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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의 시학
김영범
ARCADE 0017
2023년 1월 20일 발간
정가 27,000원
A5(138×210)
양장본
290쪽
ISBN 979-11-91897-47-0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문학의 방법론이 유효한 이유가 있다면
결국에는 타자의 선택을 기다린다는 데 있다
[증상의 시학]은 김영범 평론가의 첫 번째 비평집으로, 「지금-여기의 비극과 리얼리즘」, 「불가능한 정치, 가능한 시」, 「‘증상’의 시학—이영광론」 등 19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김영범 평론가는 197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3년 [실천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한국 근대시론의 계보와 규준] [신라의 재발견](공저), 평론집 [증상의 시학]을 썼다. 2022년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 슬라보예 지젝이 재전유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에 적힌 이 구절은 김영범 평론가가 펴낸 [증상의 시학]의 누빔점에 해당한다. 김영범 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오늘의 시는 부정성으로, 즉 헤겔이 말했던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패라는 진무한’을 경유하여 미결정의 영역을 개방하는 여정이며, 비평의 전망을 초월한 어떤 불가지로의 이행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기해야 할 사실은 앞선 문장에 적힌 ‘실패’란 비평(담론)의 ‘(잠정적인) 실패’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선 비평이 일종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인데, 그보다 본질적인 사태는 “그것들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보증할 근거들이 생성 중인 역사의 현장”에서 비평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평은 더더욱 자신의 필패를 포월해 “작품 속의 ‘잉여’를 발굴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미래를 예견”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영범 평론가가 제안하고 실행하는 비평의 과정은 상당히 바디우적이다. 아니 바디우보다 더 바디우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실패라는 진무한’, ‘여정’, ‘초월’, ‘이행’ 등이 끌어당기는 ‘충실성(fidelity)’은 ‘진리’를 향한 과정이라는 문맥보다 ‘사건’을 현행화하고 ‘진리’를 지금-여기에서 가동시키는 실천의 장소로 비평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이 “작품 속의 ‘잉여’”를 향해야 하며 그것이 “초래하는 미래” 곧 ‘미결정과 불가지의 영역’ 달리 말하자면 타자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저 없이 단언컨대 이것이 “문학이 육박해 오는 ‘리얼’한 세계”를 마주한 자의 최소한의 윤리이자 최대한의 사랑이지 않겠는가. [증상의 시학] 곳곳에 맺혀 있는 “우릿”한 “통각”은 요컨대 김영범 평론가가 “‘실패라는 진무한’을 경유”해 ‘개방’한 우리 세계의 ‘리얼’인 것이다. 절절하고 도저한 책이다.
•― 책머리에
지금-여기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은 인문학의 공통된 과제이다. 인문학이 과거를 주시할 때,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그것은 현재의 유래를 살피고 미래로의 노정을 세우는 데 참조점이 된다. 하지만 현재를 바라보는 인문학은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눈앞의 시공간에서 각축하는 여러 세계관들을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보증할 근거들이 생성 중인 역사의 현장에서 인문학자는 이를테면 바디우가 말한 ‘충실성(fidelity)’ 이외에는 기댈 데가 별로 없다. 미래를 얘기할 때는 더욱 곤혹스럽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한 갈래인 문학의 방법론이 유효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문학이 다기한 가치관의 존재와 그것들의 충돌을 제각기의 시선으로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타자의 선택을 기다린다는 데 있다. 문학작품들은 저마다가 목도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묘사하거나 나름의 가치판단들을 표명하나, 이러한 다각성과 수동성으로 인해 한 시대를 수놓는 정신들의 장엄한 풍경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문학은 몇몇 작가나 시인만이 아닌 동시대인까지 세계의 실상을 파지하고 미래를 견인하는 주체로 초대한다. 이 점이 문학의 역능이라면 역능일 것이다.
