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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나의 문학
최원현
nulsaem@daum.net
1. 기억의 문
사람은 때로 생각지 않은 곳에 가게도 되고 생각지 않은 만남도 갖는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하고 더러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게도 한다.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지만 지나고 보면 그 또한 은혜였고 예정된 어떤 힘의 작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종심(從心)의 나이도 넘기고 보니 지금까지 내 인생을 지탱하고 끌어준 두 개의 힘을 발견케 되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또 하나는 문학인 것 같다.
나는 동란 중에 태어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세 자매 중 맏이였는데 내 형을 낳고 산후경과가 좋지 못해 아주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형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섯 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그 형이 가버린 1년 후 태어난 나였으니 나도 그렇게 될까봐 어머니는 당신과의 철저한 격리 속에 살게 하며 한 번도 당신 품에 나를 안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품이란 아기에겐 우주고 세계고 최고의 평화가 아닌가. 어머니에게 아기란 또한 그의 전부다. 그런데 그런 품을 잃어버린 아기도 아기지만 그런 품을 내줄 수 없는 엄마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오죽 했겠는가.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가 계시던 안방과 엄마의 방이 동(東)과 서(西)로 떨어져 있었고 내가 어쩌다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어머니가 있는 방 쪽으로 가기라도 할라치면 누군가가 달려와 나를 번쩍 들어 반대로 돌려놓던 기억인지 들은 얘기인지 어렴풋한 기억만 있다.
2. 할머니의 노래 그리고 하나님
돌 달에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조실부모한 내게 외할머니는 그냥 어머니였다. 그럼에도 어린 가슴 속에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던 어머니의 빈자리는 나이가 들어가고 생각이 깊어가도 메꿔지지도 메꿀 수도 없는 커다란 구멍이었던 것 같다.
육이오라는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가 누구에게나 자리하고 있던 너무나도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펴볼 겨를도 없을 때였다. 하지만 그래도 외조부모님의 큰 그늘이 있어 시골 인심은 부모 없이 외톨이로 외가에서 거두어지는 내게 너나없이 사랑을 주셨다. 그래서 동란 중에 아버지를 잃고 뒤따라 어머니까지 잃은 아이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거기도 내가 미처 모르던 그 어떤 큰 힘이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고 있었던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딸만 셋인 외조부모님의 맏이였다. 열여덟에 시집을 가서 스무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결핵으로 잃어버린 어머니는 당신마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시 얻은 나를 당신으로부터 완전 격리시켜 버렸다. 그 어머니까지 내 나이 세 살 때 어머니의 나이 스물아홉에 내 곁을 떠난 것이다.
졸지에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어버렸지만 외가에서 태어났던 나는 그대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막내이모에 의해 길러졌다. 그렇게 내 유년은 겉으로는 불행해 보였지만 안으로는 세 분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평안하고 따스한 유년기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 막내이모가 시집을 갔다.(어머니의 바로 밑 동생인 큰이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집을 갔다.) 나는 그때부터 순전히 외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 전부터였지만 나와 할머니에겐 노래가 있었다. 하나는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時)’라는 근본도 모르는 내가 될까 봐 내 생월생시를 주입 시키는 노래였다. 또 하나는 당신이 작사 작곡한 ‘우리 원현이 국민학교 졸업이라도 하는 것 보고 죽어야 할 틴디’ 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주문처럼 외우게 하고 기도처럼 읊어댔다. 할머니의 노래는 6년이 지나자 ‘우리 원현이 중학교 졸업 하는 것이라도 보고 죽어야 헐 것인디’로 바뀌었다.
아들이 없는 외조부모님은 작은할아버지댁의 큰 외숙을 양자로 들였다. 들였다기보다는 밀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텐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외숙 네가 새로 지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겐 큰 위기가 왔다. 나를 내 피붙이랄 수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말 중에 ‘외손자를 이뻐하려면 경상도 방아 코를 이뻐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외손자는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할 때였다. 하지만 부모도 없이 자란 내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라 해도 어린 것이 눈칫밥 먹는 것이 뻔하다며 한 살이라도 더 먹여 보내겠다고 외조부모님은 급기야 큰 결단을 내리셨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야 들어가는 때였는데 광주로 목포로 유학을 못 가면 30리나 떨어진 유일한 중학교로 가게 되는데 여럿이 시험을 봤지만 나와 친구 하나만 합격을 했다. 외조부모님은 내가 중학교라도 나온 후에 큰아버지께 가면 조금은 더 마음이 놓이겠다 싶으셨는지 새로 지은 집을 양아들한테 물려주셨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학교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게 한다고 산 너머 마을에 한겨울에 토담집을 지어 나를 위한 분가를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렇게 한겨울에 집안 일가친척이며 동네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고집스레 집을 지은 덕에 나는 그렇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다시 셋이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3년의 중학교를 마쳤다.
중학교 2학년 초였다. 일요일이었는데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졸래졸래 따라간 그곳은 20여 리나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교회였다. 그때까지 할머니도 교회란 가본 적도 없을 텐데 그런 할머니가 나를 교회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셨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할머니만 따라다녔던 것이어서인지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2년이나 할머니를 따라다녔으면서도 그 교회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성탄절에 성탄 송을 위해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우리 집 하나를 보고 이십 리나 헤쳐 와서 새벽 송을 하던 형들과 누나들만 생각난다. 나는 그렇게 중학생 때 할머니에 의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할머니를 통해 내 신앙의 길을 예비하셨던 것 같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로 하여 늘 외로워하던 나 또한 거부감 없이 할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맞이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은 나만 아니라 할머니의 삶도 마지막까지 인도하셨을 것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막내 이모 말씀을 들으면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놔두고 갑자기 세상이라도 뜨게 되면 너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하나 없게 될 테니 어찌 살 것이냐고 하시면서 너를 교회에 맡긴 거란다” 하셨다. 절에다 이름을 팔고 띠도 판 나를 그렇게까지 하셨을 때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온갖 생각을 다 하신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앙을 갖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게 어찌 거저 된 것이었겠는가. 세밀하고 정확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사랑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촌 형들도 다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내 신앙도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할머니의 결단 같아 보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외곬로 몰아 나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정하심의 사랑에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서울이란 곳으로 큰아버지를 찾아서 내린 새벽의 서울은 너무나도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날의 심정을 수필 <그날 새벽>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끼기기긱 덜커덩,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 온 기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순간 사람들은 경주라도 하듯 서둘러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러나 통로는 한 명씩만을 받아들이며 사람들을 한 줄로 서게 만들었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더 천천히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한참 만에 기차에서 벗어났는데도 긴 기차만큼이나 길게 사람들의 줄이 이어져 달리고 뛰고 걷고 했다. 하나같이 뭐가 그리도 바쁜지 크고 무거운 짐 보퉁이를 들고서도 잘도 달린다. 그리운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지겨울 만큼 길었던 기차여행에서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일까.
