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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들여다보기 스크랩 918-1392년 고려 470년간
jr-m 추천 0 조회 64 13.09.13 1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

高麗
존속 기간: 918 - 1392


고려의 위치
수도 개경
공용어 중세 한국어
정부 형태 군주제
태조(918년 ~ 943년)
공민왕(1330년 ~ 1374년)
공양왕(1389년 ~ 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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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후삼국을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1] 약 470여 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 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수도 개경외항벽란도에서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했다.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등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송나라와는 우방과 같은 관계를 맺었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유민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정부에 반항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40여년에 걸친 원나라(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지배를 당하면서 국력이 쇠퇴했고,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는 멸망하였다.

 

[편집] 역사

[편집]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고려 태조의 어진

 

9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궁예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건원칭제하기에 이르렀다.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백제를 세웠고(구별을 위해 보통 후백제로 부른다.),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고려를 세웠다(구별을 위해 후고구려로 부른다.). 이로써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이후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고 쫓겨났다. 이에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서울을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고구려와 동일한 국호인 고려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후계로 자처하는 데에는 왕건과 궁예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왕건은 새로운 국가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기를 원하였으며, 그 목적으로 수도를 자기의 본거지로 옮겼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족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왕건은 또 대외 정책에서도 궁예와는 달리 친(親)신라 정책을 썼다. 견훤을 타도하기 위하여 신라와 우호를 맺은 것이다.

 

이는 또 한편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이 군사적인 대(對)신라 작전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즉 금성(金城) 북(北) 50리의 땅에 신광진(神光鎭)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케 하였던 것이다.

 

이런 왕건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926년 발해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고구려를 계승한 유일한 한민족의 왕조로 정통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편집] 광종의 개혁 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956년)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된 반면, 노비들은 양민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안정되었다.

 

958년 광종은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 과거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또한 이것은 문치주의(文治主義)로 전환한 표시로, 무신 대신에 문신을 관리로 등용하려는 것이다. 문신을 등용하는 기준은 유교에 두었다. 따라서 과거제도의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었다. 이것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백관(百官)의 공복(公服) 제정이었다. 복색을 제정함으로써 왕권 중심으로 귀족층을 안정시키고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게 된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또한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으며,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2]

[편집]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문벌 귀족이라 불리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황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한편 11세기에 들어와서는 선대(先代)에 이룩해 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선대 이래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숙제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로 부각되어 시련과 진통을 적지 않게 겪어야만 하였다. 우리는 이를 내정과 대외정책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내정에서 고려 왕조가 건국한 이래의 오랜 숙제이던 왕권의 강화는 역대 왕의 일관된 노력에 의해 상당히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 기반이 확고하게 자리 잡히지는 않았다. 가령 성종의 다음 왕인 목종(穆宗)이 서북면 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에게 폐위(廢位)당하고 그에 대신하여 현종(縣宗)이 즉위하게 된 것이 예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대외문제에도 고려 왕조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는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하였다. 중국 대륙에는 한족(漢族)인 송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송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북방 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동아시아 정세에 파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거란은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고려를 요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0세기 말에는 거란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내침하여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徐熙)의 재치 있는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강동 6성(江東六城)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형식적으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를 단교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는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던 거란에 대하여 성의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송과는 여전히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관계의 모순이 11세기 초에 거란의 대대적인 무력 침략을 초래하게 하였다.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여 이듬해까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광대한 지역에서 분탕질을 하였으며, 현종은 멀리 전라도 나주(羅州)까지 피난을 갔다. 그러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요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였다.

이에 요군은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1018년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했고,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3]

 

그 뒤에도 거란은 여러 차례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거국적인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내침한 거란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극복하면서 점차 그 사회와 문화를 향상시켜 나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제(唐制)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를 시행하는 데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1세기의 고려에서는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즉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세기의 고려에서는 빛나는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한 사실을 주목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세기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

 

말하자면 이 세기는 전(前)세기가 남겨 놓은 난제(難題)를 풀어 나가면서 고려 일대의 사회체제를 보다 확고하게 마련하였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女眞族)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는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별로 강대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 세기까지 여진족은 고려에 복속(服屬)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여진족은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편집] 요나라의 침공

10세기 초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는 수차례 외교적 충돌이 있었다.

