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안삼 론(論)
우리시대 가곡 계보를 잇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이안삼 선생이 지난 8월 18일 오후 5시 큰 별이 되어 떠났다. 향년 77세. 그를 통해 무대에 섰던 성악가, 그를 통해 가곡의 세계를 알게 된 수많은 작시자, 그리고 그의 가곡을 사랑했던 팬들에게는 더없이 슬픈 일이다. 이안삼 선생의 족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뒷자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한국 가곡의 대를 잇겠지만 아마도 ‘내마음 그 깊은 곳에’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와 같은 명곡은 오직 이안삼만이 작곡 가능한 곡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한국 가곡의 새 출발 그리고 이안삼
이안삼을 읽으려면 한국가곡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만큼 방향을 잃었던 우리 가곡사에 길을 낸 특별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도 그렇지만 그것이 이태리 가곡이라 할지라도 노래는 가수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며 발전한다. ‘비목’ ‘목련화’로 클래식가곡이 호시절을 보낸 그 바탕에는 테너 엄정행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클래식작곡가들은 좋은 가곡만을 생산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발전한다고 판단했는지 모르나, 한국 가곡의 발전은 엄정행의 흥왕과 관계가 있다. 우리 가곡사에서 보면 한국 가곡은 해방 이후 학교 교과서 안의 음악이었다. 교과서 밖으로 나와 극장에서 연주된 상품으로서의 노래가 된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된 엄정행의 전국순회 한국가곡연주회를 통해서였다.
엄정행에 매료된 여성 팬들의 엄청난 지지 속에 한국 가곡은 제1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83년 엄정행은 MBC FM에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라는 클래식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KBS FM 등은 신작 한국가곡을 찾고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장일남, 최영섭의 가곡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1987년 엄정행이 방송에서 물러나고 대학에 전념하자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 상업방송 위주로 방송이 재편되면서 클래식 프로그램이 밀려나는데 이때부터 우리 가곡은 주요 프로그램에서 소외되었다. 세계 가곡의 발달사를 통해서 보면 가곡이 흥망성쇠는 뛰어난 성악가와 관계가 있다. 델 모나코, 파바로티를 거치며 이태리 가곡이 세계 최고의 가곡이 되었듯이 우리 가곡도 유명 성악가와 함께 흥망을 같이 하고 있다. 이것을 대중가요 작곡가들은 발전의 법칙으로 삼았으나 클래식 작곡가들은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엄정행에 의해 일어난 80년대 한국 가곡의 붐을 이어갈 토양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계만을 부각시키며 스스로 침몰하는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침체기 한창 빠졌을 즈음 작곡가 이안삼이 등장했다.

한국 가곡 희망론 기치 들고 등장한 작곡가
작곡가 이안삼의 등장은 우리 문화의 고정관념이나 공식에 대한 저항아의 등장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 가곡은 예술 가곡으로 성공할 수 없다며 우리 작곡가들은 자괴감에 젖었었다. 이런 풍토에서 이안삼은 ‘한국 가곡 희망론’을 내세우고 나타났다. 여기에 이안삼은 서울 사람이 아니라 경북 김천을 본거지로 평생 활동해온 고등학교 음악교사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지지자들이 전무한 변방에서 색깔이 다른 깃발을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는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동료가 있을 때 번성할 수 있다. 그는 새 토양에서 어느 날 불쑥 싹을 낸 특별한 식물 같았다.
이 때문에 그가 한국가곡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한 마디로 음악인들은 그를 장외의 작곡가로 보았다. 그가 처음 한국작곡가회, 창작100인회, 서울작곡가회 등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였으나 기악곡이나 실내악곡을 쓰고, 대학에 적을 둔 작곡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직장의 무게로 작곡가의 값을 평가하는 우리 토양에서 그는 ‘턱없는’ 언더였다. 그가 무슨 일을 하던지 반짝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삼은 특별난 장외였다. 처음부터 음악계 보다는 음악시장을 그는 주시했고, 그 음악시장을 들고 음악계로 뛰어들었다. 시장을 갖고 뛰어든 사례는 이안삼이 아마 처음 일일 것이다. 21세기의 문화주류가 돼버린 인터넷동호회를 자신의 호의적 지지층으로 재편한 그는 가곡아카데미나, 동호인들의 가곡교실, 또는 음악감상회, 발표회 등에 지도자로 참석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네트워크를 쌓았고, 그들과 한 호흡 속에서 공유하는 문화를 만드는 동역이 되었다. 동호인들은 처음은 음악교양인이 되기를 원한다. 조금이지만 전문적인 연주기술을 쌓고자 했다. 이안삼은 동호인들이 한국음악, 한국가곡에 대해 아는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왔다. 그는 성악동호인들이 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에게 성악인들을 소개해서 같이 노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음악동호회와, 성악가들이 그의 우호세력들이 되었다. 이안삼은 이들을 연합한 음악시장을 담보하고 작곡계의 군계일학처럼 드러났다.