그들에 아랑곳 않고 되도록 천천히 발길을 옮기는 내 옆구리를 치고 가는 사람, 몸을 부딪치며 가는 사람들을 잠시 발을 멈추고 망연히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가슴 속이 유리 조각에 긁힌 것처럼 쓰라리다. 심장은 큰북 치듯 쿵쾅댄다. 밀려드는 불안, 저들과 다른 나라로 가는 것 같은 나, 그런데 기차에서 내려 출구를 거쳐 서울역 광장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순간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하늘을 쳐다봤다. 날이 밝기 전의 이른 새벽, 낯선 하늘 밑에서 더욱 작아져 있는 나를 하늘도 완전히 무시하는 것 같다. 3년 전에 처음 보았던 서울 하늘과도 달랐다. 그땐 그저 기대와 즐거움이었다. 거기다 여름이었다. 오늘은 겨울이고 하늘도 잿빛이다.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의 전환,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내 삶으로의 시작이다. 비로소 차가운 바람에 노출된 몸이 움츠러들어 있음을 느낀다. 겨울의 새벽은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내가 가야 할 곳의 주소다. 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적혀있다. 거기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갑자기 한기 같은 무서움이 왈칵 몰려왔다. 얼른 하늘을 쳐다봤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보이는 새벽하늘이 어제 집을 나섰을 때의 저녁나절 같다. 순간 저만치로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손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멀어져 가며 희미해지는 모습,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서있는데 내가 가는 것처럼 멀어져 가는 모습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버려진 느낌이다. 하늘도 내 머리 가까이까지 내려앉는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골의 하늘은 이렇지 않았다. 밤에는 별이 총총하고 낮에는 시리도록 파랗게 맑았다. 그런데 다들 가버린 곳에서 홀로 서있는 내게 하늘은 지극히 무덤덤 무표정이다. 아는 체도 않는다. 열여섯 머스마가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살아가야 할 새 하늘 새 땅인데 말이다.
보퉁이보퉁이 들고 이고 메고 달리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중 나온 사람과 하나 되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는 새삼 가족이란 저런 거구나 생각을 했다.
광장 가 쪽으로 며칠 전 내렸던 눈을 밀어놓은 눈 더미들이 여기저기 시꺼먼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상처 딱지처럼 붙어있다. 그게 마치 서울에서 살아갈 내 모습 같아 보여 왈칵 설움이 몰려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타야 할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는 내 눈에도 아주 조금씩 날이 밝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빛 속에 가려졌던 어두움도 옅어지는 것이 보였고 비로소 새벽이 느껴졌다. 버스만 타면 내가 맞게 될 새 풍경들이 익숙하고 낯익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떠나온 길에서 새롭게 맞아야 하는 두려운 생소함으로 나를 압박해 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부터 백부님 숙부님께 그날 새벽이 그렇게 나를 인계 했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삶속에 들여 밀어 질 나였기에 반가움보다 두려움과 미안함이 더 컸다. 미명을 벗어버린 아침이라도 빨리 왔으면 싶었다.
완전히 날이 밝으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언제쯤 올 것인가. 그렇게 나는 열여섯 겨울을 보내던 한 새벽 서울이라는 삶터에 덩그마니 올려졌었다. 그날 나는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를 네 번이나 보내버린 뒤에야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도 내가 기다리는 아침은 쉬 오지 않았다. 참 두렵고 긴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렇게 난 고향을 떠났고 서울이라는 또 다른 고향에 옮겨 심어졌다. 그런데 새삼 왜 그날이 갑자기 생각난 걸까. 코로나로 갇혀버린 일상에서 그날의 어떤 암담함을 느낀 것일까, 그 황당하고 암담했던 55년 전 그날 새벽은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는데 왜 갑자기 뉴스를 보다 그날이 생각난 걸까. 추분인 오늘 가을하늘은 이렇게나 맑은데. (<그날 새벽> 전문)
3. 문학의 문
남들은 당연히 다 가진 것을 나만이 갖지 못한 것에서 오는 소외감 열등감 박탈감 그리고 자격지심은 어린 나에게 늘 큰 부담이었고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무언가로도 표현하여 나타내 보고픈 욕망이 있었으나 그 또한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진주처럼 내 안에서 서정과 서사로 자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꺼내 볼 여유와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가 훗날 문학을 하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게는 문학에 대한 몇몇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특활시간에 문예반에 들어갔던 것과 중학생 때 경주까지 선생님과 함께 백일장에 참가했던 기억이다. 특별히 소질이 있었다기보다는 무언가 분출해 보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있었는지 초등학교 때는 웅변대회에도 나갔었고 큰 수상기록은 없었지만 나름 글쓰기는 내게 무언가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도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내게 세상은 어느 것 하나도 만만치 않았고 늘 힘겨운 삶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어려웠던 내게는 기회조차 와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정을 갖고 직장생활을 하던 80년도 중반 신문광고 하나가 눈을 끌었다. 문예진흥원에서 덕수궁 석조전에 문학 강좌를 연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직장 근무를 마치고 가도 될 만한 시간이었고 거리도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마음 변하지 않겠다고 바로 등록을 해버렸다. 거기서 시인 성춘복 선생님과 수필가 서정범 교수님을 만났다. 원래는 시를 쓰고자 했고 습작도 주로 시로 하고 있던 차라 시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와 수필강의가 교대로 이루어지는 그곳에서 마침 수필 강좌 시간에 서정범 교수님이 수필 한 편씩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봉숭아>란 글 한 편을 써서 내게 되었는데 다음 시간에 오신 서 교수님이 그걸 다시 주며 읽어보라 하셨다. 그리곤 봉숭아 대신 <발뒤꿈치>로 제목을 바꾸자시며 그걸《한국수필》이란 잡지에 초회(初回) 추천(推薦)을 하겠다고 했다. 초회가 뭔지 추천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는 그렇게 1987년《한국수필》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경희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서정범 교수님과 함께 이철호 이숙 송도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수필가란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수필을 쓰고 공부하게 되었다.
