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에 타계하신 G선생님은 임종 두어 달 전부터 식음을 거의 놓으셨다고 했다. 그러고는 단지 술, 그것도 막걸리만 한두 모금씩 넘기는 걸로 버티셨다고 들었다. 평소에도 장작개비처럼 바짝 마르고 허리가 굽은 분이셨다.
대학 시절, 나는 두 학기에 걸쳐서 선생의 강의를 수강했다. 현대시 감상과 시 창작 과목이었다. 선생은 시인이자 대단한 한학자이셨지만 정작 강의에서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소개하시었다. 선생에게 시의 세계란 곧 상징의 숲이었는지 모른다. 깡마른 체구에 숱 적은 곱슬머리, 검은 빛이 도는 주름 많은 얼굴, 그리고 가느다란 눈, 세모난 턱 등 선생의 남다른 외모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선생의 강의야말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시에 대한 열정과 뭇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을 매양 넘치는 익살과 유머로 풀어내는 강의여서 100분짜리 수업 시간이 늘 짧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무렵 우리는 선생의 난해한 시보다도 훨씬 더 선생의 강의를 좋아했던 것이다. 선생 특유의 그 어조, 표정, 몸짓 등 40년 저쪽의 일인데도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생의 천의무봉한 시학 강의는 종종 엉뚱한 화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영화 <안개>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내가 배우 윤정희와 가수 정훈희를 알게 된 것도 선생 덕분이었다. 그 영화에 대해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윤정희는 그 영화를 위해 배우가 된 것 같더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배우 윤정희 씨는 그 후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또 각종 연기상을 두루 받았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한 찬사는 달리 없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신인배우 윤정희가 우리의 가슴 깊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한데 다음 순간, 우리는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선생이 덧붙인 다음 대사 때문이었다.
“배우, 좋지. 나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겁 많은 좀도둑 같은 역 말이야…….”
강의실이 옴팍 뒤집어졌는데도 선생은 별다른 표정 없이 엉거주춤 서서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반쯤 타다 남은 담배꽁초를 꺼냈다. 그러고는, 성냥 가진 사람 없나? 하는 듯이 꽁초 쥔 손을 조금 쳐들어 보였다. 선생의 습관 중 하나였다. 담배는 꽁초까지도 착실하게 챙겨두는 분이 어째서 불은 늘 안 갖고 계시는지, 나로서는 지금도 그 점이 선생의 시만큼이나 불가해하다. 앞자리에서 불을 빌린 선생은 맛나게, 알뜰하게, 담배를 피우셨다. 웃음의 돌풍이 아주 잠잠해질 때까지.
(……)
언젠가 선생은 또 이런 말도 했다.
“먼 훗날, 자네들 중에서 말이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도 있지. 혹, 안 그런가? 혹…… 그러면, 나라에서 커다란 잔치를 베풀겠지, 아마. 그래서 내 미리 말해두는 바인데, 잊지 말고 그 축하연에 나도 꼭 초청해 주게나. 내로라하는 신사숙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야. 아무렴! 그럼 난 그 말석에 끼어서 옆 사람에게 이렇게 소곤거리겠네. 저기 저 주인공을 한때 내가 가르쳤다오…… 오,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이겠는가!”
선생은 일쑤 그런 투로 인생과 문학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셨다. 그 선생의 마지막 날들을 곁에서 모신 어느 후학은 스승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선생은 여러 달째 곡기를 끊은 채 이따금 막걸리만 한 모금씩 넘기셨다고. 막걸리 한 모금 마시고 두보 시 한 구절 읽고, 그리고 잠시 눈물짓고…… 다시 막걸리 한 모금, 두보 한 구절, 그리고 눈물 조금……
(……)
생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저 도저한 허무 앞에 우리는 어떻게 맞설 것인가? 시인은 인간의 근원적 비극을 노래함으로써, 농부는 잡초 무성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꿈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 농부에게 파종은 미래의 기약이면서 강력한 자기 존재 증명인 것이다.
• 작가_ 이동하 –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귀국.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모래』『바람의 집』『저문 골짜기』『폭력연구』『삼학도』『문 앞에서』『우렁각시는 알까?』『매운 눈꽃』, 장편소설『우울한 귀향』『도시의 늪』『냉혹한 혀』『장난감 도시』
• 출전_ 『매운 눈꽃』(현대문학)
배달하며
긴 시간을 아우르는 소설입니다. 지금은 원로가 된 작가가 문청시절 G선생님의 아이였듯이 저 역시 세대를 걸러 작가의 아이로 한때를 보냈습니다. 문장배달을 하며 ‘첫 젖을 물리다’라는 말을 다시 배웠는데 문청들에게도 첫 젖을 물려주신 스승들이 있지요. L선생님이 첫 수업을 시작하며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돌이켜보면 스승의 칭찬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네.” 그리고 L선생님은 여느 학생의 서툰 작품에서도 조그마한 칭찬거리를 찾아서 독려하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분이 토닥여주는 힘으로 첫걸음을 떼었지요. 때로 “성태야!” 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환청이 들려 책상에서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그 강의실에서 후배들을 만나다 보면 L선생님이 한때 내 습작품에 조심스럽게 가필해놓던 연필 글씨들이 떠오릅니다. 연필이 사각거리며 나아가듯이 잔잔하게, 자신을 아끼며 겸손하게 글밭을 일구라는 느낌으로 전해집니다. 저도 이제 선생 자리에서 한 마디 보탤 자격이 된다면 문청들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문학은 결코 인생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 문학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래서 인생에 단 한 편은 없다는 것. 어쩌면 겸손한 실패로 점철되는 게 문학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모처럼 봄날이 훤해집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
첫댓글 문학은 결코 인생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 문학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래서 인생에 단 한 편은 없다는 것. 어쩌면 겸손한 실패로 점철되는 게 문학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모처럼 봄날이 훤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