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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
백석대 이승진 교수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연구의 필요성
21세기 초두에 교회 침체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예전의 교회 성장기를 구가할 당시의 전통적인 설교를 내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어울리는 새 설교를 찾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그동안의 성공 사례를 비추어보면서 나름대로 교회 성장에 적합하다싶은 모종의 한국식 설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내용 면에서는 기복적인 맥락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강조하거나 청중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찰나적 해답을 담고 있으며, 형태 면에서는 3대지를 기본 축으로 하는 설교가 80년대 이후 한국교회 안에 교단에 관계없이 전방위적으로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처한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해가고 있다. 군사독제 체제하에서 정치적으로 짓눌리며 경제적으로는 물질적 부를 갈구해야만 하는 척박한 상황에서 그나마 교회에 와서는 ‘좋으신 하나님’에 관한 설교와 실용적인 메시지로 위로를 맛보았던 회중은 80년대 이후에 찾아온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90년대 이후 삶의 질의 향상과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복지의 향유와 그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만족감 속에서 기존의 설교에 점차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영적인 기상도를 분석하면서 ‘점점 끓어가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예전에 교회 성장을 가져다주었던 설교에 만족하면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교회 성장 신화를 내던져버리고 ‘누군가가 옮겨버린 치즈’를 찾아 나서야 한다.
올바른 설교의 회복을 위해서 과거의 설교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설교 역사는 구원사적 의의를 지닌 설교의 원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대를 위한 올바른 설교의 좌표는 과거의 설교 역사가 보여주는 올바른 선례들을 비교 연구하는 가운데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7세기에 영국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왕성하게 빛을 발했던 청교도주의가 점차적으로 그 위력을 상실해가면서 세속화로 치닫던 상황에서 복음의 능력을 새롭게 구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그의 설교 사역을 중심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의 신학 사상의 심오한 깊이와 자료의 방대함 때문에, 그리고 역사 연구는 과거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와의 비평적 대화인 까닭에, 본고에서는 주로 그의 설교 사역을 살펴보되 특히 침로를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한국교회의 설교를 위한 교훈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설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설교를 연구하고자 한다. 본론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후대 연구자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자였으며1) 이러한 설교 신학적 이해는 그의 설교 내용과 전달 방법상의 특징들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표류하는 한국교회의 설교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에드워즈가 견지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일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법으로 설교하였을까?
2. 설교 역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비중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교회사가나 신학자들의 평가는 참으로 화려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맥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에베레스트에 비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또 현재 미국 학계에서는 300년 전에 활동했던 그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2). 그들은 에드워즈를 서구 신학의 거장들인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루터, 칼빈과 대등한 인물로 본다. 탁월한 설교자이자 신학자로도 활동하였던 그가 남긴 학술자료들로는 설교했던 것들을 후에 출간한 수 십 권의 저서와 1,200여편 이상의 설교문, 그리고 개인서신들과 메모들이 방대하게 남아 있다. 또 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전집 27권이 예일 대학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대학들에서 계속 출판되고 있으며, 그의 생애와 사상들이 세계 유수 대학들의 박사 학위 논문이나 정상급 학자들의 연구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18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설교자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2천년 설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비중은 두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의 역사에서 특히 제 1차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에 있었으며 둘째로 에드워즈는 이러한 영적인 현상을 현미경적인 구도로 세밀하게 기록함과 아울러 무엇이 참된 부흥이고 거짓된 부흥인지를 실제적인 동시에 심층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이후의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먼저 에드워즈는 조지 휫필드와 함께 1740년부터 약 2년간 발생한 제 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부에서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1차 대각성 운동의 불길이 뉴잉글랜드 지역을 휩쓴 데는 그보다 약 5-6년 앞서서 에드워즈의 노샘프턴 교회를 중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던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의 도화선이 나름대로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734-1735년 사이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가 속한 햄프셔 지방에서 알미니안주의가 득세를 하면서 기존의 칼빈주의가 힘을 잃어가는 것을 우려하면서 일련의 설교를 전하였고 이런 설교들이 놀라운 회심들을 유발하였다.3)
에드워즈는 이러한 특별한 부흥의 전말을 편지로 벤저민 콜만 목사에게 보고하였으며, 1736년에는 「노샘프턴에 있는 수백 명의 회심 속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충실한 서술」(Faithful Narrative on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hampt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4). 기록에 의하면 불과 6개월 사이에 300여명의 새로운 회심자들이 에드워즈가 사역하는 교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던 교회 젊은이들이나 성도들 모두가 모일 때마다 예외 없이 내세와 영혼,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또 1735년 봄과 여름 동안에는 마을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구원의 기쁨이 넘쳐났고 교회도 변화하여 모든 교인들이 열심히 참석하는 주일 예배는 생기로 넘쳤고 설교가 선포되면 교인들은 그것을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며 찬양에도 활기가 넘쳐났다.