어느덧 수필은 내 삶이 되었고 어느새 수필가로만 40여 년을 살고있다. 1987년 나의 초회 추천작 <발뒤꿈치>를 발표한 후 추천 완료도 되기 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 되면서 나는《거목문학》《수필문학》등에 글을 실었다. 그리고 <책방 나들이>란 작품으로 추천 완료가 된 후에는 한국수필 등단작가 모임인 한국수필작가회(당시는 한국수필추천작가동인회였다)에서 활동하며 91년부턴 고동주 회장, 이정원 부회장과 함께 제3대 총무(지금의 사무국장)로 동인회 살림을 맡았다. 그때까지 동인지가 네 번 나왔었는데 내가 5호와 6호를 발간하면서 출판사 섭외를 하여 5호《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1991)은 호암출판사에서, 6호《바람 부는 날에는 그리워하리》(1992)는 대림기획에서 판매할 수 있는 책으로 전액 출판사 부담의 출판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30년 작가회 역사에도 오직 나만이 해냈던 일이기도 해서 뿌듯한 마음을 갖는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셨다. 이것은 위로받을만한 일이 있어야 위로를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어린 날의 외로움과 슬픔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내 수필들 속에 담겨있는 애잔한 서정들을 이쁘게 봐주셔서 1989년을 전후하여 KBS라디오에서 이규항 아나운서와 서정범 교수님이 진행하던 ‘시와 음악과 수필과’란 방송프로에 수필들이 방송되게 하셨고 그것들을 묶은 방송수필집《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대림기획)가 출간되게 하셨다. 그로부터 나의 수필문학 활동도 본격적으로 더 활발해졌다.
4. 수필문학 그리고 나의 삶
내가 그리도 많이 들었던 외할머니의 노래는 당신의 희망가로 바뀌어 내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자 손주도 보고 싶어 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 할머니는 외증손주 남매를 안아 보시고 여든일곱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일찍이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양반집 도령을 찾아 나주 임씨가로 시집을 간 것으로부터 어려움은 시작되었다. 바람처럼 떠돌길 좋아하는 남편에 아들 없는 딸만 셋인 아낙으로의 한도 한이지만 큰 사위 둘째 사위 셋째 사위까지 너무나 허망하게 잃어버린 데다 큰딸에 큰 손주까지 잃어버렸으니 그 황망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었겠는가.
내 수필 속에 그런 할머니의 한과 안타까움에 조실부모한 내 빈 가슴의 서정이 어우러진 글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종소리
“대앵, 대애애앵”종소리는 신기하게도 십리가 넘을 우리 집까지도 들려왔다. 교회와 우리 집이 모두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다 하더라도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동산도 두 개나 넘어야 하건만 수요일 저녁만 되면 종소리는 어김없이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 할머니는 먼 어두운 밤길은 다녀올 수 없기에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을 들었던 종소리다.
막내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 화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 주신 분이다.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이리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뼈와 가죽만 남은 가느다란 몸매와 얼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앉아있는 것이라 할 정도로 똑같아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의 모습은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저렇게 똑같아질 수 있을까싶게 닮았다. 할머니도 치매로 고생하다 가셨다. 할머니가 여든 일곱에 가셨는데 이모는 일흔 여덟에 가시니 9년이나 빨리 가신 셈이다.
새벽 첫차로 이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내려갔다. 성공한 세 아들의 문상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빈소에서 이모님과 마주했다. 10여 년 전에 찍었다는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영정사진 속에서 이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원현이 왔냐? 오느라 고생했다.”사진 속에서 이모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지난번 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오셨소? 누구시요?”하던 이모였는데 오늘은 반갑게 알은 체를 하며 맞아주고 있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허나 종소리가 들려올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모가 “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 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세상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 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애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이다. 참 정갈하신 분이었다. 십리 황토 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 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 해서일까. 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장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괜찮다. 봤으니 되얐다. 잘 살어라.” 이모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왜 종소리였을까. 아마 이모도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멀리 퍼지는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 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 그래도 종소리의 긴 여운은 내 남은 삶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잘 사냐?” “잘 살어라” 할머니와 이모 두 분 모두의 한결같은 물음이고 순하디 순한 그분들만의 나에 대한 축복이고 소원이었다. 나는 두 분의 목소리 여운을 내 가슴에도 울리고 있는 종소리로 들으며 두 분 바램의 의미 담긴 잘 사는 일을 남은 내 삶 동안 꼭 지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신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략)
고자바리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뒤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앉았다 일어나려면‘아고고고’하시며 허리가 아픈 증상을 아주 많이 호소하셨다. 길을 가다가도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허리를 펴며 받치고 있던 왼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다가 다시 가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바라보는 어린 내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으로 늙음이 나타났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허리가 굽어지는 걸로 나타났다. 기역 자처럼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허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죄송해지고 안타깝고 서글펐다.
오랜만에 뒷산엘 올랐다. 그새 나무 계단이 하나 더 생겼고 오르는 사람도 더 많아진 것 같다. 한데 길목에 뿌리가 다 드러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길이 되어버린 곳에서 덩그마니 뿌리를 다 드러낸 체 서 있는 나무가 할머니의 굽어버린 등을 보는 것처럼 안쓰럽다.
이미 몸통이 잘려 나가버린 길옆 다른 그루터기들을 보며 이 나무도 얼마 못 가 저렇게 잘려지는 신세가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선 지 서 있는 모습조차 떨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길옆 말라버린 그루터기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난 오래된 그 그루터기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다들 이리 되어가는 거여!’
(중략)
저만치서 할머니가 허리 뒷춤에 손을 받치고 걸어와 늘 쉬어가던 그루터기에 앉으신다. 어스름에 묻혀가는 할머니의 모습, 한참 보고 있자니 할머니는 없고 그루터기만이다. 아니다. 할머니가 아니고 나였다. 나도 그렇게 고자바리를 향하여 가고 있는 거였다. 누군가가 앉아 쉴 내 인생의 그루터기 고자바리로. 나뭇잎 두 잎이 팔랑팔랑 나비처럼 팔랑이다 그가 태어난 나무의 뿌리 위 땅으로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비로소 그도 편안해 보인다.
가슴 속으로 피는 꽃
-어머니는 내 가슴속에 핀 한 송이 꽃이었다-
꽃별
어둔 밤이 아녔다. 해는 없지만 분명 낮이었다. 하늘도 세상도 온통 회색인데 대롱대롱 어른 주먹보다 큰 꽃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빛나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거리를 두고 빛나는 꽃별들, 어린 나는 이모의 등에서 몸을 빼며 손을 내밀어 그 빛나는 별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팔을 뻗은 만큼 멀어져 가는 꽃송이, 빨갛고 노랗고 하얀 꽃이 바로 눈앞에서 별(星)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내 소견에도 그건 엄마가 내게 보낸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꽃별, 왜 엄만 내게 그런 안타까움의 선물을 보냈을까. 온 밤을 그렇게 꽃별의 꿈속에서 헤맬 때가 여러 번이었다.
내게 엄마는 그렇게 늘 잡히지 않는 실체로만 나와 함께 했다. 헌데 하필 왜 꽃별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 꽃별 하나하나가 반짝일 때마다 각기 다른 엄마의 얼굴이 보이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번도 확실한 모습으로는 기억되지 않는 엄마의 얼굴은 이날까지도 여전히 분명치 않게 엄마라는 믿음으로만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이는 꽃별이곤 했다.