이안삼 신드롬이 있기까지
다 아는 일이지만 우리나라 작곡가들은 하나의 생산자이다. 생산을 하고 그 다음 문제에서 대책 없이 쩔쩔매곤 한다. 모든 부분에서 시장 없는 생산자는 똑같은 운명이다. 이안삼은 생산자로 우리 음악계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시장을 갖고 이런 문화운동으로써의 한국가곡 시장을 제시하며 시작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안삼은 처음부터 언더가 아니라 ‘오버 그라운드’의 작곡가였다. 2004년 광화문에 작곡연구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방송이 주목했고, 그와 활동을 같이 하는 성악가들이 한 그룹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의 한국 가곡 중흥에 동료 작곡가들을 모아들이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힘은 음악시장에 있었다. 전 시대 선배들의 가곡이 방송에서 유명해지면서 유명해졌다. 이안삼에 의해 시작된 한국 가곡 운동은 음악애호가들에게서 먼저 유명해지고 방송관계자들에게 알려지는 그간의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성공과정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작곡가 이안삼은 2004년 이후 특별하게 많은 가곡 발표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발표회 현상은 ‘이안삼 신드롬’같은 것이 되었다.
이안삼이 어찌 했기에 이안삼 신드롬이 생겼을까? 2000년 초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안삼의 한국가곡 발표회는 가곡의 운명을 바꿔놓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클래식 방송에서 그동안 ‘비목’과 ‘그리운 금강산’ ‘내맘의 강물’ ‘고향의 노래’ 등이 장수하고 있었다. 우선 그런 방송 판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이안삼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 새 가곡들이 밀고 일어섰다. 이안삼이 누구야? 라는 생각은 이때부터 작곡가들에게서 생겼다.
작곡가 아닌 시 쓰는 이들과 먼저 교유
그동안 우리 가곡은 작곡가의 계획이 있고, 시를 찾아서 입히는 식이었다. 어떤 경우는 곡이 먼저 씌어진 후 시가 나중에 채택되기도 했다. 그리고 작곡가는 작곡가고 시는 시인의 것 그것이었다. 가곡은 시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정서, 인토네이션을 작곡가가 노래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모든 가곡은 시가 어머니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우리 가곡을 살펴보면 작시자가 작곡가가 정서적인 교유를 하던 막역지기 사이가 대부분이다. 시를 무시한 가곡은 기계적인 노래가 되고 일회용으로 끝나는 운명을 맛본다.
이안삼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과 다른 출생을 하고 있다. 그의 가곡들을 살펴보면 알게 되지만 그는 서울에 올라오면서 시를 쓰는 사람들과 교유했다. 기존처럼 시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가 참여한 가곡동호회 등의 자리를 통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술로서의 시가 있고, 노래하는 시가 있다”고 말한다. 예전 시골 아낙들이 흥얼흥얼 혼자 신세를 담아 흥얼거리던 노랫가락같은 노래말이 ‘노래시’라는 지론이다. 이 때문에 이안삼은 음악애호가들과의 교류 중에 스스로 가곡에 맞는 노래시인들을 만들어냈다. 대부분 그의 가곡들은 시인들의 시였다기보다 이안삼의 가곡을 통해 시인이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안삼의 가곡은 모두 이런 식의 구성이다.
이안삼의 특성은 그가 시장 위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장이 그의 작품들을 모두 상품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가곡 무대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추천하여 올렸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가곡들은 모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멜로디로 저작된다. 시장은 대중성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 가곡이 불려지지 않는 것, 특히 유명하다는 대학 교수들의 가곡이 발표를 위한 곡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무조화성을 동원한 새로운 가곡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적인 가곡은 전공자들을 위한 것일 수는 있으나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배척된다. 시장에서는 낯선 불편함이 아니라 부르기 편한 색깔의 특별한 노래를 원한다. 이 때문에 당대에 통하는 가곡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음악을 관찰하고 그들과 맥을 함께 하는 변화적 감각을 가져야 한다.
