방의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신들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관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의 길마저 막혀버리기 때
문이었다. 특히 윤원형과 심통원은 외척의 명문 거족으로서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정에 이와 같은 대도가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하급 관리와 수령들도 덩달아 휩쓸려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저마다 남에게 뒤질세라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여졌다.
이렇게 훈척 세력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악함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리게 되자, 백성들은 호소할 곳도 없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워 도적이 되게 마련
이었다.
글 이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