검정 치마 하얀 저고리
어머니는 어떤 색을 좋아하셨을까. 내게 어머니의 기억은 딱 한 가지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그게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모습 전부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사진을 찍던 그 날 어머니의 치마가 무슨 색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사진에서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다. 사진으로는 그렇게 보이나 청색이나 가지색이 아녔을까 싶기도 하다. 흑백사진 속에서 검정 색으로 나타나는 색깔들은 어떤 것들일까. 어머니는 어떤 색을 좋아하셨을까. 그러나 내게 남겨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흰색과 검정 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변하지도 않는 것일까.
하얀 고무신을 어머니에게 신겨드리면 하양 검정 하양의 대비가 되어 내 흐린 눈을 더욱 흐리게 할 것 같았다.
이맘쯤이면 잊어지고 사그라지고 희미해져 놓여날 만도 하련만 채워질 수 없던 가슴 아니 그 가슴에 파묻혀 안겨보고 싶던 갈망이 지워질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시도 때도 없이 콕콕 아직도 가슴을 찌른다.
검은 것도 사랑이고 하얀 것도 사랑이고, 검은 것도 그립고 하얀 것도 그립고, 가져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뜨거운 물에도 녹지 않고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얼지 않고 늘 그 모습으로만 남아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사진 한 장의 그리움으로 세월의 그림자만 더욱 길게 늘이고 있다.
가슴 속으로 피는 꽃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어머니의 이장을 하던 날, 그날 달려온 칠백 여리의 길은 내가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달린 가장 오래고 긴 길이었다. 차창에 흐르는 빗물은 오랫동안 참았던 어머니의 눈물 같았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긴 그리움의 날을 지켜 왔다는 표현을 달리 해 볼 수도 없으리라. 그런 때 어머니의 마음도 내 마음 같았을까. 그런데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손에 들린 어머니의 무게는 어쩜 그리도 가벼웠을까. 한 줌 재라는 표현이 참으로 잘 맞는 말이었다. 당신을 묘실에 내리고 일어서자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당신과 나와의 인연 고리, 문득 어린 날 꿈속에서 애태우던 꽃별들이 지금 이 순간 비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별의 그리움이 비로 내리는 게 아니라 꽃별이 머금고 있던 눈물이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성, 그리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공허를 메꿔 볼 양으로 쏟아내 주는 것 같았다.
비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더 세게 줄기차게 쏟아졌다.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묘실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큰 비닐로 비를 막으며 일을 진행했다.
봉분을 세우고 떼(잔디) 옷을 입혔다. 비석도 세웠다. 온몸이 다 젖은 채 나는 그 빗속에서 숨길 필요도 없이 마음껏 울었다. 그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안타까움에서 오는 것만도 아니었다. 사실 죽은 자에게 이런 묘(墓)가 무슨 도움이 되랴만 아무 소용도 없을 일임에도 어머니를 위해 한 가지라도 했다는 자위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도 해 줄 수도 없다는 안타까움을 아주 조금이라도 내려놓고자 하는 참으로 얄팍한 내 위안의 작업이었다. 그렇게 이장(移葬)을 한 덕에 그나마 별로 어렵지 않게 어머니를 찾아뵐 수 있게 될 터였다. (하략)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 외할머니께 갔다가 막내 이모네를 들러 올라가겠다고 했더니-막내이모는 담양의 송강 정철 후손에게 시집을 가서 성산별곡 속 환벽당 취가정이 나오는 지실 마을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시는 거였다. 내가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네 이숙 죽었다”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이모부는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찾아가면 넉넉한 용돈도 쥐어주고 말은 별로 없으면서도 자상하게 나를 이뻐해 주시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돌아가셨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때 이모부는 그곳 농협조합의 일을 맡고 계셨는데 추석 전날 조합 돈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오토바이를 타고 그걸 가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고 한다. 오토바이와 사람이 20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오토바이가 뒤집히는 큰 충격으로 튕겨져 나간 것 같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상처가 하나도 없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이모 댁에 가니 생후 3개월 되었다는 유복녀가 윗목에서 울고 있고 이모는 정신이 나간 채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모!”하고 불렀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왔냐?” 하더니 또 창문 쪽만 멍하니 쳐다봤다. 윗목의 아기는 얼마나 울었는지 지쳐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것 같아 가슴에 안았더니 몸이 불덩어리였다. 나는 급한 김에 이모부 친구인 큰길가 약국으로 아기를 안고 갔는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 했다. 해서 택시를 부르고 이모도 불러 광주로 나가는데 가는 도중 아이는 내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 품에서 마지막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 아이의 눈동자와 웃음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동네 어른 두 분의 도움을 받아 언 땅을 파고 아이를 묻었다. 그날따라 눈발이 날리고 땅은 꽁꽁 얼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묻을 자리에 내려놓는데 ’터-ㅇ’하는 울림이 내 온몸까지 전율하게 했다. 그때의 그 소리는 50년이 넘은 지금도 내 귓가에 이명처럼 머물러 있다. 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어쩌면 그리도 죽음과 친한지 모르겠다. 부모 형제에 두 이모부에 이종 조카까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죽음이었다.
그런 삶과 죽음의 거리가 내 삶과 문학 속에 그대로 자리하게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안타까움, 그리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넘치고 흘러나오는 대로 글 속에 담게 되었다.
1995년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그 기금으로 낸 책이《날마다 좋은 날》(도서출판 유정)이었다. 그리고 그 책으로 1997년 제5회 허균문학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엔 제1회 서울문예상을 받았다. 또 하난 1997년부터 기독교세진회가 내는 제소자들을 위한 잡지인 계간《새생활 안내》에 ‘안으로 띄우는 편지’를 7년간 연재했다. 그걸 모은《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2001)를 도서출판 내일에서 냈는데 그게 문예진흥원의 첫 번째 우수 문학작품으로 선정되어《날마다 좋은 날》과 함께 전국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뿐아니라 월간《건강과 생명》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사무국장.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1998년부터 5년간 서울특별시 서울이야기 수필공모전 심사위원, 서울특별시 공무원체험수기 심사위원, 월드컵조직위원회 문예작품 심사위원 등으로도 참여했다.
2002년 수필집《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범우사)를 출간했는데 이것이 또 문예진흥원 우수 문학도서로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 146《숨어있는 향기》(교음사)가 출간되었으며, 2004년에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을 또 받게 되어 그 지원금으로《서서 흐르는 강》(선우미디어)을 출간했는데 그걸로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2005)과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산문집 최원현의 맑은 이야기 샘《기다림의 꽃》(선우미디어)도 출간했다.
내 삶 속에 와 준 문학 그리고 문학과 함께 한 나의 삶은 그냥 문학이고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고비마다 보내주신 위로와 격려로 수필집과 문학상을 허락해 주셨고 나는 그 위로와 격려의 힘으로 다시 삶을 열곤 했다.