 

처음 요나라는 6만의 군사로 고려를 침공했다 (993년). 요나라는 고려가 영유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안융진에서 요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의 협상에 나섰다. 이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요나라로부터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가 군대를 거둔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빌미 삼아,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 성종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1010년). 강조가 직접 거란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통주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개경이 일시 함락되는 난관을 겪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거란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였다. 이에 요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공해 왔다 (1018년). 개경 인근까지 침입했던 요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결국 황해도 신은현에서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의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할 지경이었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연달아 참패한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나라를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요나라를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3]

[편집]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 완옌부의 추장이 다른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충돌에서 패전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약 15만의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별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년),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려는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고려 조정은 다시금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요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1115),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격심한 정치적 분쟁을 겪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4]

[편집]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한편 12세기의 인종(仁宗)초로부터 고종(高宗) 즉위 전후에 이르는 약 90년간은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 확실히 한 획을 그을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때는 고려 전기 이래의 정치조직 자체에 내포된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여러 모순과 상극적 요소가 자라 차례로 폭발되었다. 그 분규는 먼저 개경의 부패한 귀족사회 자체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그것이다. 그 뒤를 이어 서경 중심의 소위 개혁정치를 꿈꾸던 묘청(妙淸) 일파의 천도운동이 일어났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상호간의 항쟁을 조성하였다. 그러한 항쟁은 수차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귀족 문화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종(仁宗)·의종(毅宗) 때에 연달아 일어난 반란은 경원 이씨(인주 이씨) 세력의 절정을 이룬 이자겸(李資謙)이 일으켰다.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황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예종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왕실과 중복된 혼인관계를 맺은 이자겸은 권력과 재산이 왕보다 더했으며, 내외의 요직에 일족을 앉히고 반대 세력을 거세하여 권세를 독차지했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이자겸의 횡포를 증오한 인종은 1126년(인종 5년)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최탁(崔卓)·오탁(吳卓) 등 측근 세력을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년). 교만해진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참설(讖說)을 믿고,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척준경의 군사행동으로 왕을 금족(禁足)시키고 측근의 여러 신하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다가 뒤에는 도리어 일당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되고,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제거되니 귀족의 발호는 일단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권의 쇠미와 귀족 세력의 강대로 빚어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자겸 일파, 즉 개경 귀족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백수한(白壽翰)·정지상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칭제건원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천도하여 새 왕궁인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은 고려 초부터 북진정책과 관련하였으며, 또 개경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태조 때부터 서경에서는 분사제도(分司制度)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반면 개경을 세력 기반으로 하며 전통을 존중하는 김부식 등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유참·조광 등과 더불어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묘청 반대파의 수장인 김부식(金富軾)에게 서경 정토(征討)의 명령을 내렸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정지상·백수환 등을 죽이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조광(趙匡)은 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묘청·유참 등을 목베어 귀부(歸附)의 뜻을 표했으나 거절된 후 끝까지 반항하였다. 1136년(인종 14년) 2월 평양성이 함락되어 난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서경 세력의 정권 장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편집] 무신정권(1170년-1270년 100년간 )

 

이의방=>이고 살해, 정균에게 피살=>정중부 피살=>경대승 병사=>이의민 피살=>최충헌

 

  [편집] 1170년-1270년 100년간 무신정권의 집권자
순서 이름 시작년도 완료년도 집권 비고
1대 이의방 1170년 1174년 4년 의종
명종
의종의 폐위. 이고 살해, 정균에게 피살
2대 정중부 1174년 1179년 5년 명종경대승에게 피살
3대 경대승 1179년 1183년 4년 명종병사
4대 이의민 1183년 1196년 13년 명종(노비출신)/            최충헌에게 피살
5대 최충헌 1196년 1219년 23년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충헌왕)

 1206년 징기스칸 몽골제국 탄생

1216년 몽골 연합 "거란족" 강동성 전투

6대 최우 1219년 1249년 30년 고종

최충헌의 아들. 집권12년후 1231년 몽골 1차침입

                                  1232년 강화도 천도

7대 최항 1249년 1257년 8년 고종 최충헌의 손자. 1251년 몽골 4차 침입
8대 최의 1257년 1258년 1년

최충헌의 증손자. 1257년 몽골 7차침입

(최의- 김준에게 피살, 김준 몽골에 항복)

* 유경 1258년 1260년 2년 무신정권기 유일한 문인 실권자.
일반적으로 문인이기에 무신정권 계보에서 빠진다.
9대 김준 1258년
(1260년)
1268년 10년
(8년)
원종 노비 자손/ 김준 집권시 몽골에 실질적 항복
10대 임연 1268년 1270년 2년 원종
영종
원종
   원종 폐위
11대 임유무 1270년 1270년 1년 원종(충경왕) 임연의 아들. 1270년 개경천도(원종=충경왕 복위)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수립된 정부를 말하며, 그 시기를 무인시대라 일컫기도 한다.