1735년의 부흥 이후 4-5년 후에 발생한 제 1차 대각성 운동은 그 규모나 부흥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영적 성숙과 관련해서 이전의 부흥 운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에서 발생했던 1차 대각성 운동은 물론 고아원의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조지 휫필드의 설교로 발생하였지만 에드워즈의 요청에 의하여 휫필드가 노샘프턴 교회에 방문하여 설교하면서 자연히 에드워즈와 그의 교회 역시 1차 대각성 운동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1740년 가을 휫필드의 방문을 계기로 노샘프턴 교인들은 신앙 문제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으며, 다음 해 1741년 5월에 에드워즈가 어느 가정집에 모인 무리들에게 설교하자 성도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 그리고 영원한 일들의 무한한 중요성에 대한 감각에 압도되었다. 영적인 깨달음과 감동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주 집회 때마다 성도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런 부흥 운동은 1742년 초기까지도 계속되었다.
한편 1차 대각성 운동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중인 1741년 9월에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 졸업식에서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성령의 역사의 구별되는 표지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를 통해서 대각성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대각성 운동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조목 조목 반박하고, 이 부흥 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성경적 증거를 다양하게 제시한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심층적인 분석과 연구는 한 편의 설교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 1742)와 「종교적 정서」(Religious Affections, 1746)의 집필과 출판으로 이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2천년의 설교 역사 속에서 침체된 교회의 부흥을 촉발시키고 주도하는 설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그렇게 발생한 부흥 운동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아울러 바람직한 신학적 및 성경적 토대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면, 그의 설교와 신학적 토대 속에서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유념해보아야 할 설교적인 교훈은 무엇일까? 300년이나 흘러버린 과거의 설교자로부터 오늘의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설교적인 교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한국교회의 설교 현장을 염두에 두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살펴보았던 필자의 마음에 크게 부각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자로서의 설교적인 대원칙을 하나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명분으로 어느 책 속에 파묻어둔 것이 아니라 실제 설교 현장에서 그는 이 대원칙을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인 설교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의 추구는 그의 전체 설교 사역을 지지하는 하나의 설교신학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평생 전했던 설교의 내용인 동시에 실제 설교의 방법으로 표출되었다.
3. 설교의 내용: 중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성도
1)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구원
존 파이퍼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모든 사역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고 한다.5)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에드워즈의 관심사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 성경에 아주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목적은 가장 적절하게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린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기도 하며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충만이 수용되기도 하고 되돌려지기도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도 있고 환원도 있다. 광채가 피조물에 비쳤다가 다시 발광체로 되돌아간다. 영광의 광선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속해 있고, 다시 원래의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시작이요, 중간이며, 끝이시다.6)
무한히 거룩하시며 자족하고 만물을 충족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천지 창조의 동기이자 궁극적인 목적일 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도 결국은 자신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려는 목적(엡 1:6) 때문이라고 평생 확신하였다7). 그리고 에드워즈의 모든 사역에서 가장 큰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하나의 추상적인 교리나 공허한 사색의 편린이 아니라 실제 설교행위를 지지하며 실제로 외쳤던 설교의 내용으로 표출되는 설교내용의 대명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관하여 연구한 존 파이퍼에 따르면 조나단 애드워즈의 모든 설교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설교”로 모아진다고 한다8).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애드워즈는 죄인을 변화시키려는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신자들이 성령의 내주하심에 따른 거룩한 정서를 체험하여 자신의 선택받음과 구원받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평생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유도하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하나님 안에 거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만물 속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함에 있어서 자연히 그 설교의 내용은 성도의 구원과 성화의 삶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에드워즈가 평생에 걸쳐서 일관되게 강조하였다는 구원에 관한 설교는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와 비교하여 다음 몇 가지의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구원의 순서가 그러하듯이 에드워즈의 설교에서도 구원에 관한 설교는 먼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그리고 지옥에 대한 경고가 강하게 나타난다. 둘째로 구원에 관한 에드워즈의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실체를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행위의 조건이나 도구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 맺음과 연합, 그리고 그 안에서 약속된 칭의의 누림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 구원에 관한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특이할 점은 성령의 내주하심에 관한 분명한 체험과 외부적인 행동의 변화를 강하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2) 인간의 죄악과 지옥의 심판에 관한 설교