또 하나 강남문인협회를 창립한 일이다. 1996년 5월 27일 당시 권문용 강남구청장의 도움으로 구청 지하 강당에서 강남구 소재 문인 44명이 모여 강남문인협회를 결성키로 하고 임시의장으로 문학평론가인 윤병로 교수(성균관대학교)를 천거하여 발기 및 창립총회를 열었다. 먼저 추진위원 10명(안혜초 박문재 시인, 유현종 최병탁 소설가, 이궁자 최원현 수필가, 이유식 이명재 문학평론가, 하지찬 희곡작가, 이경원 아동문학가)을 선출하였는데 이 추진위원들이 당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문학평론가인 이유식 교수(배화대학)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발족한 강남문인협회는 문덕수⋅김규동⋅홍윤숙 시인, 김준성⋅최일남 소설가, 윤병로 문학평론가를 고문으로 위촉하고, 부회장엔 권용태 시인, 유현종 소설가, 안혜초 시인을, 상임이사에 최병탁 소설가를, 사무국장에 최원현 수필가, 사무간사에 백우선 배경숙 시인으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10일《강남문학》창간호를 발간하고 12월 17일 창간 출판기념회를 강남구민회관에서 가졌다. 어느새 강남문인협회는 제14대 회장(박남권 시인)기에 이르렀으며《강남문학》은 27호를 내고 28호를 준비 중이다. 나는 창립멤버로 초대 사무국장 후 상임이사 부회장 회장(제10대.2014-2015)으로 봉사했다. 1998년도부턴 서울문예상을 제정해 24회까지 시상하여 오늘까지 받고싶은 상으로 성장했다. 강남문학은 내게 문학 이상의 큰 애착을 가진 문학단체이기도 하다.
하나 더 든다면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의 창립에도 관여한 일이다. 1991년 12월 16일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가 창립되었다. 기독 문인 중 수필을 쓰는 이들의 문학회였다. 초대회장으로 이상보 국민대 국어국문과 교수가, 부회장에 김영진(성서교재간행사 대표)⋅고임순(양덕연묵회장)⋅김병권(고려화학 임원), 상임이사엔 강석호 수필문학사 대표, 사무국장엔 류인혜 수필가가 선임되어 발족 후 6개월만에《기독교수필》창간호(41인집.1992)을 낸 후 현재(회장 오경자)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다.
5. 한국수필과 나
나는 1987년 서정범 교수(당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으로 하여《한국수필》과 인연을 맺은 후 한국수필 사람으로 살아왔다. 1989년엔《한국수필》로 등단한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수필추천작가동인회(당시회장 신일수)에도 가입한 후 1991년부터 2년간 고동주 회장, 이정원 부회장과 함께 총무(현 사무국장)로 살림을 맡아 하면서 회의 명칭도 ‘한국수필추천작가회’로 바꾸게 했고, 제14대(2008) 회장도 했다. 한국수필작가회는 1987년 창립(초대회장 주영준)하여 현재 22대(회장 김혜숙)에 이르고 있다.
한국수필가협회는 한국 최초의 범수필문학단체이다. 1971년 2월 12일 창립(초대회장 조경희)하여 그해 4월 10일《隨筆文藝》(발행인 조경희.편집인 이일동.주간 서정범)를 창간하여 6호까지 발간하고, 1975년 3월 15일 계간《韓國隨筆》(발행인 조경희. 편집인 박연구, 주간 서정범)봄호로 창간호를 냈다. 그 후《한국수필》은 1996년 2월 1일 통권 78호부턴 격월간으로, 2007년 3월 1일 통권 145호부터는 월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5년 조경희-이철호-유혜자-정목일 이사장을 거쳐 최초의 이사장 경선에서 지연희 수필가가 제5대 이사장으로 당선되면서 나는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을 맡았다. 무엇보다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울 때였다. 그러나 2015년 4월부터 2018년 3월까지 3년 동안에 모든 체납금을 다 정리했다. 그리고 제6대 장호병 이사장의 취임과 함께 월간《한국수필》의 편집주간을 맡아 2018년 4월부터 2021년 3월까지 3년간《한국수필》의 질적 향상을 추진하고 도모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해소하고 책을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과 부담은 작지 않았다. 그렇게 또 3년간을 한국수필과 함께했다.
2021년 1월 정기총회에서 7대 이사장으로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한국수필 출신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수필가협회 창립 50주년과 한국수필 창간 50주년을 맞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한데 코로나가 모든 것을 막았다. 그래도 반백 년 역사의 해를 그냥 보낼 순 없었다. 창립 50주년 기념 대표작 선집을 기획했다. 1천 명이 넘는 회원들의 작품을 다 실을 수는 없는 일이라 부득이 선착순 마감을 했다. 처음 계획은 두 권쯤으로 낼 것을 기획했으나 들어온 원고를 어떻게 할 수 없어 3권으로 내기로 하고 1권에 74편, 2권에 78편, 3권에 77편을 실었다. 초기의 조경희 서정범 박연구 송도 이숙 선생님 작품도 실었다. 하지만 한국수필가협회의 역사가 한국수필문단의 역사이기도 한데 연혁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50년 동안의 역사들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수필문학상을 41회까지 시상했고, 국내 심포지엄과 해외 심포지엄을 해왔다. 그 자료도 횔용할 수 있게 만들어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자료들이 다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찾아내어 수필계에 내놓아야만 한다. 또 하나 아직도 대학에 수필문학의 커리큐럼이 없고 문학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수필에 관한 학위 논문을 쓰려 해도 자료가 없어서 못 한다고도 한다. 이 또한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다. 해서 내 임기 중에 무언가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 번째 기념사업으로 심포지엄의 자료들을 책으로 출간하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자료를 찾고 모으는 일부터가 어려웠다. 제1회부터 40회까지 이어령 장백일 김열규 김태길 윤병로 구인환 정진권 윤모촌 오창익 유종호 윤재근 임헌영 등 내로라하는 124명이 124편의 수필이론을 펼쳐내 주셨다. 거기에 금년 것까지 하면 총 126편의 수필 논문을 한국수필가협회가 한데 모아 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해보기로 했다. 또 하나는 한국수필 백서이다. 수필문예』및『한국수필』에 글을 실은 필자 및 작품명, 한국수필에서 운영하는 문학상의 수상자들, 국내와 해외 심포지엄의 강사 및 주제들, 한국수필로 등단한 작가들과 작품명, 한국수필의 역사와 연혁 등을 총 정리한 백서는 50년 역사의 집대성일 수 있다. 어떻든 내 임기 내에 이 세 가지를 꼭 해내려 한다. 그래야 새로운 50년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새 역사의 발판이다. 그게 부실하면 내디딜 힘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6. 내 삶 속에 함께 해 주신 그 분
나는 지금까지 수필집 13권, 수필선집 4권, 작가 인터뷰 1권, 문학평론집 2권 등 20권의 책을 냈다. 문학상도 제5회 허균문학상(97), 제1회 서울문예상(98),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2002),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2005),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 제7회 구름카페문학상(2011), 한국크리스천문학 우수작품상(2011), 제1회 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2014), 제3회 월간문학상(2014), 제36회 조연현문학상(2017), 제23회 신곡문학상 대상(2018). 제1회 상록수문예대상(2020). 제36회 펜문학상(2020). 대한민국예술문화공로상(2021) 까지 참 많은 상을 받았다. 뿐인가. 문예진흥원의 우수문학도서 선정이 3권, 문예진흥원 창작기금 받은 것이 2건이고, 한국비평문학회의 2000년, 2001년, 2002년, 2006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 선정, 중학교 교과서《국어 1》(비상교과서.2011)에 수필 <햇빛 마시기>가, 중학교 교과서《도덕2》(디딤돌.2011)에 수필 <기다림의 꽃>, 중국 동북3성《중학생 작문》(2009.연변교육출판사)에 수필 <행복한 책임감>이 등재 되었으며, 고등학교 교사지도서《문학》(천재교과서.2012)에 <기행수필의 맛과 멋 내기>, 고등학교《국어 하》(천재교육.2012)에 <수필문학의 특성>이 등재 되었으며, 대학수능 실전모의고사《언어영역》(메가북스.2010)에 수필 <땅 따먹기>, 대학수능 매가스터디《언어영역 문학 375제》(메가북스.2011)에 수필 <살아보기 연습> 등재 및 문제로 출제 되었다. 또한《한국의 좋은 수필》(2012.서정시학)에 수필 <어깨 너머>,《한국현대수필 75인선》(2012.미리내)에 <누름돌>,《한국현대수필 100년》(2014.연암서가)에 <내버려둠에 대하여>가 실렸다.
