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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요양원
광합성의 기억을 잃어버린 나무가 이리저리 몸통을 굴린다 제 갈 길 잃어버리고 내비게이션이 정해준 위치에 따라 뿌리를 내린다 중증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고목은 고집스런 고철이 된다
황금빛 대리석으로 치장한 요양원에 고물들이 몰려든다 잇몸 주저앉은 나사못 팔목 부러진 곡괭이 사지가 뒤틀린 철제 사다리, 디지털 신제품에 내몰린 실버 연장들이 구석 방 창틀에 모여황금색 기저귀를 말리고 있다
용도 폐기된 서까래들이 빛바랜 침대에서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한때는 자랑스럽게 고래등을 떠받들었지만 이제는 고사목이 되어 요양보호사가 건네 준 빨대로 물과 햇빛을 받아먹는다
요양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고흐의 생레미 요양원이다. 고갱과 다투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후 스스로 찾아간 그곳에서 그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은 요양원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을 그린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별빛 아래 우울하게 솟아 있는 생레미의 모습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요양원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이라지만 실제로는 고향 네덜란드를 연상하며 그린 것이리라. 하늘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담은 것이 아닐까.
내가 꿈꾸는 요양원도 마찬가지다. 창밖으론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달구고 밤이 되면 별빛이 개울처럼 소리를 내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고향 하늘을 닮은 요양원.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요양원은 삭막한 도심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창문은 방범창으로 굳게 닫혀 있다. 정원이나 뜰도 있을 리 만무하다. 거리엔 자동차 소음만 가득하고 하늘은 미세먼지 투성이다. 바람과 꽃들은 기척도 하지 않고 별들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바야흐로 인간수명 100세 시대다. 넉넉잡고 70을 노년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도 족히 30년 이상은 노인으로 살아야한다. 9988234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99세 까지 팔팔하게 살고, 2,3 일만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메시지이다. 하지만 생로병사의 이치를 모두 겪는다면 늙고 병들어 살아야 하는 노년의 시기가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2000년대 초반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이후 이제 10년 후면 노인인구 20%를 초과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하는 고령화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재력과 건강이 아닐까. 그렇다면 은퇴 후 노년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은 얼마나 될까. 은퇴시기를 현재와 같은 65세로 잡고 향후 20년간 노후생활을 위해서 4,5억 가량이 필요하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건강을 담보로 한 일상 생활이 가능한 상태에서 말이다.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수족을 건사할 수 없는 경우라면 아무리 많은 돈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게 상책이 아닐까.
하지만 효(孝)를 근본으로 삼는 유교사회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별로 친숙하지 못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런 거부감에는 고려장이라는 풍습도 한 몫 기여했을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고려장이란 늙은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부모가 죽으면 그 구덩이에 묻어 장례를 치르는 풍습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패륜행위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설화는 ‘인간 70 고래장(高麗葬)' 이라 하여 고려시대까지는 그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설과 함께,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가 와전되어 고려장의 설화가 생겼을 뿐이지, 실제로 있었던 풍습은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래서일까. 벽에다 똥을 쳐 바를지언정 요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또한 현대판 고려장이라며 요양원을 거부한 현대판 심청이도 많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치매나 중풍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부모님을 온 종일 봉양에만 매달린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머니 방문 앞이 고요하다
대관령 굽이굽이 넘어가던 숨소리 들리지 않는다
헛기침으로 어머니 안부 묻는다
한발 늦은 걸까? 인기척이 없다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은 말랐는데
밤새 눈 덮인 소나무 숲을 지나
몇 굽이 넘어 태백산 같은 그곳으로
고추 팔러 다녀오셨는지
파도 넘실대던 숨소리 들리지 않는다
- 이은 <매일매일 문상 간다> 부분
아무 기척이 없는 어머니 방문을 열고이불깃을 당겨본다. 좀 전 까지 죽은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벌떡 살아나 밥 달라고 조른다. 갑자기 숟가락을 들고 식탁을 두드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아래 협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밤새 소변을 지렸는지 꽃순을 닮은 그곳이 젖어 있다. 어머니 방문 앞에서 으르렁 짖어 대는 강아지처럼 코끝을 세우고 꼬리를 치켜든다. 효(孝)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한다 하더라도 날마다 문상 가는 심정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버거운 일이 아닐까.