에드워즈의 구원에 관한 설교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그리고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지옥의 형별에 대한 경고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 1차 대각성 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1741년 6월 8일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인근의 앤필드라는 마을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이란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에서 에드워즈가 지옥에 대해서와 죄인들의 멸망 위험에 대해서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했던지그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마치 자기들이 당장 지옥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느껴 울부짖으며 예배당 기둥을 끌어안고 매달렸다고 한다.9) 지금도 미국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이 설교문에 담긴 죄인들을 향한 설교자의 심리적인 압박의 강도는 그냥 설교문을 읽어가는 중에라도 예외 없이 독자의 가슴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상에 있는 큰 무리들에 대해 훨씬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실 것입니다. 지금 지옥의 불 속에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보다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평안하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잡은 손을 놓아 당장에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지 않는 것은 그들의 악함을 생각지 않거나 분개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들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으며, 저주는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저갱이 준비되어 있고, 불이 이미 예비되어 있으며, 용광로가 활활 타올라 뜨거워져 있어 그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불꽃이 격노하게 거센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이 뽑혀서 그들을 향해 내려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저갱이 그들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10)
이러한 무시무시한 지옥 설교에서 에드워즈가 회개치 않은 죄인들이 받을 형벌의 실상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제시하면서 듣는 청중의 심령을 뒤흔드는 설교를 전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의 실체와 그 죄악이 가져다주는 비참한 결과를 절감하고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더욱 확고히 붙잡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질문한다.
여러분이 지옥에 던져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지옥의 형별로부터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기꺼이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죄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죄에 대한 속죄의 제공 자체가 하나의 명예훼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지도 않은 죄책에 대한 고소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11)
자신의 죄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에 관한 은혜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으로 말해서,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즈는 확신하였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12). 그래서 에드워즈가 이렇게 인간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지옥의 실상을 과감하고도 적나라하게 선포할 때 그 심중에는 나름대로 율법과 복음의 균형과 조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직 율법만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은 다른 것들을 너무 적게 설교할지 모른다. 율법뿐 아니라 복음도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만일 율법의 공포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그의 목적을 망각해 버리고 복음의 설교를 소홀히 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들은 아주 많은 것을 놓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아주 많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복음의 설교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13)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자로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그 양심에 통회하고 각성하는 수준과 질이 그 이후의 신앙생활을 좌우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청중으로 하여금 죄악의 실상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도록 하는 가정을 대단히 중시했다14)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필연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낳고 죄를 버리고 죄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지옥 설교를 강하게 선포했던 에드워즈의 목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율법의 요구에 철저히 직면함으로써 은혜를 통한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허영을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15) 그렇게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붙들 때 비로소 그 성도는 죄로부터 떠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에드워즈의 설교는 오늘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인간의 죄악을 추궁하고 그 죄의 악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무서운 실상들을 적나라하게 선포했던 에드워즈의 설교는 확실히 한국 교회 강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일이 되어버렸다. 설교 현장에 참여한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직면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그저 복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을 편향적으로 전하는 설교로 말미암은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그런 설교는 자존심에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으며 내면의 은밀한 비밀들이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현대인의 취향에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설교로는 성도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신앙생활의 본질, 다시 말해서 성도가 매 순간 순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주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사랑을 누리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공로를 기억하면서 이를 의지하고 붙드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며 그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신앙생활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신앙생활의 토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무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복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별로 괘념치도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를 요청하려고 다가갈 때에는 늘 우리의 요청에 즉시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복을 퍼붓지 못해서 안달 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런 복락을 우리가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무언가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서 전혀 그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옹졸한 분이다. 