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처녀 노래, 노래비, 동상>
▶ 애절한 노랫말: <소양강처녀>가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가요가 된 것은 노랫가락도 가락이려니와 노랫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열여덟 처녀의 수줍은 순정을 아주 애절하게 담아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랫말은 모두 3절로 돼 있는데, 1절은 처녀의 어린 순정을 알아 줄 것을 애태우고, 2절은 떠난 님이 돌아오기를 애태우고, 3절은 역시 사랑노래를 불러주던 님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애태우는 것으로 써져 있습니다.
처녀는 “~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라는 후렴구에서 보듯이 그야말로 소극적이며 순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저 내 마음을 잘 표현은 못하고, 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 노랫말의 뒷얘기: 때는 1968년, 윤기순이라는 18살 가수지망생 춘천출신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서울 을지로에 있는 당시 반야월 씨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에서 가수가 되기를 꿈꾸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양강처녀의 주인공 윤기순은 가수가 되기 위해 반야월 씨를 비롯한 유명한 작사가들을 춘천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마침 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고기를 잡아 파는 어부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배를 빌러 타고 손님들은 윤기순의 안내를 받으며 의암호 이곳저곳을 구경을 했습니다. 구경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가 멈췄는데, 그때의 풍경을 반야월 씨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야월 씨는 <소양강처녀> 가사를 써서 작곡가인 이호 씨에게 1969년 건네줘서 현재 우리가 부르고 들을 수 있는 <소양강처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노래는 소양강처녀의 주인공 윤기순에게 주지 않고, 윤기순과 같이 가수지망생이었던 김태희에게 건네줘서 불러지게 됩니다. 당시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 해에 10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때까지는 2절까지만 있었습니다.
3절은 1992년 <낭랑18세>를 불렀던 한서경이라는 가수에 의해서 다시 불러지는데 이때 반야월 씨는 3절을 추가해서 발표하게 됩니다.
<소양강처녀> 노래의 주인공 윤기순은 밤업소 가수로 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사북면 지암리에서 생활한다고 합니다.
▶ 노래비와 동상: 춘천시는 2004년 10월 8일 소양강 지류가 끝나는 지점인 근화동 소양강변 배터 옆 길가, 곧 소양 2교 밑에 <소양강처녀> 노래비를 세우고, 2005년 11월 8일에는 노래비 앞 의암호에 소양강처녀상을 동으로 주조해서 세웁니다. 노래비에는 단추를 눌리면 <소양강처녀>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소양강처녀상은 밤이면 조명을 비춰서 밤낮 감상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동으로 주조한 형상이 너무 강인해서 사람들은 ‘투사 소양강처녀’, ‘귀신 소양강 처녀’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리가 하얗게 내렸거나, 밤에 조명을 받았을 때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랫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순박하고 애틋한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암호와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져서 나름대로 소양강처녀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객들은 이곳에 오면 사진 찍고, 노래 듣기를 하면서 아주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때 화천댐(파로호) 건설에 필요한 강모래를 파기 위해 설치했던 시멘트 지주에다가 설치한 쏘가리 상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흉측한 시멘트 지주를 쏘가리상으로 만든 발상은 아주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류열풍을 불게 한 <겨울연가>의 촬영배경지이기도 해서 동남아관광객들의 중요한 관광코스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소양강처녀>에 대해서는 설이 여럿이지요. 강원일보 2007년 11/30일자 기사에는 18세의 춘여고생 박경희가 반야월을 만난 데서 가사가 나왔다고 하는 증언 기사가 실렸지요. ~~하더라라는 글보다는 되도록 출처를 병기하면서 올려야 참조가 될 거 같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이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소양강처녀의 원작자가 반야월이 아니라 유연태라는 주장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가정리출신 유장균이라는 시인은 그의 산문집 '사는 게 재미있습니까'에서 소양강처녀 노래말의 원작자는 반야월씨가 아니라 고 유연태 씨, 즉 유장균 시인의 백부라고 밝히고 있다.
'소양강처녀'라는 제하의 산문에서 그 대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노래는 60년대 말에 지어진 것으로 노랫말의 원작자는 고 유연태,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백부가 되신다. 그는 춘천에서 세 번씩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가산까지 탕진한 후 실의에 빠져 있었다.
적막한 말년에 소일삼아 이 노랫말 등 여러 편을 지었으나 무명이었기 때문에 평소 친지였던 명목상의 작사가에게 그들을 넘겨주었다.'이 증언은 유장균 시인의 누님으로부터도 확인을 했다. 유연태씨가 대중가요 작사가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유연태 씨가 1973년 3월 1일 춘천시로부터 ‘우리 고장을 소재로 한 건전한 대중가요를 작사하여 전국에 관광춘천의 아름다움을 널리 소개’하였다는 이유로 받은 감사패의 내용이다.
또 하나는 유연태 작사, 이시우 작곡의 ‘꽃피는 강원도 춘천’이라는 노래가 있다. (레코드는 유용태 씨 소장)
소양강 처녀의 원작자가 반야월 씨 말구 따로 있다는 이야기는 춘천 문화계에 비사처럼 전해지고 있다. 유장균 시인의 말처럼 친한 사이인 당사자에게 자기가 쓴 가사를 넘겨 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연태 씨와 그의 조카인 유장균 시인이 없는 지금, 원작자가 누구냐를 논한다는 건 좀 껄끄러운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소양강처녀의 가사에 담긴 애절함은 가라오케나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애창되는 노래로 뽑힐 만한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유장균 시인이 산문 글에서 표현한대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지은 노래가 후세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데 한몫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인 유장균(1942~1998년)은 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춘천시 남산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춘천고등학교 졸업,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화방송 보도국 기자 역임, 1974년 미국으로 이민, 1990년 월간 <현대시>에 구상, 김광림 시인의 추천으로 재등단, 1996년 <해외한국시>동인으로 활동, 1998년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타계, 시집으로는 <조개무덤>(1991) <고궁돌담을 걷고 싶네>(1991)
<세크라멘토의 목화밭>(1994) 등이 있다.
근래 소양강처녀 저작권 분쟁이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