월간《건강과 생명》에 ‘최원현의 살며 생각하며’와 월간《행복한 우리집》에 ‘최원현의 살며 사랑하며’를 각각 20년 넘게 연재하고 있으며, AK문화아카데미⋅역삼청소년수련관⋅MBC아카데미에서 문학강좌를 했으며, 지금도 롯데문화센터⋅강남시니어플라자⋅평창문예대학 등에서 수필강의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내가 70년대를 전후하여 문학 공부의 스승으로 삼고 있던 범우문고에서 ‘범우문고 305‘로 내 수필집《누름돌》이 나온 것이다.
나는《누름돌》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교과서에도 대입 수능문제집에도 대학교재에도 내 수필들이 실렸고 권위 있는 좋은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범우문고로 내 수필집이 나온다니 그 기쁨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다.’라고. 그러면서 ‘내가 범우문고에 각별한 애정과 감사를 갖듯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문학 친구들에게도 이 수필들이 자신감을 주고 작은 용기와 격려라도 되었으면 싶다. 평생을 그래 왔지만 또 사랑의 빚을 지고 만다. 영원히 갚을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이 사랑의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수필들이 아주 작은 갚음이라도 되어주었으면 참 좋겠다. 고 했다.
돌아보면 내 삶의 9할은 사랑의 빚이다. 내 삶 속에 함께 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전부이지만 그 사랑 안에서 또 수많은 사랑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아 잡초처럼 버려질 수도 있던 삶을 잡초가 아니라고 약초라고 우기며 뽑아버리지 못하게 하고 거름을 주고 흙을 북돋아 주며 가꿔주신 사랑들이다.
나는 1983년 강남 도곡동으로 왔다. 나와 아내의 직장 중 아내 쪽으로 온 것이다. 85년 청운교회에 등록하여 95년에 안수집사가 되었고 안수집사 18년 만에 장로가 되었다. 아내도 2006년 권사가 되었다. 나는 우리 가정 신앙의 시조다. 두 남매에게서 다섯 명의 손녀를 보았다. 단 하나 남겨진 핏덩이가 열한 명의 가족에 세 가정을 이룬 것이다. 다들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고 신앙생활도 잘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인 역대상 4장 10절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하는 ‘야베스의 기도’를 내게 주시고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감격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펜 끝에서 펼쳐지는 문학의 세계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고 확장 시키는 작은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위로와 사랑과 평안을 얻는 글들이 되길 또한 기도한다.
내 삶 속에 함께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해 주신 내 하나님의 사랑이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움이 많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더욱 넉넉히 넘치도록 임하길 간절한 맘으로 손을 모은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또 하나 내가 문단에서 작게나마 섬길 수 있게 하신 것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으로, 강남문인협회 회장으로, 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으로, 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로,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 세워주셔서 문단 그리고 문학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내주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도와 이만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신 내 문학의 동반자들께 감사드린다.
7. 나의 수필 쓰기
(1) 글쓰기란
글을 쓰는 것은 나만의 언어로 내 심상을 표현해 내는 문학적 행위이다. 수필가는 진솔하고 적절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출하되 문장을 통해 문학적 향기를, 내용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어 독자와 공유한다. 그런 미적 감동을 위해 수필은 설명(說明), 논증(論證), 서사(敍事), 묘사(描寫) 등 다양한 기술양식을 활용하여 감동을 창출하는데 그 감동이 클 때 좋은 수필이란 평가도 받는다. 수필쓰기는 나를 표현하여 독자와 소통하는 교감이다. 해서 의도적 변용의 글쓰기로 독자를 의식하며 글 속의 정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암시적 주관적 함축적인 문학적 표현도 시도한다.
‘문학은 상상언어로 표현된 예술’(노드롭 프리아-캐나다 신화문학론자)이라고 했다. 수필도 자기체험의 사실적 기술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못한다. 사실이 감성적 진실은 되어주어야만 공감이나 감동의 문을 열 수 있다.
수필의 특성은 형식의 자유로움이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 철학적 개성과 사유에 유머와 위트를 담고 활발한 문학적 상상의 날개를 펼쳐 실체적 체험을 형상화함으로 문학성과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은 내면과의 대화이면서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도 함께함이기 때문에 자기성찰에 내면과의 대면이 함께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2) 글쓰기의 분위기
나는 글쓰기를 시작할 때 분위기를 중시한다. 쓰고 싶어지는 심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쓰고자 하는 마음(분위기)은 무엇을 쓸 것인가(주제)도 결정한다. 그런 후 개요를 작성(구성)하고 글쓰기로 들어간다. 곧 계획(기획)하기-생각하기(구성)-표현하기(초벌쓰기)의 과정이다. 가능한 한 피상적 인식과 상투성에서 벗어나고자 대상에 대해 면밀하고 적절한 준비가 선행된다. 사물일 경우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자세히 관찰하거나 부족한 부분은 사전을 통하여 보충한 후 적확(適確)한 이해 후 표현하고 신선한 언어와의 만남이 되도록‘낯설게 하기’도 시도한다.