이런 산타크로스같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도 별로 괘념치도 않으시는 분이며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향한 자신의 불같은 진노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도 아니다. 율법이 빠져버린 설교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이미지의 하나님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은 십자가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성도들이 의지해야 할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힘과 양식으로 삼아야 할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영적인 양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는 한낱 허공을 치다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율법이 없이는 복음도 제 빛을 발휘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훈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 작업은 애드워즈가 역설했던 인간의 죄악과 이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다시금 가감 없이 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3) 중생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강조하는 설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의 내용으로부터 오늘의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설교적 교훈은 중생의 체험에 대한 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중심부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부흥 운동의 불길은 무엇보다도 중생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나 양낙흥의 지적과 같이 에드워즈는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 사람들을 중생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중생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떻게 중생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의 목회와 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이나 중생에 관하여 제한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노병기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칼빈과 웨슬리의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을 자세히 파헤치고 있다16). 에드워즈에 의하면 중생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은혜(성령)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작용에 의하여 주입되고(infused),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산출하셔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은혜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중생은 칭의보다 선행하며,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 성령의 주입이며 그렇게 주입된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신다17). 그리고 성령은 그 성도 안에서 생명의 원리 그리고 지각과 행동의 원리가 되신다. 이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효과적인 부르심이나 회심(conversion), 회개(repentance), 중생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러한 애드워즈의 중생에 대한 관점은 분명 칼빈주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지만, 그러나 노병기의 연구에 의하면 칼빈의 견해와 다른 점도 있으며 웨슬리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먼저 칼빈과 비교하여 에드워즈는 중생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면은 비슷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권적으로 그리고 즉시 부여주심으로 절대적으로 죄인을 변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심지어 칼빈도 에드워즈가 염두에 두는 중생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은 우리의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18) 그러나 에드워즈에게 중생은 일평생의 과정이 아니라 즉시로 주어지는 것이다. 노병기의 연구에 의하면 이 점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칼빈과 다른 동시에 웨슬리의 중생관과 일치한다고 한다. 결국 18세기에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존 웨슬리와 같은 세기적인 설교자들에 의하여 부흥 운동의 불길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본인 스스로의 극적인 회심(중생) 체험과 아울러 중생 사건의 단회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에 대한 확신이 그 내면에 자리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이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9).
하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극적인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20) 에드워즈의 중생론의 약점은 회심 이후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 아래서 점진적으로 성숙해 가는 성화의 과정을 인정하는 칼빈의 중생론과 지나치게 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회심 이후의 성도의 신앙 성장이나 이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는 동일한 비중을 두지 못하였고, 노병기는 1750년 6월에 에드워즈는 40대 후반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그가 23년간 섬겼던 교회 성도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교회를 사임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21) 해임의 직접적인 발단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기준과 관련하여 에드워즈의 선임자였던 스토다드의 입장과 에드워즈의 입장이 너무 차이가 났었기 때문이었다. 스토다드는 구원에 이르는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확실하지 않아서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는 상태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느슨한 기준 때문에 에드워즈가 부임하여 계속 목회하던 노샘프턴 교회 안에는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미지근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꾸려가는 성도들이 많았다. 하지만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극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성도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며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거나 또는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도록 방종하는 것은 목회자의 치명적인 직무유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앞에 회심 체험에 관한 공개적 진술을 성찬 참여의 기준과 자격으로 요구하였고 수십 년간 느슨한 기준에 만족했던 교인들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고 결국 해임되고 말았다.
