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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홍길동전을 한글로 쓴 이유
우리는 학창시절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요, 최초의 한글 소설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이라 익히 배워 왔다. 그래서 허균 하면, 한글로만 소설을 쓴 사람으로 자칫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허균은 한문으로 된 남궁선생전,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장생전 등의 작품을 남긴 바, 그 문학성이 매우 뛰어나다.
그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려 전하는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학산초담(鶴山樵談)은 그의 높은 문학적 식견을 보여주는 비평문이다. 그러므로 허균은 한글로만 소설을 쓴 작가는 아니다.
그러면 그는 왜 유독 홍길동전을 한글로 썼을까? 이에는 필연적인 연유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허균의 혁명사상이다. 그러면 그의 혁명사상은 어디에서 싹이 터서 어떻게 자랐을까?
허균은 조선 중기를 살다 간 문인으로서, 당시 학자요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던 허엽(許曄)의 아들이며, 유명한 여류시인 난설헌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과 식견이 뛰어나 뭇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이렇게 적었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추연(秋淵)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쓴 홍길동전의 첫머리를 한번 보자.
“조선국 세종 때에 한 재상이 있었다. 성은 홍이요 이름은 모(某)라.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물망이 조야에 으뜸이고, 충효가 겸비하기로 이름이 일국에 떨쳤다.
일찍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인형(仁衡)으로 정실부인 유씨의 소생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길동(吉童)으로 시비 춘섬(春纖)의 소생이었다. …… 공(公)이 그 말을 짐작하나, 짐짓 책망한다. ‘네 무슨 말인고?’ 길동이 재배하고, ‘소인이 평생 설운 바는, 대감 정기로 태어나, 당당하온 남자 되었사오매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이 깊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이에서 보듯이, 길동은 계집종 춘섬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까닭에,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정실 태생인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란다. 또 그는 매우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했지만, 서출이라는 신분의 차별 때문에 세상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허균은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의 사회적 병폐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허균은 서자가 아니고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형 허성은 예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를 거친 인물이었다. 그런 사대부가의 자제인 허균이 왜 첩의 자식인 서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스승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허균은 이달에게서 시의 묘체를 터득하였고, 나아가 인생관과 문학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달은 허균의 형인 허봉의 친구였으며, 누나인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한 사람으로, 양반 아버지와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어머니가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기생이니 이달이 출세를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였다. 그는 당나라 시에 뛰어나 백광훈, 최경창과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이름을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하여 세상에 나가 설 수 없는 비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허균은 이러한 스승의 삶을 어릴 때부터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저렇게 뛰어난 자질을 갖춘 자신의 스승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세상의 적폐라는 것을 뼈아프게 새겼다. 적서차별은 반드시 깨뜨려야 할 제도적 악습이라는 생각을 키우며 자랐기 때문에 허균은 이달이 죽은 후에 그를 애달피 여겨,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이라는 글까지 지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허균은 평소 서얼들을 가까이 하며 지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규합하여 혁명의 뜻을 속으로 다졌다. 당시 서자들의 모임인, 이른바 강변칠우(江邊七友)들과도 어울려 지냈다. 강변칠우란 서자들의 모임으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응서, 심전의 서자 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양갑, 평난공신 박충간의 서자 치의,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경준, 박유량의 서자 치인, 서자 허홍인 등인데, 이들은 허균, 이사호 및 김장생의 서제(庶弟) 경손 등과 깊이 사귀었다. 이들은 1608년 연명으로 서얼차별의 폐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 여주 강변에 무륜당(無倫堂)이라는 집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화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그들과 교류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서얼차별이라는 사회적 부조리 척결에 대한, 허균의 간절한 생각은 그의 글 유재론(遺才論)에 잘 나타나 있다. 유재론이란 글자 그대로 ‘재주 있는 자를 버리는 데 대한 논설’이란 뜻으로,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실려 전한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이고, 부부고(覆瓿藁)는 ‘하찮은 글’이라는 의미로 자신을 낮추어 쓴 말이다. 그럼 그 전문을 보기로 하자.