이토록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국가가 나누어지려는 것이 바로 노인장기요양법이다.
고령화 사회로 급속하게 진전함에 따라 요양보호가 필요한 노인의 생활 자립을 지원함으로써 가족의 부담을 줄여주고, 늘어나는 노인 요양비와 의료비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고자 도입된 공적 제도이다. 요양보호가 필요한 노인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 비용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 등으로 가정 내에서 이들을 케어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마침내 2007년 4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제정되었고,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었다.
장기요양신청 대상은 스스로 일상생활이 곤란한 65세 이상 노인과 65세 미만이더라도 치매, 뇌혈관성 질환, 파킨슨병 등 노인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다. 신청인의 심신 상태에 따라 '장기요양인정점수'를 산정하여 등급을 판정하며, 요양 1~5등급으로 판정 받을 경우 장기요양급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노인장기급여요양보험에 필요한 재원은 건강보험 가입자의 보험료와 정부, 본인 부담금 등으로 충당한다.
최근에 개원한 요양원은 대부분 안락하고 쾌적하다. 사회 보장으로서의 공적 기능과 경쟁을 바탕으로 한 자본의 논리가 합해져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드림 요양원, 연지곤지 요양원, 노블레스요양원 등 이름만 들어도 가히 짐작이 간다.
내가 촉탁의사로 방문하는 요양원도 마찬가지다. 최신식 건물에 최고급 인테리어로 치장하여 내부 환경이 쾌적할 뿐더러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보호자들이 자주 찾아오는 편이다. 요양원 원장과 요양보호사들도 친절한 편이어서 무척 편안해 보인다. 그렇지만 아무리 편안하다고 환자들의 심정까지 안락하지는 않는 것 같다.
100세 임박한 최고령 할머니는 마른 이파리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누워 계신다. 귀가 절벽이고 눈이 멀어 아무런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다. 부화를 앞둔 애벌레처럼 가끔 몸을 뒤척일 뿐, 배고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요의나 배변에 대한 감각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온종일 기저귀를 차고 요양보호사가 빨대로 떠먹이는 미음만 받아먹는다. 할머니의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마른 장작 같다. 할머니는 누구와 눈도 마주치지 않지만 가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사력을 다해 말하는 모습에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자아를 상실한 자의 자연스런 죽음 충동이 느껴질 뿐이다.
순대처럼 몸을 만 달팽이가 제 몸을 생중계한다 점액질의 언어로 회오리의 생을 낱낱이 토해내고 있다 껍데기 안테나로 대뇌피질을 자극하지만 종일토록 수신불가의 말들만 되새김질 한다 마침내 삶의 진액을 모두 소진한 달팽이가 혼백의 옷을 벗어 놓은 채 땅 속으로 기어든다 더운 바람이 불 때마다 난시청의 흑백화면처럼 지직거리는 알츠하이머 저 달팽이, 그 남루한 육필차트를 펜티엄급 외계어로 받아 적지만 달팽이가 지나간 모니터는 언제나 진액의 눈물로 끈적거린다
-졸시 <알츠하이머 달팽이> 전문
나이가 들면서 모든 생명은 그 기능이 서서히 퇴화한다. 고등생물인 인간에서 그 정도가 훨씬 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전두엽의 위축으로 일상적인 감정의 변화가 적어진다. 좋은 일 뿐 아니라 슬픔이나 외로움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단계까지 퇴행하면 어린애처럼 큰 소리를 지르거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경우 극도로 우울해지거나 무기력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마지막 생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날마다 성경을 필사하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컬러링 북은 정서안정 뿐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에 힐링까지 선사해준다. 누구나 고흐가 될 수는 없겠지만 고흐처럼 살 수는 있다. 햇볕드는 요양원 벤치에 앉아 돋보기 안경에 의지해 책을 읽는 어르신의 모습은 고독한 평화의 한 부분일 것이다.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일상을 꼬박꼬박 기록하는 분도 계시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고흐가 그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인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에게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주고받았던 편지처럼,
테오에게...
