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키슈트와르-시블링 북벽을 향해 다가서는 닉 렌쇼.
|
[영국 산악인 베나블스의 등반기] 국경분쟁 속에 오롯이 처녀봉으로 남아 있던 고봉들 (월간 산 발췌) 산 이야기
2015. 4. 25. 9:00
http://blog.naver.com/musemuse70/220339443220
다섯 번 비박 후 키슈트와르-시블링 북벽 등정
다음날 그들은 수직의 제2빙벽 아래 도달했다. 딕이 자신의 배낭을 벗어 자일에 연결시키고, 맨몸으로 빙벽을 5m 전진하고 아이스스크루로 확보한 후, 자신의 배낭을 끌어 올렸다. 베나블스가 빙벽을 올라갔을 때 딕은 제3빙벽 아래 50도 경사 설사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베나블스가 선등을 교대하기 위해 자신의 배낭을 벗어놓고, 스크루, 카라비너, 슬링, 데드맨을 휴대하고 제3빙벽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가로 홈통이 파인 단단한 빙벽에 스크루를 설치하며 좌측 대각선 방향으로 전진했다. 수직 홈통이 나타나자 침니 좌측 벽에 등을 밀착시키고 크램폰을 착용한 발을 우측 벽에 박은 다음, 아이스 액스를 칙칙한 색깔의 빙벽에 박아 홀드 삼으며 계속 전진했다. 아이스 액스는 칼이 버터(butter)에 박히듯이 얼음에 잘 박혔다. 갈라진 틈이 점점 좁아져서 그는 우측 벽에 붙어 경사 70도의 설벽에 튀어나온 오버행 위쪽으로 진출했다.
그는 킥스텝으로 가파른 설벽을 올라 제3빙벽의 상부에 도달한 후 배낭을 끌어 올렸다. 현수빙하와 정상벽의 제1빙원이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현수 빙하 위쪽에 베르크슈룬트(빙하의 갈라진 틈)가 나타났다. 베나블스가 베르크슈룬트의 위쪽 빙벽에 스텝을 깎으며 돌파한 다음 두 사람은 설원 위로 세 피치를, 이어 스노 립(rib)을 오르고 나서, 65도 경사의 눈사태의 통로였던 눈 고랑으로 계속 전진했다.
그들은 작은 바위 오버행 밑의 빙벽에 너비 30cm, 길이 3m의 레지를 깎아 비박 터를 만들었다. 위쪽 화강암 벽에서 눈 녹은 물방울들이 레지 위로 계속 똑똑 떨어졌다. 그들은 그 비박 장소를 ‘물방울 레지’, 즉 ‘드립 레지(Drip Ledge)’라고 명명했다. 날이 저물자 물방울은 혹한으로 얼어붙어 잠잠해지며 골칫거리가 사라졌다.
북벽 등반 3일째 그들은 7개의 아이스스크루, 2개의 프렌드(Friends, 피톤, 캠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반 장비), 작은 너트 3개, 큰 너트 3개, 피톤 8개, 22개의 카라비너, 테이프 슬링, 자일 2동을 휴대하고 등반을 재개했다. 딕이 선등해 설원의 상부를 횡단했다. 그들은 우측 런늘(Runnel, 水路)을 직등하지 않고, 좌측 빙설암으로 형성된 꼬부랑길로 우회하며 전진했다.
