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현 관아, 온조사당, 직산향교, 민익현 가옥>
천안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적이 이곳 직산에 옹기종기 다 모여 있다. 천안 지역에서 가장 전통적인 내력을 가진 지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오는 날이라 살펴보기가 좀 힘들었지만, 축축한 단풍과 낙엽에 담긴 가을 정서를 듬뿍 선물로 받았다. 백제 온조왕에서 조선의 관아와 향교에 이어 조선 후기의 민익현 가옥까지 이천 년의 역사가 한줌 공간에 다 모여 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의 시조가 절로 생각난다.
직산현 관아에 주차하면 온조사당과 직산향교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지만, 관아를 지나 좁은 길을 올라가면 온조사당 곁으로 작은 주차공간이 나온다. 그러나 매우 협소하여 관아 앞에 주차하고 걸어올라가는 것이 나을 거 같다. 온조사당과 향교의 옆구리가 붙어있어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다. 여기서 민익현 가옥은 걸어서 가기는 조금 멀고,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좋다. 앞에 주차공간은 별로 없으니 고려해야 할 듯하다.
방문일 : 2021.11.10.
1. 둘러보기
* 직산(稷山)
본래 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설이 있는데,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한반도에 남하하여 이곳에서 개국하고 도읍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1401년(태종 1)에 강등시켜 감무를 두었고, 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 1505년(연산군 11)경기도에 예속시켰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하였다. 1895년(고종 32)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천안군으로 병합, 1991년 천원군을 천안군으로 개칭하고, 1995년에는 천안군과 천안시가 통합되어 천안시가 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이곳의 지형이 높아 천수답(天水畓)이 많고 가뭄으로 피〔稷〕가 무성하여 피산이라 칭하던 것이 직산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원 관내의 해안지방에 월경처(越境處)로서 외야곶(外也串)을 가지고 있어 이곳을 통하여 현의 세곡(稅穀)을 경강(京江)으로 운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헐원〔愁歇院〕 (백담집)
그 옛날 고국에 기장 우거져 서글펐으니 / 故國當年憫黍離
옛 신하의 애절한 원한 멎은 적이 없었네 / 舊臣哀怨歇無時
태평한 천 년 세월 창성한 기운 드높으니 / 太平千載隆昌運
이로부터 기쁜 함성 사방에 이어지리라 / 自是歡聲達四陲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수헐원은 직산읍(稷山邑) 수헐리에 있던 역원이다.
백담집(栢潭集)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 백담 구봉령(具鳳齡:1526~86)의 시문집이다. 백담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 직산현 관아
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327-8
직산현 관아(稷山縣官衙)는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에 있는 조선시대 직산현의 지방행정사무를 보던 관청 건물들이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내동헌, 동헌, 내삼문, 관아문 등 4동의 건물만이 남아있다.
직산현관아문. 관아문은 대개 비슷한 모습이다. 앞 네 개의 기둥과 1층 대문, 2층 망루, 그리고 2층 망루 중앙에 현판이 같다. 보령관아문, 서산관아문, 남포관아문 등등, 관아 조성에는 일정부분 원칙이 있었던 것 같다. 동헌, 객사 등이 필수건물이었다.
관아는 지방 목민관이 사무를 보는 지방 관청이다. 즉 시청이나 도청에 해당하는 곳이다. 천안에는 없고, 직산에는 있다. 직산은 오랜 연원을 가진 전통의 고장이다.
호서계수아문 비석
직산현 관아 비석
한때 경기도에 편입되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하였던 곳이라니, 호서경계의 첫 관아 문이라는 '호서계수아문'은 그 이후 세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관아 정문 옆 비석거리
직산현 현감, 순찰사, 군수 등의 영세불망비, 공적비, 선정비 등이 한곳에 모아 놓았다. 비석의 모양새로 보아 건립 연대가 매우 다양해 보인다. 여러 시대의 비석을 모아놓은 비석밭이다.
관아 문이 열려 있지 않아 담장 너머로 촬영한 것들이다.
2) 온조사당
*온조왕(溫祚王)
백제 제1대 국왕(재위: 기원전 18년∼기원후 28년)이다. 온조(溫祚)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온조, 비류(沸流), 구태(仇台) 등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맹체를 주도한 대세력으로는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웅거한 집단이며,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風納土城 또는 경기도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조사당
2015년 5월 20일에 복구되었다. 온조사당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단종 2년(1454년)에 세워졌으나 정유재란(1597년) 와중에 소실됐다.