이안삼의 가곡은 이런 대중성에 근거를 두었다. 뿌리를 대중성에 두고 클래식화한 여러 가지 변용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또 호불호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뛰어난 어레인지(arrange) 능력자라고 본다. 어떨 때는 클래식 가곡과 뮤지컬, 대중음악의 중간지대에서 아름다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대표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이나 그가 팝과 클래식가곡의 중간음악을 선포하고 내놓은 클래팝의 곡들 ‘마음 하나’ ‘금빛 날개’, ‘그 사람’ 등을 비교해보면 그의 가곡들이 같은 높이, 같은 색깔에서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한 시인들과 성악가들
그의 가곡은 시장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시장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시장사람들과 같이 만들었다. 이안삼을 살펴보면 그는 서울에서 가곡작업을 시작할 때 그의 가곡을 보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상태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작시라는 것을 고민하는 노래시인들이 결성되어 있다. 박병순, 정완영, 정치근, 문효치, 김종해, 안문석, 일중, 김경희, 김명희, 전경애, 홍금자, 한여선, 김필연, 이재성, 황여정,이향숙, 노중석, 김연수, 박문재, 윤은경, 하옥이, 이시섭, 이후재, 서공식, 황명휸, 장정문, 엄원용, 이영기, 신영옥, 이한숙, 라홍연, 김기배, 이광수, 권택희, 신일웅, 장장식, 김종선, 이인자, 이상목, 김민정, 김원도, 송재학, 강현국, 현기홍, 민병도, 나영호, 김영준, 서영순(현 카페지기 회장)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박세원, 김인혜, 김영미, 최현수, 김학남, 김향란, 강무림, 김요한, 이영기, 신용란, 차수정, 허미경, 이재욱, 조혜령, 강혜정, 송기창, 박영국, 이아경, 유승공, 김현주, 이현, 김승철, 이화영, 유미자, 임청화, 김영옥, 최자영, 김명현, 길민호, 이미영, 전기홍, 이진희, 조정순, 백준현 등 성악가들과의 연대, 그리고 아트힐, 노래의 날개위에, 가곡사랑 등 인터넷가곡동호인 모임과의 포괄적 연대는 거대한 그의 시장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들과는 성격이 다르게 세상에 등장했다. 그동안 성공한 우리 가곡은 먼저 방송이나, 개인발표회를 통해 상당기간 불려지면서 음악애호가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이안삼의 가곡들은 음악애호가들의 음악회에서 성악가들에 의해 초연으로 소개됐다. 말하자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직접 연결이 되어 소개됐고 거기서 호불호로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청중을 통해 즉각 시장성으로 검증됐다. 방송에 의해 유명해져서 청중이 찾은 것이 아니고, 청중들에 의해 유명해져서 방송에서 곡을 찾는 역순으로 유명 가곡이 됐다는 말이다. 클래식 가곡이지만 대중가요와 같은 방법으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특별한 가곡들이다.
작곡가 이안삼의 안내서 ‘선한 목자’
이안삼이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3년 작곡가 최영섭, 이수인, 임긍수 등과 함께 4인 작곡가회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한국가곡 부흥에 일조하면서부터다. 그렇게 따지면 불과 십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날 느닷없이 중앙무대에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가 가곡의 세계로 걸어오기까지의 길은 그리 짧은 길이 아니었다. 이안삼은 1943년 일본 나고야 출신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고향 김천으로 돌아온 이안삼은 트럼펫을 잘 연주해 1961년 김천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라벌예대 기악과에 입학했다. 그가 기악연주자로 계속 갔다면 오늘날의 이안삼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예대에서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작곡가 김동진이다. 김동진 선생은 이안삼을 불러 작곡과로 진출하면 어떠냐고 권했다. 난데없는 권유였지만 김동진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보다 작곡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챈 것이다. 스승의 권유 한마디에 트럼펫을 접고 작곡을 시작한 그는 김동진 선생이 경희대로 교단을 옮기자 이안삼 역시 경희대 작곡과로 전학했다.
이안삼은 대학 4년때 입대하고 군 전역 후 196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39년간 마산중, 김천중·고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빡빡한 교편생활에도 작곡과 지휘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열정 아래 1980년부터 1982년까지 2년간 브루클린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줄리어드 음악원 지휘과를 수료하기도 했다.