베나블스는 암벽에 확보물을 설치해 가며 침니를 돌파하고, 좁은 침니를 빠져나가 어렵사리 레지 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런늘 위쪽에서 네 피치의 암벽 등반을 했다. 베나블스가 침니를 오른 다음, 딕은 코너(corner, 二面角)를 돌파해 눈 덮인 바위 선반을 올랐다. 이어 우측 람페(rampe, ramp)를 올라선 다음 베나블스는 수직 암벽 옆에 얼어붙은 눈을 파내 너비 30cm, 길이 1m의 크기의 레지를 만들었다. 그것은 마천루(고층건물)의 90층 전망대의 창턱을 방불케 해 그 레지를 ‘윈도 레지(Window Ledge)’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수직 암벽에 등을 기대고 레지 위에 나란히 앉아 자일 고리로 몸을 확보한 채 침낭을 뒤집어쓰고 혹한 속의 고통스런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5시간가량 휴식시간을 보냈지만, 자다 깨다 해 실제 잠을 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북벽 등반의 4일째 베나블스는 윈도 레지에 배낭을 남겨두고, 거기에 연결한 자일을 자신의 카라비너에 통과시킨 다음, 아이스액스, 아이스해머, 카메라 그밖에 등반장비를 휴대하고 선등에 나섰다. 그는 크랙을 오른 다음, 가파른 암벽 밑에서 크램폰을 벗고 코너와 침니를 연달아 돌파했다. 침니 상부에 화강암 바위 날개가 튀어나와 오버행을 이루며 장애물로 등장했다. 그는 그 오버행 밑에 프렌드를 끼워 확보하고, 영국의 스카펠(Scafell)암장을 연상시키는 오버행을 프리클라이밍으로 돌파하고, 슬랩 위의 풋홀드를 밟고 피톤을 설치한 후 자신의 배낭을 끌어 올렸다.
딕도 따라 올라왔다. 그는 두나기리 등반 당시 입은 동상 후유증으로 손가락에 혈액순환이 순조롭지 못해 다음 피치도 베나블스가 올랐다. 그들은 그날 도합 여덟 피치를 돌파했다. 베나블스가 첫 번째 오버행 암벽 피치와 두 번째 피치, 즉 빙설암 혼합 구간을 돌파했는데, 그 구간은 가파른 바위 크랙과 람페, 가파른 눈 시렁과 화강암 벽으로 구성되었다. 딕이 돌파한 세 번째 피치는 30m 높이의 필라(pillar, 기둥)에 있는 코너로 딕 렌쇼가 돌파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디에드레를 ‘렌쇼 디에드르(Renshaw diedre)’라고 명명했다.
딕은 좌측 빙벽을 밟고 우측 암벽에 있는 홀드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는 크랙에 너트를 설치하며 올라 루트의 마지막을 가파른 빙벽 등반으로 마무리했다. 베나블스는 우측으로 트래버스해 눈 덮인 가파른 슬랩을 오른 다음, 샤모니 부근의 ‘에귀 뒤 플랑’에 있는 난코스 ‘그랑 메르 크랙(Grand’ me're Crack)’을 닮은 가파른 암벽을 올랐는데, 이 암벽은 단 하나의 크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는 작은 바위 혹들을 밟고 살금살금 건너서 침니를 오르고 레지에 도달했다. 딕이 동릉 쪽으로 향했다. 그는 위태로운 스노-레지를 건너 화강암 바위와 설벽으로 구성된 오목한 벽에 도달했다.
베나블스가 선등을 교대하고 제6피치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매우 가파른 지대를 등반하느라 예상보다 더 많은 확보물을 사용했다. 밑에서는 어렵게 보이지 않던 짧은 벽이 의외의 난코스가 되어, 베나블스는 고통과 씨름하게 되었다. 그는 그 절벽에 매달린 채 피톤 설치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시간, 30분 이상을 허비했다. 그는 머리 위쪽으로 팔을 뻗어 좁은 크랙에 아이스액스 끝을 박아 넣고, 거기에 매달려 수직 설벽에 왼팔과 다리를 교대로 박아 넣으며 몸을 서서히 끌어 올렸다.