노병기의 지적과 같이 성령에 의한 극적 회심을 강조하는 에드워즈의 중생론도 회심 이후의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중시하는 칼빈의 중생론과 서로 조화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안고 있지만 그러나 18세기 부흥 운동의 원천이랄 수 있는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복음의 영광이 점차로 희미해져가는 조국 교회의 강단을 향하여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교회에 출석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하고 불신자들을 끌어모아 교인 수 늘리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음”을 비판한다22). 서철원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마지못해 나오긴 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가 계속 나오게 되면 회개에 대한 점검이 전혀 없이 교회의 직분을 맡겨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세속화와 탈기독교화가 쉽게 이루어진다.... 한국교회는 사람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는 일에는 참으로 열심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하는 데는 무력하다23)
한국교회에는 성도들의 확고한 중생의 체험과 확신을 위해서 나름대로 계절별로 부흥회나 특별집회를 통하여 중생의 도리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지만, 에드워즈가 견지하고 선포했던 것과 같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극적인 회심 체험에 관한 확신도 부족하고 또 이 체험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성도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미워하며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섭고 공의로운 진노와 심판을 인식하도록 심령을 난도질할 수 있는 죄악과 지옥에 관한 설교도 거의 사라진지 오래이다. 성도들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한 죄씻음과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기본 교리들을 다 알고 있으려니 짐작하면서 인간의 죄악의 실상에 대한 과감한 노출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강조하는 복음 설교(혹은 전도 설교)를 등한시 하고 있다24). 김서택 역시 이 점을 늘 지적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복음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간주해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설교의 내용도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간단한 윤리적 교훈을 가르치는 정도로 전락해 버렸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25)
한국교회는 설교를 내용에 있어서나 또는 교인의 영적 성숙을 관리하고 직분을 맡기는 경우에 교인의 영적 상태나 수준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거나 너무 수준 높게, 다시 말해서 이미 확고한 중생의 단계를 넘어서버린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그 결과 설교 시간에는 중생의 문제를 자주 다루지도 않으며 또 다양한 교회 사역 속에서도 신도의 중생 문제를 전혀 중시하지 않고26) 외형적인 성장에 집중하면서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설교자들은 성도의 회심과 중생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욱 엄격한 잣대를 제시하는 설교를 해야만 한다. 인간의 죄악의 끔찍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며 그 죄악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준엄히 선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죄악을 태우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자신 역시 자신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죄악의 실상과 직면하여 이 죄악을 하나님과 함께 증오하며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죄인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 죄악에 대한 철저한 증오와 격리,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에 직면하여 율법의 굴레 속에서 죄악과 함께 죽는 순간, 그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은 죄인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그 은혜의 고귀함을 철저히 깨달을 때 비로소 그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의 비밀을 깨달으며 그 연합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은혜와 영광을 풍성히 누리며 다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4. 설교의 방법: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성도의 정서적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에드워즈의 설교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전달 방법의 차원에서도 한국교회의 설교를 향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적용에 대한 강조와 정서적 변화와 체험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1) 적용에 대한 강조
에드워즈는 아버지 디모데와 외조부인 솔로몬 스타다드로부터 설교를 배웠다. 디모데 에드워즈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하버드 대학 출신이었으며 그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아들 조나단은 몇 차례의 부흥을 목도하는 가운데 설교의 영광과 능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또 코네티컷 강 골짜기의 교황(Pope of the Connecticut River Valley)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목사였던 외조부 스타다드도 부목사로 동역하는 에드워즈의 설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27). 한편 에드워즈의 설교 방법이나 형태에 직접 영향을 준 설교학 도서로는 당시 청교도 목회자들이 “설교 교본”으로 널리 사용하였던 월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 1592)과 에드워즈의 독서 목록에도 직접 나타나는 존 에드워즈(John Edwards)의 「설교자」(The Preacher, London, 1705)와 코튼 마더(Cotton Mother)의 「목회교범」(Manuductio ad Ministerium, Boston, 1726)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은 청도교 설교자들의 설교 구조에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성경본문의 해설과 교리적인 설명, 그리고 적용점 제시의 3단계로 이어지는 설교의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28). 니콜라스에 의하면 윌리암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이 제시하는 본문-교리-적용 순의 설교의 구조가 에드워즈의 설교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29).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적용 부분이다. 존 파이퍼의 분석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모든 설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적용 부분이라고 한다30). 모든 설교에 대해서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인 설교와 비교하여 적용의 분량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호세아 5:15절을 가지고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시기 전에 먼저 비참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전하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설교 앞부분에서 먼저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이어서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기 전에 자기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는 교리를 확립하고 설교 전체의 중간부터 “1. 