한편 김천고 음악선생을 할 때 이안삼은 성가곡 ‘선하신 목자’를 작곡해 지방에서 활약한 인물답지 않게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를 이해하는 열쇠로 해석하면 딱 맞다. 이안삼의 전 가곡의 밑그림에서 이 작품의 영향을 뗄 수 없는 까닭이다. 우선 이안삼을 얘기할 때 ‘선하신 목자의 작곡자’로 소개하면 가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단박에 알아 듣는다는 점에서 ‘그를 설명하는’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또 하나는 이안삼의 작곡세계가 이 작품에서 시작해 이리 저리로 가지를 뻗고 발전해 가기 때문에 ‘선하신 목자’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안삼의 전 작품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성가곡 역시 우리 귀에 친숙한 느낌
‘선하신 목자’는 성가곡이다. 화성의 배틀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져 있고 멜로디가 우리 귀에 친숙한데다 시어의 정서와 가락이 우리 입맛에 딱 맞는다. 이안삼은 ‘선하신 목자’에서 교회의 분위기, 반들반들한 교회 장의자의 향기까지 담아놓은 것처럼 곡 분위기가 한폭의 산수화 내지는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곡이다. 따뜻하고 포근함이 물씬 풍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선율이 단정하고 엄숙 진지하면서도 그 아래 깔린 감각적인 흐름에 있다. 엄숙한가 하면 맛깔스럽고, 좀 달콤한가 싶으면 웅변적이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한 곡에 모아놓은 듯한 묘한 맛과 신비가 느껴진다. ‘선하신 목자’의 이해가 이안삼을 아는데 중요한 것은 그의 전 작품이 거침없는 화성의 운용 속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종교성을 밑그림으로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안삼은 그 시기의 감성센서로 그의 가곡들에 색을 입혔다. 그의 가곡은 가볍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 시기의 우리 감각으로 맛을 내고 가락은 감성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중후하나 쉽게 흐르며, 그러면서도 선명한 메시지가 담은 것이 이안삼 가곡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선하신 목자’는 1967년에 쓴 곡이다. 그 후 이안삼은 성가곡 59곡, 가곡은 무려 170여곡이나 생산해냈다. ‘선하신 목자’는 그의 1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의 연보(年譜)를 통해 읽어보면 이 시기 이안삼은 스승 김동진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선하신 목자’의 성공으로 그에게 많은 위촉이 졸을 이었다. 물론 이즈음 그는 작품 색깔과 자기만의 화성을 놓고 여하간에 고민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안삼은 이때 이미 인기를 얻은 이전 곡을 무의식적으로 복제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새로운 화성 공부는 물론 그 화성을 실험하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펼쳤다. 작곡가로서는 굉장히 부지런한 결정이다. 김동진의 화성 벗어나기는 물론 이안삼 탈작업을 병행한 것인데 전통적인 것과 비화성적인 것, 서정적인 것과 선동적인 선율을 대립 융화 시키면서 새로운 색깔을 찾는 실험을 장기간 진행했다. 그 결과 1980년대의 매우 화려하고 기술적인 2기를 도발하게 된다.

자연의 영감과 실험음악의 2기 가곡
이안삼의 2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악적인 것과 주변 환경과 자연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지 않은가. 그의 작품들도 예외일 수 없다. 그의 활동무대는 김천이기에 도회적이 아니라 산, 물, 강 등 자연환경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안삼은 60여 편의 작품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 자연의 영혼이 내재된 화성을 활용해 음의 구조들이 충돌하나 그 충돌이 조화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며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이안삼은 이 즈음에 7편의 기악곡도 작곡했다. 그 기악곡에는 악기의 기교와 다양한 화성을 그대로 가곡에도 전이하는 실험도 병행했다. 이런 실험 끝에 작곡가의 감정을 물감으로 자유자재로 그려내는 가곡쓰기의 묘법을 터득했다. 1982년에 ‘클라리넷 소나타’를 작곡 초연, 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외국에서의 후한 평가는 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기초로 1999년 합창곡 ‘메밀꽃 필 무렵’을 작곡, 음악계의 주목을 받는다.