그는 그 절벽을 오른 후 가루눈으로 형성된 설벽 속을 헤엄치듯이 건너 작은 동굴에 도달해 크랙에 프렌드를 설치한 후 카라비너를 연결하고 자일을 통과시켰다. 딕이 그곳에 도달해 너트와 피톤을 이용하며 제7피치인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난코스의 코너를 돌파하던 중이었다. 딕이 교묘한 등반 기술을 발휘하며 이 피치를 등반하던 중에 날이 저물어 갔다. 더욱이 기상 악화 조짐도 보였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사납게 모여들었고, 미사일 형태의 새털구름도 제 모습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베나블스는 경사도 73도 설벽에 아이스액스를 깊이 박고 매달려 킥스텝으로 북벽을 오르고, 드디어 동릉에 도달했다. 좁은 능선에는 거대한 버섯 형태의 설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헤드램프를 켜고 바위에 박은 피톤과 설벽에 설치한 데드맨 사이를 자일로 연결하고, 확보줄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 쪽의 설탑 밑에 레지를 팠다. 그들은 그 위에 매트를 깔고 침낭 속에 들어가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이 동릉의 상부를 바라보니 가파른 빙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빙탑들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었다. 그들은 동릉을 가로 막고 있는 설탑들을 우회하기 위해 동벽으로 자일 하강해 바위 레지를 지나고, 암벽과 빙벽을 올라 동릉의 콜로 다시 올라왔다.
그들은 북벽으로 내려가 눈사태 흔적인 세로 홈통들을 건너며 65도가 넘는 정상 설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단단한 빙벽 위에 가루눈이 엉겨 붙어 등반이 까다로웠다. 75도 벽에 이어 80도 빙벽이 등장하자 그들은 그 밑의 우측으로 트래버스했다. 봉우리의 정상은 거대한 눈처마였다. 그들은 완만한 설원을 올라 정상을 밟았다. 멀리 우측에 웨스트 타워(West Tower)가 바라보였다. 그들은 빙벽, 설릉, 빙원, 암벽을 차례로 돌파하고 다섯 번 비박 후, 난코스인 키슈트와르-시블링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 고소포터 없이 오직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룩한 쾌거였다.
하산 중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사나운 눈보라가 그들의 얼굴을 강타했다. 눈은 그쳤지만 암흑이 찾아왔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전날의 비박지, 설탑까지 무사히 하산했다.
불가침의 영역 같은 리모 1봉 등반 도중 대원 2명 포기
2년 후인 1985년 베나블스는 인도-영국 시아첸(Siachen) 원정대 일원으로 카슈미르를 다시 방문했다.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카슈미르는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분쟁으로 종종 전쟁터로 변모했다.
카슈미르의 라다키(Ladakhi) 지방어로 ‘장미의 고장’이라는 뜻을 지닌 ‘시아첸빙하’는 총길이가 70km를 넘는 거대한 빙하다. 영국의 탐험가 롱스태프(Longstaff) 박사가 1909년 이 빙하를 최초로 탐험했다. 1985년 당시 시아첸빙하 주변은 파키스탄-인도 간 분쟁으로 등반하기에 위험한 지역이었다. 시아첸빙하는 ‘숨은 협곡’이란 뜻을 지닌 테롱빙하(Terong Gl.)로 이어지는데, 1927년 네덜란드의 비세르 박사(Dr Visser)가 테롱빙하를 최초로 측량했다.
두 개의 빙하 주변에는 6,000m가 넘는 봉우리가 100여 개 산재해 있는데, 7,000m급 리모산군이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파키스탄-인도의 국경 분쟁이 멈출 날이 없어 1940년 이래 외국인들에게 접근이 금지되어 왔기 때문에 미답봉들이 많다.
