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인사말을 하다가 “이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도 많이 있다”면서 김정하 전도사 이야기를 꺼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구두를 닦아서 번 돈을 가지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고….”
올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인사말을 하다가 “이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도 많이 있다”면서 김정하 전도사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얼마 전 김정하 전도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구두를 닦아서 번 돈을 가지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고, 실직자, 알콜중독자, 조손가정을 도와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갑자기 찾아온 장애 가운데서도 ‘장애인의 마음까지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 전도사님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김정하 전도사는 경기도 성남시에서 상가 건물 한 칸을 빌려 목회를 하고 있다. ‘샬롬교회’라는 교회 간판은 그리 세련되지 않아서 오히려 주변과 어울린다. 길가의 낡은 건물이다. 2층의 당구장을 지나 3층으로 오르면 김 전도사의 살림집을 끼고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다. 김 전도사의 말은 어눌하다. 최근에 알게 된 루게릭 병 때문이다. 김명민이 주연을 맡은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명민이 앓던 바로 그 병이다.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사멸시키는 치명적인 병인데 현대의학이 아직 닿지 못한 미답의 병이다.
누가 보더라도 장애인인 김 전도사는 그러나 여전히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치료를 받으며 건강해지기를 소망한다. 어눌한 그의 설교는 오히려 진심을 전하기가 쉬워 오랫동안 하나님을 반목하던 이들이 김 전도사와 만나면 비로소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가 전하는 복음도 그렇게 힘이 있어 요즘같이 ‘하나님’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든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하나님을 주목하게 만든다.
김 전도사는 올해로 53세이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만 일곱 번, 그만큼 죽음의 고비를 넘겨왔다. 세 차례나 연탄가스에 쓰러졌고, 교통사고도 당했고, 전기에도 감전되었고, 폐결핵도 앓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루게릭 병까지 앓고 있다. 이런 세월을 살면서 그는 오히려 굳센 정금으로 정제되었다. 하나님께 유익한 종으로 다져진 셈이었다. 고비마다 순종하는 삶이 빛나고 굳센 믿음이 드러났다. 그의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는 그런 감동이 가득하다.
01
김 전도사의 이력 가운데는 ‘구두닦이’의 시간이 있다. 2006년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곧 한국컴패션을 통해 부르키나 파소와 에콰도르의 어린이를 후원하였는데, 몇 년 뒤 다시 다섯 어린이를 후원해야 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형편으로는 둘도 버거웠다. 쌀이 떨어지고 신문도 끊었으며 아이들을 위해 받던 우유도 끊었다. 그러나 주님은 ‘도우라’ 하시는 듯했다.
신문을 배달할까? 우유를 배달할까? 폐지를 모아서 팔아볼까? 그렇게 도울 방법을 찾다가 김 전도사가 선택한 일이 구두를 닦는 일이었다. 군대에서 고참의 구두를 많이 닦아서 이력이 난 실력이었다. 루게릭이 진행되면서 팔이 조금 아픈 것 외에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구두닦이 일이 페루, 인도, 볼리비아, 콜롬비아, 케냐의 다섯 어린이를 위한 후원금을 만드는 수단이었다.
02
샬롬교회는 성도들이 많지 않지만 서로 약한 데를 나누어 사랑으로 보듬으며 형제들처럼 살아간다. 서로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예쁘기 그지없다.
어느 날 수요예배를 드릴 때 김 전도사의 아내인 최미희 씨는 엉뚱한 기도를 드려야 했다. “주님, 오리 바비큐 한 마리만 포장해서 배달해 주세요.” 그렇게 식당에서 주문하듯이 기도하기는 처음이었다. 다른 교회의 권사님이 가끔 보내서 얼마나 맛난지 잘 알았다. 첫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어느 집사님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였다. 분만예정일을 일주일 이상 넘겨버린 집사님은 빈혈도 심했다.
운동 삼아 40분을 걸어서 수요예배에 나온 집사님의 등에선 땀이 흥건하였다. 왜 마음이 아팠을까. 그래서 구했다. “제 주머니 사정을 아시는 주님. 오리 훈제고기 한 마리만 보내주세요. 우리 집사님에게 힘내라며 먹이고 싶어요.” 직접 사서 줄 형편이 못되는 게 그렇게 송구스러울 수 없었지만 염치 불구하고 그리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마칠 무렵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오리 바비큐 한 마리를 배달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어느 분이 전도사님 집에 배달해 달라 했단다.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그거 우리 거 아니에요. 아무개 집사님 댁에 보내세요” 했다. 친정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더 쓸쓸했을 집사님의 첫 출산은 다행히도 그날 밤에 오리 바비큐 한 마리를 먹고, 다음 날 예쁜 공주를 순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김 전도사의 삶에선 흔하게 일어나는 소중한 기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날 밤 김 전도사네 가족들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웠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들은 그렇게 삶 속에서 누려왔다.
03
김정하 전도사에게 아내와 두 아이는 누구보다 믿음직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온 세월은 남들처럼 갖출 것 다 갖춰서 얻는 평화를 베풀지 못하였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신 기쁨에 비할 수 없었다.
오두막에서 살아갈 때 지네에 물린 아이를 부여안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입었고, 큰 산불이 났으나 오두막만은 태우지 않으시는 신기한 기적도 보여주셨고,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국도에서 버스카페 ‘해뜨는 언덕’을 열어 놓고는 오가는 이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했다. 교회의 관리집사로 일하였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큰 도움을 주셔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언해 주셨다.
무엇보다 두 아이들을 키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힘겨울 때마다 아이들은 톡톡 솟는 샘처럼 기쁨을 날라다주었다.
아들 동엽은 동영상 강좌를 듣기 위해 PMP가 필요했으나 선뜻 사줄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줄 알고는 교통비와 용돈을 아껴서 구입하였다. 동엽은 3개월 동안 40분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오가며 차비를 아꼈다. 동엽이의 교복은 선배들의 것을 물려서 입어 급기야 하복바지 엉덩이쪽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재봉틀로 박음질을 해서 입어야 했다. 박음질한 자리가 선명하여 안쓰러운데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뛰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맙고 감사했다.
딸 고은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버이날 선물로 준 따뜻한 토스트도 기억에 남는 기쁨이었다. 아빠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 아는 고은이는 밤늦게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토스트 두 개를 사온 것이었다. 학교급식이 비싸다고 집에서 빵 한쪽 싸가서 먹고 늦게까지 공부하다 돌아오는 고은이였다. “한 번 달고 버리는 꽃보다 이게 훨씬 실용적이네” 하며 부부는 기뻐하였다.
미술을 전공하는 고은이를 위해 학원비를 대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아빠를 따라 목회를 하고자 하는 동엽을 목회자로 미리 훈련시키신 분도, 또 신학대학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두 아이의 인생을 책임지실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으며, 김정하 전도사가 아내와 그렇게 소명을 좇아 달려갈 때 그 길을 응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아이를 그리 키워 주셨던 셈이다.
박명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