문장은 단문이 되도록 한다.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내기까지 내 문장은 늘 길었다. 문장의 호흡이 긴 것을 장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긴 문장은 자칫 주어를 불분명하게 하여 이해력과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문단은 한 이야기의 흐름만을 갖도록 통일성을 확보하여 주제를 분명히 한다. 문단마다 독립적인 완결 구성을 갖되 전체가 기승전결을 이루도록 연결의 유연성을 갖게 한다. 문단도 논리적이면서 부드럽게 리드미컬한 연결로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 조화가 되도록 한다.
독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공감 내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독자의 구미에 맞는 글쓰기가 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퇴고를 한다. 독자의 눈과 마음을 붙잡아 머물게 하려면 간결한 문장에 분명(적확성)한 논리, 주제감이 있고 담백 순수 진솔(겸손)한 내용이어야 공감을 유도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서두와 결미를 중시한다. 서두는 주제 또는 의미화의 암시, 결미는 주제의 의미화가 되는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선호한다.
(3) 문장, 작가의 마음.
수필은 소설, 희곡 등과 함께 산문을 대표하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는 허구로도 독자에게 다가가지만 수필만은 자기 체험의 문학적 표현으로 독자에게 나아가고 다가간다. 또 자아의 성찰을 통해 다른 현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라고 하는 다양한 상황 속의 인간 심리를 솔직하고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문학이라는 점에서도 수필은 마음의 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이며, 그 마음의 작용을 어떻게 표현(수필화)하고 표현되어야 할 것인가.
《문심조룡(文心雕龍)》을 통해 보는 마음의 작용(文心)
‘문심조룡(文心雕龍)은 중국 선진(先秦 : B.C.12-13세기)에서 육조(六朝:6세기)시대까지의 중국 고대 문학현상을 시대 순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론으로 집대성 시킨 중국 고대의 문학이론서’(문심조룡.김민나.살림출판사.2005. P17)로 제나라와 양나라 시기를 걸쳐 살았던 유협(劉勰.465?-520?)이 쓴 책이다.
나는 문심조룡의‘문심’(文心)이야말로 우리 수필가들이 중시했으면 하는 글쓰기의 자세와 마음이라 생각한다.‘마음이 생겨나면서 그와 함께 언어가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서 문장이 함께 분명해진다.’에 동의한다. (『문심조룡』제1장 원도 31쪽)
문(文)은‘예술적인 마음(心)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며, 조룡(雕龍) 곧 용(龍)의 문양을 나무에 새기는(雕) 것에 비유될 만큼 수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학’임을 말하고 있다. 곧‘문심은 문학 활동에 있어서 마음의 작용(爲文之用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마음으로부터 문학작품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문학의 창작이나 감상, 비평 등 활동 모두가 인간 곧 작가가 언어를 매개로 하여 만들어내는 제반 예술 활동을 위한 마음의 전체적인 움직임 곧 인간의 정신과 감정 및 영감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자연의 변화에도 감동되어 동요되므로 자연경물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문학작품은 인간 마음과 물질의 교감 결과이기 때문에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고로 유협은‘문(文)’은 천지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다고 보았다.
사람의 미(美)를 추구하는 본능이 문학예술을 탄생시켰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유협은 ‘미’라는 말 대신 ‘문(文)’이나‘채(采)’를 사용 다. 이는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곧‘미적인 사물들로만 세상이 이뤄져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김민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느낌이 생기면 언어로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만물을 살펴보면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다. 용과 봉황은 그림 같은 아름다운 무늬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범이나 표범도 아름다운 문채로 자태를 이루고 있다. 구름과 놀의 오묘한 빛깔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능란한 색상을 능가하고, 꽃으로 장식된 풀과 나무는 비단 짜는 사람의 솜씨를 기다릴 것이 없다(그 자체로 아름답다).’함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들과 숲 속 바람소리, 냇물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들이 한결같이 저마다의 문채를 지니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에게 어찌 이런 문채가 없겠는가. 말하자면 유협이 말하고자 한 것은‘문’(文)이‘시청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만물의 형상’인 것처럼 사람은 마음을 움직여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으로 인류문화의 본체는 바로 사람의 마음(心)이라는 것이다.
수필은 지나가버린 과거의 현상을 기억과 상상으로 현현(顯現)시켜 이미지화 해낸다. 이때 그 이미지는 마음의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형상화되어 의미화 된다. 만약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그것은 과거 사실을 기억해 내어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수필이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의 작용이 사실을 넘는 진실로 감동을 불러오며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같은 곳을 같은 시간에 여행을 했다 해도 그것을 문장화해 내는 능력에 따라 그곳 그 시간이 전혀 다르게 묘사되어 독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도 눈으로 본 것에 마음이 어떻게 작용했느냐가 결정적으로 문장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협은 문학작품이란 언어 문자로 이루어진 인류문화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마음에 느낌이 생기면 언어로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 문장으로 표현된다’ 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도 느낌이 생기지 않았는데 그것이 언어화 된다면 그 문장은 감동을 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4) 자리 놓음의 글쓰기
‘마음’은 문장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수필 쓰기란 그 마음(心)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자리 놓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수필가들 및 각종 문학 이론서들은 문장 공부를 마치 기술 연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니 자기의 감정조차 타인의 생각이나 언어처럼 그려내게 되는 부자연스러움을 낳게 된다.
문장 공부란 모름지기 유협(劉勰)이『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중시한 것처럼 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드는‘마음’(心)을 쓰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감동은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은 문장의 출발점이지만 그 출발은 바로 어떻게 마음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이뤄진다. 마음의 작용을 문장으로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글을 쓰려 한다면 바람 한 점 없는 데서 연을 날리려는 것과 같아 표현기술이나 묘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동적인 좋은글을 써내기란 어려울 것이고 설혹 써내진다 해도 자연스럽기보단 억지스러워 보일 것이다.