1985년 인도-영국 시아첸 등반대는 카슈미르 북부에 위치한 시아첸빙하를 향해 출발했다. 시아첸빙하 탐험과 동부 카라코룸의 유일한 7,000m급 산군 리모 1봉 초등이 주목적이었다. 리모산군은 4개의 7,000m급 봉우리들, 즉 리모 1봉(7,385m), 리모 2봉(7,373m), 리모 3봉(7,233m), 그리고 리모 4봉(7,169m, 1984년 인도육군산악부대 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9년 비세르 박사의 2차 테롱계곡 원정대에 포터로 참가, 리모 1봉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지 라다키 사람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은 매우 가파른 암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빛의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의 줄무늬를 띠어 ‘그림 같은 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리모 1봉 아래쪽 얼음 호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뼛가루가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영국 등반대는 여러 날 동안 누브라(Nubra) 계곡을 탐험한 후 시아첸빙하와 인접한 테롱빙하 상의 4,300m 고도에 위치한 ‘시압 추슈쿠(Siab Chushku)’라는 황폐한 장소에 베이스캠프, 즉 ‘머드 캠프(Mud Camp)’를 구축했다. ‘시압’은 3개 빙하, 즉 북 테롱빙하, 남 테롱빙하, 그리고 셀카 초튼 빙하의 빙폭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고 ‘추슈쿠’는 ‘캠프’라는 뜻이다. 그들은 흙탕물 연못 옆의 자갈과 진흙 테라스 위에 여러 동의 텐트를 설치했다.
짐(Jim)과 토니(Tony) 두 대원들은 테롱빙하상의 5,000m 지점의 얼음 호수인 ‘인골(人骨) 호수’ 가에 구축할 예정인 전진캠프 터를 찾아 나섰다가 돌아와 정찰 결과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리모1봉은 붉은 화강암 버트레스들이 검은 이판암 위로 솟구쳐 알프스의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스퍼의 가파른 버트레스와, 몽블랑 남벽의 ‘프레니 필라(Freny Pillars, 암벽 기둥)’의 얼음 쿨와르, 즉 ‘샹들리에(chandelle)’를 방불케 한다고 주장했다. 짐 대원은 세계의 7,000m급 미답봉들 중에서 리모 1봉이 최대 난코스로 여겨지며 등반이 난항을 겪을 것 같다는 예상을 피력했다.
그 봉우리는 소용돌이치는 구름의 베일(veil) 속에 장시간 숨어 있다가 감질나게 잠깐 동안만 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인골 호수’를 발견하고, 얼음 호숫가에서 철저한 수색활동을 전개했지만, 인골을 찾아내는 데 허탕을 치고 다만 주변에서 반짝거리는 무수한 빙탑들만 발견하는 데 만족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리모산군을 정찰했다. 계곡 위쪽에 리모 1봉과 3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 좌측 리모 3봉은 가파른 피라미드로 그쪽에서 등반하려면 난코스를 돌파해야 될 것 같았다. 지도상에는 산의 반대편에서 더 수월한 등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리모 2봉은 독립 봉우리가 아니라, 1봉 북릉 상에 위치한 숄더(Shoulder)로 하나의 전위봉(前衛峰) 구실을 하고 있었다.
강풍이 리모 1봉 산정을 채찍질해 넝마조각 같은 구름 덩어리들과 깃털 같은 눈보라가 흩날리고 있었다. 1봉은 육중한 산으로 정상은 가파른 버트레스, 걸리, 아이스필드(ice-field)들 사이로 뻗어 오른 능선들 위에 얹혀 있었다. 콜 밑에는 짐과 토니가 말했던 공포의 바위 필라들이 두꺼운 신설에 휩싸인 채 솟아 있어 불가침의 영역을 냉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토니, 베나블스, 짐, 데이브 4명의 대원들은 난코스로 예상되는 화강암 버트레스를 피하고, 그 대신 남서릉의 남쪽 50도가 넘는 설벽을 등로로 삼았다. 햇볕이 설벽을 비추자 얼어붙었던 눈이 녹아서, 스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설 속에서 사력을 다해 한 발을 위로 뻗으면, 그 발이 계속 미끄러져 헛수고가 되풀이 되었다. 잘 깨지는 화강암 벽에 들러붙은 눈 죽 같은 설벽을 파내면서 남서릉의 능선마루까지 마지막 표고차 200m를 돌파하는 데 무려 8시간이나 소요되었다.