상존하는 위험을 경계하라”, “2. 죄에 대한 자각을 지속하라”, “3. 보배로운 기회를 놓치지 말라”, “4. 나온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5. 부지런히 일관성 있게 나아가라”는 내용의 적용적인 메시지를 줄기차게 제시한다31). 그렇게 함으로써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의 교리적인 내용을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리적인 내용과 관련된 행동의 결단과 다짐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형이상학자이자 최고의 철학자였지만 추상적인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를 거의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에 대한 거룩한 정서와 열망을 갖도록 하려면 그 설교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실행 가능한 차원에서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그렇게 실행하도록 강력하게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적용을 강조하는 설교는 많은 설교가 선포되고 있지만 대부분 지적인 이해 차원에 머무르고 정작 행동의 결단과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국교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 속에서 적용의 중요성을 올바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기도에 관한 설교에서 “매일 30분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라는 식의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에드워즈의 적용 중심의 설교가 던지는 교훈은 단순히 그가 제시한 적용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는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청중의 행동의 변화를 향하여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청중의 정서와 감성을 두드릴 때 그가 간파했던 청중의 감성터치의 중요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9-31절을 가지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전하는 설교의 앞부분에서도 에드워즈는 먼저 “1. 구속받은 자들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뢰”와 “2. 구속의 역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정리한 다음에 후반부에서는 “1.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라”, “2. 왜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의지하지 않는가?”, “3. 믿음의 언어를 발하라”, “4. 하나님만을 자랑하라”고 적용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32).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설교 교과서의 기준으로 볼 때 이러한 적용적 메시지들은 일견(一見) 별로 구체적이지 못한 메시지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느낄 수 있는 적용적인 강점은 그 내용이 얼마나 실천 가능하고 구체적인 메시지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고,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에드워즈의 간절한 신앙적 확신과 아울러 청중 역시 이러한 확신을 소유하고 이를 그들의 삶 속에서 다양하게 준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청중의 심령과 정서를 두드리고 변화시켜야겠다는 청중의 정서에 대한 그의 통찰과 이를 위힌 그의 집요한 언어적인 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회심 체험과 성결을 위한 정서적 자극
설교 방법과 관련해서 에드워즈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설교로 청중의 심령을 자극하여 영적인 체험과 종교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잠깐 살펴본 바와 같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2천년 설교 역사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는 18세기 부흥 운동의 중심부에 활동하면서 부흥 집회에 나타날 수 있는 성도들의 감정적 반응과 체험의 정당한 중요성을 직시함과 아울러 이 부분에 관하여 현미경적인 관찰과 분석,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와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는 무엇인지를 실제 사역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직접 참고로 하면서 심층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종교적 정서」라는 책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종교적 정서가 없다면 참 신앙도 없다고 단정한다.33)
여기에서 에드워즈가 말하는 강조하는 정서(affection)는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보다 왕성하고 감지될 수 있는 활동들"(the more vigorous and sensible exercises of the inclination and will of the soul)을 의미한다.34)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중시했던 거룩한 정서 혹은 종교적 정서의 의미는 인간의 내적 자질을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로 구분하는 3분설과 달리 지성적 능력과 경향성(inclination)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분설을 거부하는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두 개의 기능 혹은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본다.35) 하나는 지각하고 사색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분별하고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분별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대상으로 기울어지는 기능이다. 성향(혹은 경향, inclination)이라고 불리는 이 후자의 능력은 행동과 관계될 때에 의지(will)라고도 불리며, 정신(mind)과 관련될 때에는 마음(heart)이라 불린다고 에드워즈는 구분한다. 에드워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의 기능으로서 이러한 성향 혹은 끌림(inclination)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한 끌림이나 호감이 강하면 그것은 사랑의 정서(the affection of love)가 되고 어떤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이 강하면 그것은 증오의 정서가 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의지적인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나 정서와 뗄레야 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에드워즈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신앙의 정서,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교적 정서를 일으키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청중들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감정으로 영향을 받고 그들의 감정이 상식을 뛰어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목회자들이 청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에는 문제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청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 영향을 받고, 직접 받아들이는 본질에 해가 되지 않는 감정들로 영향을 받습니다36).