“나랏일을 맡는 사람은 모두 인재라야만 한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그 재주를 더 많이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하여 인색하게 덜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옛날의 어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인재를 초야(草野)에서 구하기도 하고, 하찮은 군사들 속에서도 구하였다. 또 더러는 항복한 오랑캐 장수 가운데서도 뽑았으며, 심지어 도둑이나 창고지기 중에서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은 모두 그 일에 알맞았고, 각기 자신의 재주를 제대로 펼 수 있었다. 그러니 나라로서는 복됨이었고 다스림은 날로 새로워졌다. 이것이 사람을 바로 쓰는 길이었다. ……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재가 적은 것이 옛날부터 걱정하던 일이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인재를 쓰는 길이 고려 때보다 더욱 좁아졌다. 대대로 벼슬하던 높은 가문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없었고, 시골에 숨어 사는 사람은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막혀서 쓰이지 못하였다. …… 옛날부터 오늘날까지는 멀고 오래되었으며 세상은 넓다. 그렇지만 서자라고 해서 현명한데도 버리거나, 어머니가 다시 시집을 갔다고 해서 그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머니가 천하거나 다시 시집을 간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로 두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는데, 재주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하여, 나랏일을 그르칠까 더욱 걱정스럽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길을 막고는 인재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남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북쪽으로 수레를 모는 격이다. 차마 이것을 이웃 나라에서 들을까 부끄럽다. ……평범한 사람들도 원한을 품으면 하늘이 슬퍼한다. 우리나라는 원망을 품은 지아비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이나 된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편안하길 바라겠는가?
하늘이 보냈는데도 사람들이 그걸 버렸으니 이는 하늘의 도리를 어기는 것이다. 하늘의 도리를 어기면서 하늘의 뜻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한다면 좋은 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은 이와 같이 신분적 차별 때문에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서얼들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이는 국가적인 큰 손실이라 생각하였다.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하였다. 중국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두루 쓰는 데 비해, 조선은 땅덩이도 좁고 인재가 날 가능성이 약한데도 첩이 낳은 자식이라 하여 인재를 쓰지 않으니, 이는 곧 하늘이 준 인재를 스스로 버리는 꼴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소설 속의 홍길동은 허균이 늘 가슴 아파하면서 가슴속에 묻어 놓고 키워 오던 바로 그 전형이다. 홍길동이 서자로 태어나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는 것은 바로 적서차별 때문에 생긴 폐단이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혁명사상은 문집에 실려 있는 호민론(豪民論)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 그 요지를 일별해 보기로 하자.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 백성이다. 그런데도 위에서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그 연유는 무엇이며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백성은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항민은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이, 그저 법을 따르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며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는 항민과 같으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다. 그리고 호민은 다스리는 자의 지배에 적개심을 갖고 기회를 엿보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마침내 들고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항민과 원민은 속으로 원망만 품고 있을 뿐이므로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호민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또한 살기 위해서 호미나 고무레, 창 등을 들고, 무도한 위정자를 타도하기 위해 따라 일어서게 된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오광(吳廣)이 학정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섰기 때문이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黃巾賊)의 봉기가 그 원인이었다. 당(唐)나라의 멸망도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이들의 나라는 각각 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호민들로서 학정의 틈을 노린 것이다.
우리 조선의 경우를 보면, 백성이 내는 세금의 대부분이 간사한 자에게 들어가기 때문에 일이 생기면 한 해에 두 번도 거둔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망은 고려 때보다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하면서 안도한다. 만약 지금 견훤(甄萱)․궁예(弓裔) 같은 호민이 나타나서 난을 일으킨다면, 백성들이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위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형세를 두렵게 여겨, 정치를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허균은 기존의 잘못된 질서를 혁파하기 위해 호민을 따라 원민, 항민들이 모두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개혁론을 내세우고 있다. 곧 혁명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홍길동이 도둑들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조직하고,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탐관오리들이 불의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양민들을 구제하는 의적이 된다는 내용은, 바로 호민론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홍길동전은 한글로 쓴 최초의 소설이다. 허균이 한글로 소설을 쓴 까닭은 바로 유재론과 호민론에 나타낸 그의 사상이,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 즉 원민, 항민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문을 모르는 서얼을 비롯한 하층민들에게까지, 부조리한 세상을 개혁하여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혁명의 길로 나서게 하기 위해, 쉬운 한글로 쓴 소설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작품 속에서 홍길동이 도둑들을 이끌고 경치가 수려하고 땅이 기름진 율도국에 이르러, 마침내 왕위에 올라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것도, 바로 교산(蛟山) 허균이 꿈꾸던 이상향 곧 차별 없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하는 혁명사상을 총체적으로 담아 표현한 것이다. 당시의 소설들이 대개 중국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홍길동전이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창작되었다는 점도 바로 그러한 사상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균의 이러한 혁명사상은 당시 사회나 사대부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결국 그를 견제하던 이들에 의해 역모죄로 잡혀, 동료들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고 시신도 거두어지지 못하였으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끝내 복권되지 못한 채 그가 꿈꾸던 혁명사상과 함께 잠들고 말았다. 그러나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읽혀서,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는 혁명에 그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한글로 썼던 홍길동전만은 우리 문학사의 찬연한 빛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