나는 성공이 끔찍스럽다. 인상파 화가들이 성공해서 축제를 열수도 있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축제의 다음날이다. 지금의 이 힘든 나날이 후에는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겠지.
글쎄, 적어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에서 잠들 수 있으려면,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된 실패를 피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려면, 고갱도 나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겠지. 바로 그 때문이라도 우리는 돈이 가장 덜 드는 곳에 정착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평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림을 얼마 못 팔거나, 전혀 팔지 못하더라도.
오로지 예술만을 지향한다면 요양원에서도 얼마든지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은퇴 후 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더 격정적인 작품을 쓰는 것처럼. 이제 말년의 삶을 사는데 요양원은 필수 코스가 되었다. 요양원에 간다고 해서 마치 삶을 포기한 듯 마냥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 요양원은 고려장이 아니라 영혼의 충전소가 되어야 한다.
나도 말년의 요양원을 그려본 적이 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모든 짐은 내려놓았으니 다가올 날들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일 터.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도, 밤늦게까지 고민할 이유도 없다. 더 이상 자동차에 시동을 걸지 않아도 되고 논쟁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된다. 뉴스와 이슈에 민감하지 않게 되고, 지구 반대편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평생 지키느라 허덕거린 알량한 자존심도 물처럼 흘려버리고 너그럽게 사물을 관조하게 되는 말년의 요양원에서 나만의 노블레스를 꿈꾼다. 풍경화처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자연과 만나 꽃들과 대화하고 바람에게 근황을 묻는다. 그러려면 요양원은 빌딩숲에서 벗어나야한다. 요양원은 생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기착지다. 압셍트에 붓질은 아닐지라도 뜨끈한 커피 한 잔 마시며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늘 벼르기만 하고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던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장씩 넘기면서 아름답고 치열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살아낸 삶의 기억들을 건져올린다, 마들렌을 곁들인 커피를 마시며 '노블레스'한 노년을 꿈꾸어 본다. 다분히 왜곡되어 있겠지만 그렇게 짧고 긴 기억들, 짧고 긴 슬픔을 되짚어 볼 수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요양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문학청춘』 2016년 가을호

첫댓글 그러게요. 많은 것을 내려놓고 그 빈 자리에서 새로운 기쁨과 슬픔을 길어올리는 말년의 행운을
톡,톡 두드려 볼 일입니다
아, 이 산문 읽어야 하는데 이연종샘, 미울거야욤! 찜! 다녀와서 밤중에 읽겠습니다.
허걱 !! 姓폭력을...
@조재형 앗! 제가 286 버전이라 한참 걸렸습니다.
요즘 한국 문단에 유머는 부족하고
여혐, 남혐은 넘쳐난다 소문이 왁짜합니다. 조심조심 제 죄를 들킵니다.
아무리 여혐,남혐이 넘쳐나도 姓폭력은 바로 잡아야 한다.ㅋㅋ 김연종올림
고호의 편지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우린 서로 들키지 않아야 합니다.
포문회 때문에 평온을 빼앗기는 어제 오늘입니다. ㅎ 더 이상 들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노블레스 요양원, 입주 대기 1번!
새로운 요양원 문화가 필요한 것에 동의합니다. 근데 그 4.5억 어떻게 마련하지요?
비엔나 근교 베토벤 기념관을 찾아가다 만난 본 요양원들이 생각납니다.
일부러 들어가보기도 했습니다.
깨끗하고 배려 가득한 것 같고~
주변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포문회의 앞으로 사업 계획에 넣어보시면 어떨까요?
영혼의 충전소인 요양원에서
서로의 시를 낭독해주며 "프루스트'를 읽으며 커피 한 잔!
#고흐作 _1889년 9월에 그린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에 머무는 동안 빛의 힘을 발견했던 빈센트에게 이 작품은 그의 예술을 향한 도전이었고 꿈의 실재화였다. http://twitpic.com/75i4l0
저는 테오의 고독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김연종 샘은 나중에 꼭 산문집을 내셨으면 합니다. 이미 냈는지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