 

[편집] 개요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몰락을 초래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무신들에 대한 천대는 의종 때 극에 달했다. 그 때문에 일찍이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일까지 있었다. 생활상으로도 크게 곤란을 받던 무신들의 불만은 오병수박희(五兵手縛戱)를 계기로 폭발하였다.

 

무신의 난은 1170년 의종 24년에 이의방, 이고 ,정중부 등에 의하여 일어났다. 이 반란의 성공으로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하였으며, 많은 문신을 살육했다.

 

그 뒤 김보당이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많은 문신들이 공모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이 후 ‘조위총의 거병’ 등 무신에 대한 항거가 많았으나 모두 실패했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관직의 독점, 사전의 확대를 통하여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인 실력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문벌을 존중하고 문신들이 지배하던 고려사회는 변질되어, 실력 유무가 정권장악 여부를 결정하는 무신사회가 되었다. 이리하여 쉴새없이 같은 무신 사이에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의방이고를 죽이고, 딸을 태자비로 삼아 권세를 부리다가 정균(鄭筠)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그 후 홀로 득세하여 위세를 떨치며 방자한 행동을 자행하던 정중부경대승에 의해 살해되자, 이에 무신들은 경대승을 전체의 적으로 돌리려 했다. 여기에 위험을 느낀 경대승은 신변보호를 위해 〈도방〉을 설치했으나 병사하였으며 이의민이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그도 최충헌, 최충수(崔忠粹)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2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수차례 정권이 교체됨에 따라 일어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의 안정을 가져온 것이 곧 최충헌이었다. 그는 모든 적대세력을 차례로 억압하고 독재 정권의 수립에 성공했다. 그는 문벌·전통에 대한 사회의 강한 집착 때문에 왕권을 존속시키기는 했으나 왕위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였다. 또한 그의 실력으로 사원 세력을 제거하고 농민과 노비의 난을 진압하여 최씨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뒤 최씨 정권(=최우)은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옮겨 가서 몽골에 대항한다(→대몽항쟁, →고려-몽골 전쟁). 최충헌으로부터 최우, 최항, 최의에 이어지는 동안 7차에 걸쳐 몽골과 전쟁을 치렀으며, 그 와중에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즉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는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결국 문신인 유경(柳璥)최의의 수하였던 김준에게 최의가 살해(1258년)되고 몽골의 제7차 침입이후 몽골에 조공하고 10년간 소강상태 후, 무신정권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 반발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원종이 폐위된다. 그러나 고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 황제에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1270년(원종:충경왕)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이로서 무인정권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편집] 최씨 집권기

최씨정권이라고 흔히 불리며, 최씨 무신정권으로도 불린다. 집권은 60여년간 4대로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가 집권한 때이다.

[편집] 군사 기구

[편집] 도방

처음 무신정변 이후에 무인들은 저마다 문객과 집안의 종을 무장시켜 사병화하였는데, 이는 경대승도방에 이르러 조직화되었다. 최충헌은 경대승을 모방하여 도방의 사병을 6교대로 나누어 교대로 그의 집을 지키게 하고 뒤에 이를 36번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용맹스런 자는 모두 최씨의 사병이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편집] 삼별초

최우는 전국의 도적이 급증하자 야별초를 조직하였고, 그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우별초로 분리되었고 그 후 원나라에 체포되었다가 달아난 군사와 남은 장정들을 모아서 신의군이 조직?는데 이 조직 세 곳이 통합되어 삼별초가 만들어져 고려최정예 부대가 된다.

[편집] 중방

무신정변 직후 무인들이 권력을 행사한 중방은 최씨의 독재정치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력을 잃고 그 대신 새로운 권력 기구가 등장했다. 최충헌은 왕으로부터 진강후(晋康侯)로 봉해지고, 부(府)를 세워 흥녕(興寧)이라 함으로써 무인 정치를 형식적으로 정당화했다.