물론 에드워즈는 근거 없는 내용으로 거짓된 감정을 부추기면서 청중을 조작하는 설교에 대해서도 비판하였지만, 그 반대로 그저 지식의 전달만을 강조하는 메마른 설교에 대해서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머리에 축적되는 지식의 설교를 원치 아니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37)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불은 없고 빛만 있다면, 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없이, 성령의 뜨거움도 없이, 하나님과 선한 영혼에 대한 열정도 없이 지식으로 가득 찬 설교를 한다면 이는 듣는 이의 귀를 긁어 줄 뿐이며 공허한 것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채우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다를 수도 없고 영혼을 구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38)
설교에서 지성과 감성을 결합하여39) 청중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항한 거룩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전통적인 인상 중의 하나는 그는 원고를 읽어가는 무미건조하고 열정 없는 설교자의 이미지이다.40) 하지만 최근에 킴낙(Kimnach)의 연구에 자극을 받은 짐 에하드(Jim Ehrhard)는 딱딱한 자세로 청중과는 아무런 교감이 없이 그저 설교 원고를 읽기만 했어도 청중 가운데 엄청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 미스테리한 원고 설교자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오히려 에드워즈는 원고를 작성했음은 물론이지만 그 원고를 무미건조하게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요약노트를 준비해서 설교했거나 청중과의 자유로운 교감을 위해서 즉흥식 설교(extemporary style of preaching)를 했을 가능성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41). 에하드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무뚝뚝한 원고 설교자의 이미지로 각인시키된 결정적인 계기는 에드워즈 사후 2세기가 지난 1829년 경에 세르노 드와이트(Serno Dwight)가 “에드워즈가 기록한 설교문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읽기 어려워서 코 가까이 가져와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드와이트가 여기에서 언급했던 것은 에드워즈의 설교 전달 스타일이 아니라 설교문 기록 방식이었다.42) 짐 에하드는 이 외에도 에드워즈를 청중과 전혀 교감을 나누지 않고 무작정 원고를 읽기만 하는 딱딱한 설교자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교 원고를 읽는 것을 철저히 비판하였던 그의 외조부 스토다드의 영향을 에드워즈가 충분히 받았으리라는 점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조지 휫필드의 즉흥 설교를 직접 목격한 설교자로서 원고를 읽어가는 방식보다는 18세기 당시 부흥운동의 현장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끌고 있던 즉흥설교의 위력을 직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에드워즈의 제자이자 동시대 인물로서 에드워즈에 관한 전기(1764)를 출간하였던 새뮤얼 홉킨스의 기록에 따르면 설교를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후(대략 1742년 즈음)부터 에드워즈는 완벽한 설교문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근거로 에드워즈에 관한 전통적인 이미지를 걷어내고 청중과 자유로운 교감을 가진 열정적인 설교자였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에드워즈의 설교 전달 방식을 직접 목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 한 가지는 에드워즈는 설교를 듣는 청중 편에서 종교적 정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서는 참 신앙도 형성될 수 없다고 평생 확신하였으며 청중의 내면에 회심의 체험과 성결을 향한 종교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노력이 때로는 적용 중심의 설교나 청중의 심령을 자극하는 생생한 이미지와 은유의 구사, 혹은 단회적 결단의 영속적인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으로 나타났다. 설교 전달에서 에드워즈가 쏟은 노력과 헌신을 살펴보면서 오늘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도전을 받아야 할 점은 청중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를 이끌어내는 것을 설교전달의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서 이를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전략들을 동원하였다는 점이다. 에드워즈가 사용했던 방법이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종교적 정서가 없이는 참 신앙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를 이끌어내는 것을 설교 전달의 일차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에드워즈의 통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고 있다.
결론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을 감당하였다. 오늘 한국교회는 에드워즈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3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설교자로부터 오늘 우리는 어떤 설교적인 교훈들을 배울 수 있을까? 퇴색해버린 과거의 화려한 교회사적인 영광이라도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함직한 것도 있다. 한국교회 안에 복음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소원하는 우리가 에드워즈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설교학적인 교훈은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성도가 이런 자세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확고한 회심 체험을 가져야 하며, 평생 정결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설교를 통하여 중생의 도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그 도리가 삶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적 정서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설교자는 그러한 확신 속에서 설교 전달에서 실제 삶으로 이어져야 할 교리적 적용을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설교. 한국교회는 여전히 이런 설교를 필요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