주지하듯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상기시켰던 인류의 유년이 상실된 후, 문학은 총체성의 원환이 파괴된 세계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골드만의 [숨은 신] 역시 그러한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를 탐색하는 과정에 놓인 역설을 보여 주었다. 이런 까닭에 근대 이후의 소설은 말하자면 ‘붕괴를 드러내기’로써 정립되었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반면 시는 이와 같은 소설의 전략과 더불어 ‘내면성으로 극복하기’라는 방법을 병행해 왔다. 일테면 시에서 낭만주의는 붕괴된 세계로부터 비상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은총을 내리려는 시도였다.
문학비평의 기본적인 기능이자 일차적인 목적은 문학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밝히는 일이다. 하지만 문학은 진공 속에서 배출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문학비평의 또 다른 기능과 목적은 작품이 배태된 현실과 그것에 대한 창작자의 시선을 공히 탐침함으로써, 인간 삶의 개별성에 내재하는 보편성을 짚어 내고, 이것을 가능케 한 세계의 특수한 구조를 작자 그리고 독자와 함께 들추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문학의 근황을 살피고, 그 속에 잠재하고 있는 문학의 미래 나아가 세계에 대한 전망까지 내다보는 것은 비평가들의 공통된 바람이자 의무일 터이다.
•― 저자 소개
김영범
197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3년 [실천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한국 근대시론의 계보와 규준] [신라의 재발견](공저), 평론집 [증상의 시학]을 썼다.
2022년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 차례
005 책머리에
제1부 조우
015 지금-여기의 비극과 리얼리즘
032 불가능한 정치, 가능한 시
043 초대하지 않은, 리얼리즘
060 조우와 수렴
제2부 증상
073 ‘증상’의 시학—이영광론
101 정체성의 형식, 길의 주인 되기—맹문재론
118 사이의 시학—윤성학론
128 코끼리를 위한 노래—정끝별론
제3부 육감
141 당신의 진짜 이름—최서진의 [우리만 모르게 새가 태어난다]
154 오감도(五感道), 감각의 윤리—박춘희의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170 통각(痛覺)으로서의 웃음, 이 우릿한 육감(六感)—신미균의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184 아뜩한 하늘, 아득한 대지—전형철의 [이름 이후의 사람]
199 존재하는 부재(不在)—손석호의 [나는 불타고 있다]
214 묵묵하고 둥근 사랑—성선경의 [햇빛거울장난]
제4부 스펙트럼
229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김명인의 [여행자 나무], 김명수의 [곡옥], 이은봉의 [걸레옷을 입은 구름]
242 사랑의 행방—권현형의 [포옹의 방식],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
257 수렴과 확산의 변증법—강정의 [귀신], 김현의 [글로리홀]
268 ‘우리’라는 감각 혹은 세계수—장석주의 [일요일과 나쁜 날씨], 노혜경의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박희진의 [니르바나의 바다]
282 서툰 어른-되기와 주동사-되기—장이지의 [레몬옐로], 황혜경의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 책 속으로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언] 29장 7절). 진짜 악인은 곤궁한 자의 처지 자체를 모르는 자이다. 적어도 오늘의 시는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더불어 지금-여기의 시들이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비극이다. 문학이 육박해 오는 ‘리얼’한 세계를 방관할 수 없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지금-여기의 비극과 리얼리즘」, p.31.)
할 포스터는 “하나의 사건은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서만 등재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오로지 지연된 작용 속에서만 알게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의 시는 부정성으로, 즉 헤겔이 말했던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패라는 진무한’을 경유하여 미결정의 영역을 개방하는 여정이며, 비평의 전망을 초월한 어떤 불가지로의 이행이다. 나아가 그것은 ‘시와 정치’라는 담론을 중지시키기 위한 유일한 시적 실천이다. (「불가능한 정치, 가능한 시」, p.42.)
올해의 봄, ‘4.16’은 지금-여기를 지배하는 자본-권력의 전횡을 민낯으로 보여 줬다. 오래된 명언을 상기하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우리는 웃을 수조차 없는 희극을 겪고 있는 걸까. ‘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는 지금 우리에게 너무 웃다가 끝내 눈물로 귀착되고야 마는 씁쓸함을 안겨 주고 있지나 않은가. 그것은 겨우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초대하지 않은, 리얼리즘」, p.46.)