2기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종교적 비탕 위에 드라마와 같은 인생의 파노라마가 그려져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이 가곡 인구에 회자하자 그는 진정으로 청중의 입장에서 고민하곤 했다. 작곡가만의 고립적인 세계가 아니라 듣는 이들이 공감하고 같이 참여하는 노래를 작곡하기로 한 셈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청중에게 친절한 가곡을 만들었다. 그럴수록 청중은 이안삼에게 주목했다. 그 청중과 함께 그는 한국 음악계를 재편하려는 작업에 눈을 뜨게 되고 이안삼의 3기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대중을 생각한 3기의 이안삼 가곡
이안삼의 3기는 질풍노도의 창작 시기다. 2005년 교단을 정리하는 정년을 맞이한다. 보통 정년이라 하면 인생을 정리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데 이안삼은 지금부터 ‘남은 숙제’를 시작할 때라고 판단해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다. 이에 앞서 한국예술가곡연합회, 100인 창작회 등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하되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2003년 최영섭, 이수인, 임금수 등과 함께 한 4인작곡가회를 손꼽을 수 있다. 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가곡발표회를 가졌고 2004년 12월 시인과 작곡가와 연주자들을 연합해 ‘포럼 우리시 우리 음악’이라는 동인회와 같은 모임체를 창립한다. 이는 우리가곡사를 다시 시작하는 작업이라 할 만큼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
이 모임은 시인들이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들이 그 시에 곡을 붙이고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는 활동이 큰 줄거리인데, 생산과 소비가 그때그때 이루어지는 일을 함으로써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창작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된 것이다. 나아가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경쟁하는 분위기로 승화시켰다. 우리가곡사의 창작벨트 효과를 보게 된 셈이다. 포럼의 영향력은 거셌다. 서울과 지방까지 시인과 작곡가들이 합동하여 창작곡을 왕성하게 솓아내게 되고 이 포럼효과는 현재도 더욱 심화되어 우리 작곡계의 하나의 사조가 돼 버렸다. 바로 이 포럼의 중심에 이안삼이 있는 것이다. 2006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후 이안삼과 포럼은 연 3~4회의 창작가곡 발표회를 의무처럼 펼쳤다. 한 번의 발표회 때마다 신작 23~4곡이 세상 밖으로 탄생했으니 입이 벌어질 만한 사건이었다. 지금은 매년 100여곡 이상의 우리 가곡이 탄생하고 있는데 순전히 이안삼 포럼의 영향이라 답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안삼은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후 약 100여곡 이상의 신작 가곡을 발표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곡을 써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바흐의 곡처럼 ‘그 곡이 그 곡’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비평가들은 매시간 기법도 다르고 색깔도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고 평한다. 작품에 대해 의무처럼 실험하는 창작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느 작곡가와 달리 시 본래의 노래를 가곡으로 펼쳐내는 그의 작풍 때문에 곡들은 시인의 색깔을 갖고 있고, 작곡가의 색깔을 굳이 덫칠하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의 백 몇십 곡의 가곡을 살펴보면 색깔과 멜로디가 매우 다양하다는데 놀란다. 전체를 정리를 해보면 작곡가의 색깔로 곡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작가별로 색깔이 맞춰져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투, 사상을 형성하는 색을 드러낼 뿐이다.
이 말은 작곡가가 자기 멜로디에 시를 붙이는, 작곡가의 인토네이션에 시를 활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시인의 시적 인토네이션에 작곡가의 음악적 표현력을 동원해 가곡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는 방법으로 쓰여졌다는 증거다. 이 때문이겠지만 그의 가곡은 특별히 한 작시자에 대해 편애하는 일이 없다. 다양한 시인들을 편력할 뿐, 한 시인에게 한두 편의 가사를 빌린 후 금세 미련을 버린다. 따라서 시인별 가곡들은 한 작곡가가 가질 수 없는 너무 다양한 색깔을 이안삼에게 선사했고, 그 결과 100의 색깔과 성격을 가진 작곡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물게 그는 한 시인에게서 5편의 가곡을 얻어낸 시인이 있다. 김명희, 한여선 등 두 명이다. 김명희의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마음 그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사랑’ ‘그날은 언제일까’ ‘사랑의 빛깔’ ‘연꽃’ ‘비’, 한여선의 ‘메밀꽃 필 무렵’ ‘복수초’ ‘저녁새’ ‘나혼자 듣는 그대의 노래’ ‘그대 아시나’ 등인데, 공교롭게도 이들 시인에 의한 가곡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메밀꽃 필 무렵’이 이안삼의 대표작 목록에 들어 있다. 작곡가와 작시자가 좋은 가곡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단적인 예다.