바람을 이용하여 내가 목표한 곳에 연을 띄워 올리는 것, 그 위치에 연이 자리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이 올랐다 하더라도 팔랑개비처럼 마구 돌며 안정을 취하지 못한다거나 고도(高度)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그건 연날리기를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점잖게 자연스럽게 보기좋게 떠오르는 연이어야 내가 의도하는 대로 조종할 수도 있다. 자리놓음이란 바로 내가 의도하고 바라는 대로 안정되게 연이 떠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바람과 연과 내가 하나 될 때 신나는 연날리기가 되는 것 처럼 수필 쓰기에 있어서의 자리놓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자리놓음’이란 통상적으로 수필이 추구해 왔다고 했던‘붓 가는 대로 쓰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의‘붓 가는 대로’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가 아니라 오랜 깊은 사고(思考) 속에 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가 완전히 설계되고 쓰고자 하는 내용이 정리된 상태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 하는 것처럼 된다는 말이다. 연을 하늘에 올리고 싶다고 공중에 던진다고 해서 그게 올려지겠는가. 바람의 방향과 세기, 날리려는 마음, 연의 크기, 날리는 기술 등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올려지는 것인데‘붓 가는 대로’를 잘못 해석하여 글쓰기의 근원부터 그르치곤 한다.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고 그런 다음 그 마음의 작용이 문장을 만들어내면 자리에 놓는 것이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5) 수필, 마음으로 쓰는 글
수필이란 자기가 체험했던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렌즈에 맞추어 사유하고 관조한 자기의 느낌대로 적어나가는 글이다. 따라서 숙련된 화가의 붓끝에서 형상화되는 그림이나 서예가의 서예 작품처럼 되기 위한 문장 공부를 하려 한다면 결코 좋은 글을 만들어내긴 어려울 수 있다. 문장도 수련이 중요하지만 쓰고싶은 마음이 먼저 크게 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림이나 서예도 마음의 작용을 가벼이 여기진 않는다. 하지만 기능적 수련의 결과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논어에‘심재불언(心在不焉)이면 시이불현(視而不見)’이라 하여‘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나타나지) 않는다.’했는데 이와 같이 좋은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움직임 다시 말해서 쓰기 전에도 감동, 쓴 후에도 감동을 갖도록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수필은 마음과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고 신선하여 마음의 감동이 순수하게 이뤄지고 그 감동이 읽는 이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글이다. 수필을 쓰는 일이란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을 열어 그 열린 마음이 만들어내는 감정을 문자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한데 자꾸만 그걸 잊고 있다. 그래서 감정이 빠진 지식 나열이 되고, 누구나 아는 일반적인 사항을 설명하듯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있다. 잠깐이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한 장의 편지를 쓰는 데도 뜨거운 감동을 낳는 글이 되는 것처럼 수필쓰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작용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마음이 솔숲에 이는 바람 같으면 그런 수필이 나올 것이요, 뜨거운 햇빛 아래서 보란 듯 피어있는 해바라기 같으면 그런 수필이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함축성이 있어 표면적 의미 이상의 뒷맛이 깊어 씹을만 하고 더러는 한 작품 안에서도 비교되는 특출한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수필은 그런 마음의 작용을 중시할 때 비로소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좋은 수필은 그런 마음의 작용을 진솔하게 표현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8. 내 수필 속의 인생 문장-수필집《어떤 숲의 전설》(2019.북나비)을 중심으로
때론 알고도 모른 척 해 주는 것 또한 삶의 지혜요 예의가 아닐까. -<낯빛> 중. 19쪽.
향기란 몸에 덧입혀진 것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내 안 깊이에서나 내 행동 자체에서 풍기는 것 아닐까. -<그 향기> 중. 23쪽.
사랑의 근본은 모성이라고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세상 모든 사랑의 출발이다. -<먹먹하다> 중. 25쪽.
어둠을 밀어내고 새날에의 소망을 돋움발로 기원하는 창, 창호의 골골마다 생명의 시작으로 충만한 역사의 강이 흐른다. -<문> 중. 27쪽.
현대는 무수한 얽매임의 삶이란다. 알게 모르게 걸리고 묶인 것들, 그 속에서 나는 또 무엇에 얼마나 얽매어 살고 있을까. -<살아보기 연습> 중 35쪽.
살아있다는 것은 크든 작든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아픔을 아는 것이고 그것들에서 벗어나려는 힘을 발휘하는 상태가 아니겠는가. -<내버려둠에 대하여> 중. 42쪽.
내버려 둘 것들을 내버려 두는 지혜야말로 이 나이의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내버려둠에 대하여> 중. 46쪽.
세상은 그 조금 때문에 조금씩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걸 모르나 보다. -<추억의 올드 팝> 중. 63쪽.
아이들은 그냥 꽃이다. 있는 것 자체로 향기로워지고 보면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럽다. -<서로 기대어> 중. 74쪽.
가을 햇빛이 참으로 밝다. 난 또 저 햇빛에 기대어 오늘을 살 것이다. -<서로 기대어> 중. 78쪽.
역시 9할이 사랑의 빚, 내 삶의 결산서다. -<부끄러움> 중. 82쪽.
사는 게 모두 숙제고 모든 숙제는 선택인가. -<어쩌지?> 중. 88쪽.
이파리 하나를 따서 수첩 속에 끼워 넣는 내 손등으로 바람 한 자락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나무와의 추억> 중. 93쪽.
숲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왔다. 아니다. 숲의 가슴에 우리가 안겼다. 언제나처럼 그는 너른 가슴으로 말없이 우릴 받아주었다. -<어떤 숲의 전설> 중. 127쪽.
그리고 나는 사람의 숲에서 그 숲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 어린 날의 숲, 솔향 가득한 그 숲을. -<어떤 숲의 전설> 중. 129쪽.
세상은 자기 아픔과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그냥 살아요’의 사람들 차지인 것을. -<그냥 살아요> 중. 133쪽.
어찌 보이는 길 만이랴. 알지 못하는 길, 보이지 않는 길도 많을 것이다. 가슴에 난 길도 있을 것이다. 만들어놓고 나는 못 다니지만 다른 사람이 다니는 길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올레길> 중. 197쪽.
그러고 보면 모든 삶이 길이고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올레길> 중. 200쪽.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던 죽음의 냄새 같은 것, 하지만 이게 진정한 사람의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기다림 없는 기다림> 중. 205쪽.
삶은 희망이다. 희망은 기원이고 바람이고 약속이다. 꼭 지켜지지 않더라도 꼭 지킬 수 없더라도 지켜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10년 후의 약속> 중. 211쪽.
신발은 그렇게 사랑받는 기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신발> 중. 217쪽.
그리움은 옅어지지도 바래지도 않게 가슴속에 피는 한송이 꽃이다. -<가슴 속으로 피는 꽃> 중. 224쪽.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고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어머니의 끈> 중. 234쪽.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중. 256쪽.
느낀다는 것은 보는 것보다도 훨씬 강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 267쪽.
사람도 향기처럼 사랑의 마음을 펴고 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향기만큼 사랑만큼. -<향기만큼 사랑만큼> 중. 278쪽.
약력
최원현 nulsaem@daum.net
1951년 전남 나주 출생.수필가·칼럼니스트·문학평론가.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이사장∙월간 한국수필 발행인∙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사단법인 국제펜한국본부 이사∙강남문인협회 회장(역임)∙·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부이사장∙수필세계·선수필·좋은문학·에세이포레·건강과생명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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