갓 시인이 된 이들, 이를테면 세월호 세대가 발표한 시에 나타나는 고독한 주체의 모습은 지금의 이십대가 체험하는 닫힌 우주 혹은 닫아걸어야 하는 세계 그래서 결국 갇혀 버린 생의 실상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니 그것은 그들만의 현실일 수 없다. 제사로 쓴 그린버그의 말은 모더니즘이 단지 낯설고 새로운 기법에만 근거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어떤 충격은 자아를 압도하여 트라우마가 된다. 이것에 사로잡힌 이들의 시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오늘날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는 무한히 수렴되고 있다. (「조우와 수렴」, p.70.)
요컨대 한국의 현대 시인들은 ‘붕괴를 드러내기’와 ‘내면성으로 극복하기’의 스펙트럼 안에서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영광은 이 둘 가운데에서 가장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는 시인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총체성이 붕괴된 세계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아날로지적 전망을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알레고리적 진단을 시도해 왔다. 이영광 시의 엔트로피는 여기에 기인한다. 미리 말하자면 그는 질서라고 명명되어 온 것들을 교란하는 자이다. (「‘증상’의 시학」, p.76.)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근원이 어디인가에 대한 탐색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나는 누구였던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의 배후, 즉 진짜 질의는 ‘나는 누구이고자 하는가’이다. 우리가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의 자신을 정립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시간성을 향하는 까닭에서다. (「정체성의 형식, 길의 주인 되기」, p.102.)
바이킹은 커다란 현대식 그네라고 하겠다. 그러나 동승한 이들이 연인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 주는 두려움과 짜릿함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 바이킹은 나란히 앉으므로,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와 거기서 솟아나는 성적 열락에 근사한 쾌락, 요컨대 이것은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충동이 공존하는 시간의 배를 타기 위해 마음의 손을 내밀 것인가를 점쳐 보는 시험의 하나일 뿐이다. 결정은 진작 내려졌거나 다른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이의 시학」, p.119.)
실로 소시민의 일상에서 저렇게 삼키고 지우고 줄이는 일들은 다반사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서도 꿋꿋한 게 저 박동, 눈빛, 비명이다. “외줄 사랑”의 근원이 저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마치 밀폐된 용기에 갈무리해 둔 코끼리와 같아서, 우리를 견디게 하는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끝별 시의 근황은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비워 냄으로써 삶의 본질로 다가서고 있다. (「코끼리를 위한 노래」, p.137.)
난처함은 종종 매혹으로 탈바꿈한다. 완벽한 언어도 그것의 구사도 그것의 해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작자마다 유일무이한 언어들이 출현하는 탓이며, 그것들이 타인의 그것과 마주치는 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가능성이 그 자체로 소통되고 사유되기 시작한다. (「당신의 진짜 이름」, p.146.)
박춘희 시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들은 대개 ‘붉음’과 ‘비림’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후각의 감각들은 실로 그의 시에 넘쳐나는데,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짝을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정이 이러니 이들은 그의 시에서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고 편재하는 존재의 자기 증명과 같다고 해도 되겠다. (「오감도(五感道), 감각의 윤리」, p.163.)
신미균의 시에 등장하는 미미한 존재들은 한결같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을 응축하고 있다. 바위처럼 견고한 지금-여기에 우연히 박히고 나면 어떤 안타까움으로도 인간을 온전히 구원할 수 없다(「업」). 신미균 시의 주체는 그런 존재들이라도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많이 못 줘서 미안해하는 마음은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착한, 당신」). (「통각(痛覺)으로서의 웃음, 이 우릿한 육감(六感)」, p.179.)