시의 선율이 아닌 성격을 밝혀 작곡하다
작곡가로서 이안삼을 읽으려면 그의 가곡에서 색깔보다 성격의 특별함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시인의 작품 외적인 요소보다 시가 말하려는 성격을 더 중요하게 본다. 그의 가곡은 친절한 서두와 메시지적 종장 등 모든 곡은 그가 철저히 계산한 구성법칙에 따른다. 그는 청중에게 친절하지만 따뜻한 서정과 수채화적 가락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자기 메시지에 얼마나 단순 직설적으로 연결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데, 던지고자 하는 주제에 멜로디를 직통으로 끌고 들어가 설득하고 강조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문효치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살펴보자. 이 시는 그의 특성과 시인의 메시지가 아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의미심장한 곡으로 태어났다. 이 가곡 하나를 들으면 작곡가 이안삼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할 만큼 작곡가 이안삼의 특성과 인간 이안삼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이안삼은 다산능력을 가진 작곡가다. 그의 가곡 170여 곡에서 보여주는 천의 색깔도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색깔인가 하고 보면 성격적인 특징이 있고, 성격인가 하면 놀라운 화성의 대립과 조화로 빚어낸 가락에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는 양파껍질 속의 작곡가처럼 살피고 연구해야 할 많은 장점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살아 생전, 매일 매일 실험하며 한국 가곡 개척을 해나갔다. 매 작품에서 보여주는 실험성 때문에 그의 가곡은 솔직히 어디로 튈지 예측하지 못할 만큼 우리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안삼은 2009년쯤 두 가지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하나는 애초에 영어로 시를 쓰고, 그 영어에 곡을 붙이면 우리 가곡이 세계화를 이룰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살피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클래식에 팝의 감성적 멜로디를 접목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클래팝이라는 가곡장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이 실험은 결국 클래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이안삼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안삼은 한국 가곡의 미래를 늘 고민했던 작곡가다. 그가 한국 가곡의 문제를 파악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가곡운동에 뜻을 둔 시인과, 작곡가와 성악가들을 규합하여 무수히 많은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특히 ‘포럼 우리시 우리음악’은 매년 새 가곡을 창작하고 연주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 화성의 연구와 우리 언어의 발음, 발성법에 체계를 잡으려 애를 썼다. 이안삼이 중심이 되어 있는 이 포럼은 2000년대 이후 우리 가곡사의 중심 역할을 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가곡의 실험기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우리 가곡을 창작해냈고, 매 발표회마다 새 주제를 정하고 그 과제를 새로운 가곡의 창작으로 답을 제시하려는 운동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 가곡의 미래를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 그의 고민과 우리 가곡에 던지는 질문과 성찰을 그의 작품에서 읽어야 한다. 이제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 없게 되었지만 이안삼은 하늘에서도 우리 가곡의 다음작품을 생산해내리라 믿는다.
작곡가 이안삼은 2018년 3월30일 칠곡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테너 이현, 소프라노 강혜정의 음악회에 카페회원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객석의자에 부딪혀 갈비뼈에 금이 갔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4월 3일 대구에서 열린 최경진 음악회에 참석했다. 이어 4월 8일 서울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린 테너진성원 독창회, 4월 9일 소프라노 이윤숙 독창회 등 수많은 음악회에 참석했다. 진성원 독창회나 이윤숙 독창회때는 세종체임버홀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지 못해 서영순 시인 등 지인 및 제자들이 부축했을 정도로 무리한 일정이었다.
4월 10일 아침 40도 고열에 신음하던 이안삼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급성폐렴진단을 받고 입원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폐렴은 완치되어 퇴원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병인 폐기종으로 인해 6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았지만 ‘이안삼 가곡집 제4집’을 출판하고 ‘이안삼의 음악여정12집’ CD도 출반했다. 그리고 퇴원 이후 별세하기까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음반 출반 직후 광화문 시대를 접고 아들의 거주지인 목동으로 옮겨 요양을 취했으나 결국 은평성모병원에서 소천했다. 2020년 8월 가만히 세상을 놓고 하나님 곁으로 떠난 것이다. 우리 시대 가곡의 큰 별이 진 것이다.
글 耳梯 이남진, 정리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