그들은 남서 쿰(Cwm, 원형 협곡)에 위치한 캠프를 출발한 지 16시간 만에 리모 1봉 남서릉에 도달했는데, 좁은 능선 마루, 즉 해발 6,200m 지대에 위치한 화강암 나이프 리지의 좌측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스노 코너들(snow-corners, 눈 처마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등로로 삼았던 남쪽 벽의 측벽에는 백설탕 가루나 눈 죽 같은 설벽이 뻗어 있어 트래버스가 어려웠다. 그들은 좁은 능선상의 눈 처마 밑에 가까스로 두 동의 텐트를 설치하고 아이스스크루와 피톤을 박아 확보하고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은 능선 좌측의 눈 처마들 지역, 즉 죽음의 지대에서 벗어나 능선 우측의 슬랩 지대를 횡단하며 등로를 개척했다. 베나블스가 6,400m 지대의 능선 마루에 도달했을 때, 북서쪽 96km 떨어진 곳에 솟아 있는 피라미드가 바라보였다. K2였다. 베나블스가 첫 번째 피치를 선등했고 데이브는 선등을 교대했다. 베나블스가 다시 선등에 나서 눈 속을 뒤지며 핸드홀드와 풋 홀드가 될 만한 깨진 바위틈을 찾아냈다.
능선 상에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는 가파른 암탑이 나타나자 탈진 상태의 짐은 피너클 지대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이틀은 소요될 것이라며, 암탑의 암벽과 설벽과 눈 처마들의 돌파가 위태롭기 때문에 자신은 등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데이브도 암벽 위에 얼어붙은 넓은 설벽 지대를 돌파하려면 누군가가 장거리를 펜듈럼으로 건너야 하는데, 절벽의 특성상 매우 위험한 등반이 될 것이며, 자신은 생명을 담보로 등반을 계속할 의향이 없다고 말하며, 짐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들은 절망상태 속에서 전날 비박지까지 후퇴해 비박한 후 짐과 기관지가 감염된 데이브는 하산했고, 토니는 등반을 계속하겠다고 하산을 거부했다. 네 사람의 힘을 합쳐도 돌파가 어려운 난코스를 유능한 산악인 2명이 빠진 상태에서 돌파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이룩했던, 이 능선의 등반 난이도와 비슷한 등반, 즉 과거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의 동계 등반과 페루와 볼리비아의 6,000m급 봉우리들의 등반을 회상하며 용기를 북돋았다.
리모 1봉 정상 아래서 배낭 분실, 등정 실패
베나블스는 장시간의 망설임 끝에 토니와 둘이서 등반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에 등반을 재개했다. 그들은 먼저 능선 측면의 화강암벽에 붙어 있는 설탕 같은 입상(粒狀) 알갱이들로 구성된 눈을 긁어내고, 얼음을 파내 홀드가 될 만한 크랙과 바위주름과 새김 눈(nicks)을 찾아냈다. 그들은 새김 눈에 아이젠의 발톱 끝을 끼워 넣어 풋홀드로 삼으며 전진을 계속했다.
베나블스가 난코스인 제3피치 등반을 끝낼 무렵 토니는 감격해 “참 잘 한다”며 격려의 찬사를 소리쳤다. 베나블스는 트래버스해 침니 속으로 들어갔다. 침니는 그들이 ‘성채(Fortress)’라고 명명했던 가파른 암탑의 암벽을 양분하고 있었다. 베나블스는 다리를 벌려 침니의 양쪽 벽을 밟고 올라, 화강암 바위 날개를 잡고 침니를 빠져 나왔다. 그는 오버행을 돌파하고 경사진 레지에 확보지점을 마련했다. 토니가 선등을 교대하고 가파른 ‘성채’ 벽 위로 사라졌다.