“하늘도 정이 있다면/하늘 역시 늙었을 것이다”라는 이하(李賀)의 시구는 주체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주문이 된다. 하늘은 무정하기보다 무심할 뿐이다. 수많은 왕들조차 피하려 했듯이 죽음 앞에서 최소한 인간은 평등하다. 죽음이 그렇다면 삶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하여 그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결말처럼 제 운명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아뜩한 하늘, 아득한 대지」, p.188.)
손석호가 시에서 주체로 내세우는 이들은 대체로 농민과 노동자와 소시민 등이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터전은 고향과 산업 현장 그리고 서울이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다. 그의 시가 가진 개성은 이들 시공간이 각각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등장한다는 데에서 발휘된다. 이들 시공은 실상 벌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포개져 있다. 중심이 바뀌었다고 이전의 산업과 그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마치 그런 것처럼 취급된다. 지금-여기의 폭력성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존재하는 부재(不在)」, p.212.)
성선경이 보석처럼 귀히 여기는 것은 보다 근원적인 데 기대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것들에게 빛을 나눠 주는 ‘햇빛’이다. 사실 목차를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이번 시집의 주된 소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성선경의 시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일테면 표제작인 「햇빛거울장난」을 보자. 얼핏 난해해 보이지만 테니스를 연습하는 벽치기 장면을 떠올리면 수월히 읽힌다. 햇살은 인생의 빛나는 한때를 비추고 있다. (「묵묵하고 둥근 사랑」, p.222.)
요컨대 삶에 대한 오랜 성찰들은 마침내 ‘죽음’의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지만, 그것에 대한 고유한 접근법과 형상화 과정을 거쳐 여전히 한 사람의 ‘젊은’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그들은 역력히 증명하고 있다. 적어도 시에 있어서 ‘젊음’이란 몸이 아니라 성장할 여지가 남은 정신의 상태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 p.229.)
권현형에게 사랑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짝이나 그들이 속한 가족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를 향한다. 김소연이 지금-여기의 ‘우리’와 더불어 부르고자 하는 “같은 노래”도 권현형의 시와 일정하게 대응된다. “절규”와 그것이 잠재된 “슬픔”과 “참혹”을 가로지르며 그가 깨우친 것은 존재들의 ‘있음’ 자체가 조화로운 세계를 열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사랑의 행방」, pp.254-255.)
강정의 언어는 주체의 몸 안에서 진동하는 ‘빛의 원석’으로부터 무한히 확산되며 명멸한다. ‘효시(嚆矢)’의 원래 쓰임처럼 그의 언어에는 애초부터 과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김현의 시편들은 각주와 본문 그리고 거기에 웅크린 텍스트들이 서로 간섭하면서 의미를 확산시켜 나간다. 그가 참조하고 들여오는 비주류의 언어들은 지금-여기의 변방에서 왔거나 과거에서 발원한다. (「수렴과 확산의 변증법」, pp.266-267.)
세계로부터의 자발적인 이격이 초래할 여정은 막연하고 아뜩하다. 그러나 이것만이 세계가 배분한 몫과 자리를 거부하고 제 것들을 찾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고 정립할 수 없다면, 달리 어떤 존재론적 사건이 한낱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는 제 옆의 주체들조차 부를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만연한 소외를 구축(驅逐)하고 지금-여기에 ‘정주 가능성’의 시공간을 여는 일은 개별 주체들이 ‘우리’라는 감각으로 서로를 불러 모으는 데 있다고 하겠다. (「‘우리’라는 감각 혹은 세계수」, p.269.)
“우선 의식주를 얻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신의 왕국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Seek for food and clothing first, then the Kingdom of God shall be added unto you.)” 헤겔의 발언이다. 그의 첫 문장이 의심받는 것은 이 땅의 불행이다. 그럼에도 장이지와 황혜경의 시는 아니 시는 “최소한의 사랑”으로라도 ‘주동사’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를 위무하고 있다. 이것이 시가 가진 여러 얼굴들 중에서 가장 “선량한 얼굴”이겠다. (「서툰 어른-되기와 주동사-되기」,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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