[편집] 행정 기구

[편집] 교정도감

최씨 정권의 최고 막부와도 같은 구실을 한 것은 교정도감이었던 듯하다. 최충헌 자신은 교정별감에 올라 실권을 행사했으며 교정별감 직책은 최우·최항·최의 등 최씨 4대는 물론 그 후에도 정치적 실권자에게 계승되었다.

[편집] 정방

정방최우 때 비롯된 것으로, 최우의 사저에 설치된 인사 처리 기관이었다. 이는 문신 세력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편집] 서방

최우는 문객 중 문인을 뽑아 서방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많은 문인이 정방으로 진출했다. 최씨는 도방이나 삼별초 같은 군대뿐만 아니라 서방의 문인들도 함께 옹위하게 함으로써 문무의 실권을 장악했다.

[편집] 무인시대의 사회

[편집] 신분 질서

무신정변은 문벌과 문신들의 주도와 무신에 대한 차별에 반기를 든 정변으로, 무신들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이전부터 고려사회는 상층으로부터 하층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으며, 무신정변 이후에는 그 변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무신들의 집권이 확고해지자, 무신과 문신간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 진행되면서 통혼이 이루어졌다. 특히 집권 무신세력들과 기존의 문벌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통혼이 추진되었다. 이는 집권 무신세력들로서 문벌층의 권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문벌층으로서도 집권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나가는 길이었다.

 

이로써 지배층의 상층부는 집권 무신세력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문벌층이 재편성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처럼 변화된 지배층 상층부는 전기의 문벌층에 비해 혈통적인 가문의 권위가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일부 남아 후기 지배층의 상층부를 이루는 권문세족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최고의 지배층이 이루는 계급내혼적인 단위에는 급격히 권세를 잡게 된 하층 출신들이 상당수 새로이 포함되었는데, 그 내부 구성원들의 상승과 몰락이 빈번한 와중에서 이러한 신흥세력의 비중은 서서히 확대되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한 정치세력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인물들은 무인집정과 같은 신흥세력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배층의 하층부에도 지방의 하층 출신들이 장기간의 정변과정에서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군인에서 하급무관으로 진출하는 부류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무인집정 이의민이나 김준처럼 노비의 피가 섞인 하층 출신으로 당대의 최고 권력에까지 접근한 인물들도 있었다. 무신들이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가운데 문신들의 역할은 오직 문장에 능하고 실무행정을 잘 수행하는 이른바 ‘능문능리(能文能吏)’로 축소되었다. 무반들이 문반직을 겸직하는 것이 확대되고, 지방 향리층의 문반직 진출도 증가하였다.

[편집] 경제

토지질서의 붕괴는 농민들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12세기 초 이래 토지겸병에 따른 수취의 증가, 빈번해진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 전란 등은 기근을 불러왔고, 경제적 파탄으로 유망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무신정변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무신집권기에는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농장이 발달하였으며, 전시과제도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하급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수탈을 자행하여 하층민의 항거와 지배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이어졌다.

[편집]무신 집권기의 농민과 천민의 봉기

 

 

하층민의 봉기는 무신집권 초부터 30년간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명종 2년(1172년)에는 서북지방의 성주(成州) 등 3개 주에서 주민들이 수령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켰고, 명종 4년(1174년)에 일어난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에는 서북지방 40여 성의 주민들이 대거 동조하였다. 특히 후자는 진압 후에도 난이 두 차례 재발하여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명종 5년(1175년)경부터는 남부지방에서도 큰 세력을 이룬 지방민의 봉기가 일어났으며, 명종 6년(1176년)에는 공주에 속한 종속 구역인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주동한 봉기가 발생하였다. 망이·망소이는 관군의 회유로 일단 항복했으나, 다음해에 재차 봉기하여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대부분의 군현들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치다가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의해 진압되었다. 충청도지역에서는 명종 12년(1182년)에도 수령의 탐학에 저항한 농민봉기가 있었다.