천안시는 총사업비 13억원을 들여 사당을 다시 세웠다. 향토사학자들은 온조왕이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13년간 최초로 직산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 700년 역사의 서막을 연 것으로 추정한다.
직산현 관아 쪽에서 바라본 온조사당 전경
사당 입구 삼문
사당 정문이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촬영하였다.
*온조사당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도 있다. 숭렬전(崇烈殿)이 그것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 숭렬전은 1625년(인조 3)에 왕명으로 지은 것이다. 당시 성곽을 축조한 이서(李曙)도 뒷날 함께 배향되었다. 현재는 본전(本殿)·동재(東齋)·서재(西齋)·외삼문(外三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조왕사에서 정조조 사액으로 1795년 숭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본카페 광주 남한산성 조 참조)
사당은 1464년(세조 10년) 충청남도 천안에 있었으나 임진왜란(1592년~1598년)때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1638년(인조 16년) 온조왕사를 남한산성에 건립했다. 1795년(정조 19년) 왕이 ‘崇烈(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사는 음력 9월5일에 지낸다. (위키백과)
온조사당은 단종 때 세운 것이 임란으로 소실되자, 인조조에 '온조왕사'라는 이름으로 인조조에 남한산성에 세웠다. 본래의 사당이 있던 곳이 천안이므로 복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온조왕사당'이라는 한글 편액이 조금 거슬린다. 무슨 의도인지 궁금하다.
조선조에는 역대왕조를 추모하는 사당을 여러곳에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경기도 연천에는 고려왕실을 추모하는 사당 숭의전이 있다.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셨고,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를 모셨다.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은 신라의 시조를 모셨고, 충청남도 직산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온조왕을 모셨으며, 연천 숭의전에서는 고려 태조 및 혜종·정종·광종·경종·목종·현종을 제사지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 인용 '직산의 숭렬전'은 오류인 거 같다. (연경) 정치 주도 세력이 달라도 선대 왕조를 모신 조선의 포용력이 왕조의 수명을 세계에서 거의 가장 긴 왕조로 만든 이면의 이유가 아닌가 한다. 위 사당 중 아마 직산의 이 사당이 제일 애매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 광주에서 인조조에 따로이 사당을 만든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천안시가 기왕에 다시 이 사당을 다시 세웠으니 이 문제를 보다 명확히 짚어주면 좋을 거 같다.
3) 직산향교
소재지 :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1길 35-6(군서리 164-1)
*1588년(선조 2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재건하여 1841년(헌종 7)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5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 전적은 판본 6종 13책, 사본 11종 11책 등 총 17종 24책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성전.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4) 민익현가옥
민익현가옥 (閔益鉉家屋)
소재지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3길 17
1820년(순조 20년) 규장각 대제학으로 있었던 민승세(閔承世)가 직산으로 낙향하여 지은 집이라 한다. 안채는 'ㄱ'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안채의 상량문(上樑文)에 "광서 16년 경인윤이월십육일(光緖 十六年 庚寅閏二月十六日)"라고 상량(上樑)한 날이 쓰여 있어 건축 연대가 1890년(고종 27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ㅡ'자 형태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부분적으로 많이 고쳐진 집이나, 조선말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며 집뒤에는 집안의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가 있다.
2. 관람 후
천안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적이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직산은 역사적 함의가 깊은 유적이 이처럼 모여 유적밭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별로 관리가 안 되고, 많이 알려져 있지도 않다. 온조사당 건립 등 그래도 보호나 개발 움직임은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보존과 현재적 의미 확대이다. 아무 데도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화장실도 닫혀 있다. 관람객도 관리인도 보이지 않는다. 진입로도 매우 불편하다.
직산향교나 직산현관아는 충분히 보존과 홍보 의미가 높은 유적임에도 그 의미가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이다. 향교는 조선조 국가 교육기관이다. 사학기관인 서원보다 더 중시되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지역마다 서원은 기리면서 향교는 퇴락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공교육보다 사교육을 중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향교의 현재적 의의를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직산현 관아도 마찬가지. 이렇게 같은 동네에 중요 기관이 함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도 각각 따로따로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다. 온조사당 건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유적지의 보존과 활용이 아닌가 한다. 유적지를 여기저기 돌아보다 보면, 있는 유적 보존보다 새로 새건물 건립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곳이 많다. 행정적 치적이 확실히 드러나서가 아닌가 한다. 잘못하면 전시행정에 그칠 수 있다. 내실을 기하는 유적 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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