그런데 토니가 등반 중 일으킨 낙석 하나가 벽에 부딪치며 덜커덕 소리를 내다가 베나블스의 어깨를 명중해 그는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베나블스는 선등을 교대했을 때 토니의 뛰어난 암벽 등반 솜씨에 감탄했다. 토니는 가파른 낙석지대에서 단 한 개의 작은 낙석을 떨어뜨렸지만, 베나블스의 발 밑에서는 돌사태가 계속 일어났다. 베나블스는 ‘성채’의 설벽과 빙벽, 가파른 암벽의 제7피치를 돌파했고, 이어 두 사람은 심설지대를 지나 또 다른 암탑 아래 레지에서 눈을 깎아내고 비박했다.
이튿날 그들은 좌측의 눈처마 지대를 피하고 우측의 측벽으로 등반을 계속하고 심설지대를 지나 최대 난코스 구간인 ‘피너클 지대’의 아래(6,600m)에 도달해 비박했다.
다음날 토니가 침니 지대에 도달하기 위해 거대한 빙원의 상부를 횡단할 때, 멀리 96km 떨어진 곳에서 K2가 복숭아빛으로 물들었고, 아브루치 능선과 우측의 북동릉이 바라보였다. 가셔브룸산군은 멀리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선등자 토니가 코너 속에 도랑을 파느라고 눈덩어리들이 굴러 떨어졌다. 그들은 얼음수로, 걸리, 눈이 들어찬 침니를 돌파하고, 오버행 암벽 사이를 오르고, 등로가 막히면 펜듈럼으로 측벽을 횡단했다. 그들은 다시 침니를 오르고, 첨탑 상부에 도달했는데, 비박 장소를 찾아내지 못해 10m 아래쪽 거대한 눈덩이까지 자일 하강, 눈보라 속에서 비박했다.
이튿날 그들은 리모 1봉 남서릉의 좌측 스노-걸리를 통과하고,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동계 등반보다 더 힘든 빙벽 구간을 돌파하고, 마지막 장애물인 침니를 올랐다. 드디어 최대 난관 첨탑 구간을 돌파한 것. 숄더까지 설사면이 이어지고, 거기서 시작되는 설릉이 정상까지 이어져 이제 등정은 무난할 것처럼 보였다. 베나블스는 선등으로 스노 람페를 오르고 해발 6,850m의 설원에 도달했다.
그는 비박을 준비하려고 눈 속에 피켈을 깊숙이 박고, 자신의 배낭을 벗어서 아이스 엑스에 부착된 슬링에 카라비너로 연결시켰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배낭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가속도가 붙어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베나블스는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아이스액스가 눈 속 깊숙이 박혔다고 착각하고, 중대한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그동안 필사적으로 기울였던 모든 각고의 노력은 한순간의 실수로 수포로 돌아갔다. 베나블스의 배낭 속에 들어있던 침낭, 가스버너, 식량, 텐트, 폴 등 고소에서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들이 절벽 밑으로 사라져 버려 이제 그들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다. 두 사람은 토니의 배낭에 들어 있던 텐트 플라이를 뒤집어쓰고, 토니의 침낭을 함께 이용하며 영하 20℃의 혹한과 사투를 벌였다. 그들은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 그들은 다음날 능선의 남쪽 측면으로 8피치의 자일 하강 끝에 가파른 암벽구간을 내려와 빙원을 거쳐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한편 건강이 회복된 데이브와 짐은 해발 6,200m의 콜을 넘어 반대편 베르크슈룬트를 건넜다. 그들은 버트레스를 돌파하고 설동을 반쯤 파고 텐트를 설치했다. 그들은 강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텐트 속에서 비박하고 칼날 능선을 돌파, 리모 3봉 초등에 성공했다.
베나블스는 1988년 동료 3명과 함께 에베레스트 캉슝벽(동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사우스 콜(7,900m)까지 등반했다. 한 대원은 사우스 콜에서, 두 대원은 남동릉 8,600m 지점에서 체력저하로 등반을 포기했으나, 베나블스는 안간힘을 다해 남동릉으로 에베레스트(8,848m)를 단독 무산소 등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