 

망이·망소이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같은 시기에 전라도에서도 산발적인 지방민 봉기가 있었는데, 전주에서는 군인들과 관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명종 23년(1193년)에는 경상도지역에서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신종 5년 경주를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경상도 일대에 위세를 떨쳤으나, 다음해 최충헌이 파견한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김사미·효심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무신집권기에 발생한 양민·천민·종속 구역민 등 하층민의 봉기는 가혹한 수탈에 몰려 일어난 저항이었으나, 일부 봉기에서는 정권과 체제에 저항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신종 원년(1198년) 만적이 주동이 된 개경 지방 사노들의 반란모의에서는 노비문서인 천적을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앨 것이 표방되었고, 더 나아가 정권의 탈취가 기도되었다.

만적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특히 종속 구역민이나 천민층의 경우 제도적으로 부과되는 부담이 과중하였으므로, 이들의 봉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측면이 강했다. 망이·망소이의 난에 대한 정부의 회유책에 명학소현으로 승격하는 조치가 포함된 것은 그러한 요구에 대한 미봉적 대응이었다. 최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력한 토벌로써 하층민의 봉기를 억제하였으나,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저한 것은 종속 구역민들의 변화였으니, 이들 구역에서는 주민의 이탈이 잇따랐다.

진주 노비 반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리하여 890여 개에 달하던 종속 구역이 12세기와 13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 남은 것들도 대부분 그 성격이 일반 군·현 도는 그 속의 일반 촌락과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편집] 무인시대의 문화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일부 문인들은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에 은거하며 음주와 시가를 즐기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인로, 임춘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기어 스스로를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자처하였다. 다른 한편 이규보, 최자와 같이 최씨의 문객으로서 무인 정권하에서 새로운 출세의 길을 모색하는 문인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두 부류의 문인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하였고, 그 속에서 자라난 것이 신화, 전설, 일화, 시화(詩話) 등을 소재로 한 ‘설화문학’이었다.

한편 기술 분야에서는 목판 인쇄술과 금속 활자 인쇄술이 처음 등장하였다. 또한 의학이 크게 진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편집]고려-몽골 전쟁 : 40년간(후반부 10년간은 김준 항복 후 조공)

고려-몽골 전쟁
날짜 1231년 - 1270년
장소 고려
결과 고려의 조건부 항복
이유 고려의 반몽 외교와 몽골 사신의 피살
교전국
고려 몽골 제국
지휘관
최우
박서
김윤후
우구데이(오코타이) 칸 태종
몽케 칸

구유크 칸
살리타이
자랄타이

 

 

고려-몽골 전쟁은 고려몽골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 원의 침략, 몽골의 입구(入寇), 대몽항쟁, 몽난(蒙亂) 등으로 부르며, 특히 대몽항쟁으로 부를 때에는 고려-몽골 전쟁을 비롯하여 삼별초의 항쟁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편집] 배경

고려 고종최씨(최충헌 집권)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 최충헌 집권 10년차)에는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 최충헌 집권 20년차 3년후 최충헌 사망)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최우 집권 6년차)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편집] 제1차 전쟁 1231년 (최우 집권 12년차)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1231년(고종 19) 장군 살리타이(한자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하여,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대체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드디어 몽골 군사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싸움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한자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

[편집] 제2차 전쟁: 1232년 강화도 천 => 김윤후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이 살해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하였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이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이는 고려의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편집] 제3차 전쟁 1235년-1239년(4년간)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을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편집] 제4차 전쟁 : 1251년(최항 집권기)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한자貴由 :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한자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편집] 제5차 전쟁 1254년(최항 집권 3년차)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편집] 제6차 전쟁 1255년(최항 집권 4년차)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편집] 제7차 전쟁 1257년<최의 집권 1년차>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편집] 1258년-1268년 10년간 <김준> 집권기에  몽골에 실질적 항복

이처럼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힌 채 몽골은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충렬왕)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1268-1270, 임연,임유무 집권)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고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 황제에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간접간섭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의 일이다.

[편집] 영향

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간 질풍 같은 몽골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한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화의 형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신흥 제국 몽골의 팽창 정세를 정확히 관찰하지 못한 무신정권의 허술한 오판으로 자초한 전란이기도 해서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간섭을 받아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는 부마국(?馬國 : 사위나라)으로 변질되어 자주성을 잃은 왕조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기구와 그 명칭은 제국이 아닌 왕국으로써의 관제로 개편당했고, 동·서북면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 등이 설치되어 국토의 손실을 가져왔다. 한편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왕실의 내부·심왕당(瀋王黨)의 대두 등은 고려 쇠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몽골 지배하의 80여 년간은 문물교환·인물교환이 잦아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보게 하여 고려인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게 되었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김방경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고려후기의 무장.

 

 

개요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초기활동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1229년(고종 16) 음서(陰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가 되었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248년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이때 몽고의 침략으로 무인정권이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면서 북계(北界)의 백성들에게도 황해의 여러 섬으로 옮겨 살게 하자,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그뒤 고려와 몽고 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원종이 즉위하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 1263년(원종 4)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한때 모함을 받아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으나, 서북 여러 성에서 몽고 침입 때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진정이 들어와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그뒤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1269년 원에 사신으로 있을 때,

 

김준(金俊) 대신 실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이 정변을 일으켜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를 다시 정벌, 철저한 간섭을 시도하고자 한, 원의 황제 쿠빌라이의 명으로 원의 장수 맹격도(孟格圖)와 함께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연을 치려 동경(東京)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원의 사신 흑적(黑的)의 권고와 이장용(李藏用)의 수습으로 원종이 복위된 것을 알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삼별초항쟁의 진압

 

1270년 원종은 개경환도를 결정하고 대몽항쟁의 주력이었던 삼별초(三別抄)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배중손(裵仲孫) 등은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珍島)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이듬해 김방경은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홍다구(洪茶丘) 등과 출전하여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통정(金通精) 등이 삼별초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의 군대와 함께 다시 삼별초를 공격하여 이를 완전히 진압했다. 이 공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황금허리띠를 받는 등 환대를 받았고 돌아올 때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받았다.

 


원의 일본공격 참가

 

1274년(충렬왕 즉위) 원나라가 합포(合浦:지금의 경남 마산)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쳐들어갈 때, 8,000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여몽(麗蒙)연합군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했다. 쓰시마 섬[對馬島]을 친 다음 일본 본토로 향했으나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7년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 홍다구 일파로부터 국왕과 원의 공주 및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하고 강도(江都)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구금되어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뒤 대청도(大靑島)로 귀양갔다가 다시 원에 이송되었다. 그러나 홍다구의 소환을 계기로 충렬왕이 원의 세조에게 적극 무죄를 호소,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뒤 수상인 중찬(中贊)이 되었다.

 

1281년 원이 다시 일본을 쳐들어갈 때, 고려군의 도독사(都督師)가 되어 일본의 하카다[博多]에 이르렀으나 태풍을 만난데다가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일본 공격에 실패한 후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1283년에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의 호를 받았다.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첨의령(僉議令)을 더하여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해인사(팔만대장경이 있는 곳)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황룡사 9층 목탑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즉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는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이에 대해 김준(金俊)·임연(林衍) 등 무인들의 반대도 노골화하였으나

몽골항쟁 40년 후 1270년 (원종)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5]

[편집] 원의 내정 간섭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특히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 후 고려 왕실은 원 왕실과의 결혼정책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다. 또한 제주도에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고려 임금은 몽골 공주와 결혼하여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황실의 호칭과 격이 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었으며 역시 격이 낮추어졌다.

 

한편 원은 일본 공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하여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으며, 또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속령(直屬領)으로 하였다. 곧 화주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 요구도 고려의 농민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웠다. 또 원은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충선왕(忠宣王)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를 이용하여 고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원의 정치·경제적 간섭과 요구에도 끝내 독립왕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이에 완강히 대립했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변화·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변화는 지배 체제의 문란을 초래했고, 이것은 또한 사회·경제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장(農莊)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공전(公田)이 침식되고 이에 따라서 국가재정의 곤궁과 궁핍이 초래되었다.

 

이때 권문세족이 등장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몽골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권문세족의 불법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일반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편집]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가운데서도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한 토지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일찍부터 존재해 온 귀족들의 사전(私田)은 지배질서의 문란을 틈타 점차 확대되어 전시과(田柴科)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전(私田)은 무인정권이 타도된 뒤에 더욱 진전되어 갔던 것으로 이를 보통 농장(農莊)이라고 한다. 농장의 경작은 전호(佃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다. 유민(流民)도 포함된 이들 경작자는 농노(農奴)와 성격이 비슷하였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 재정을 고갈케 했고, 그 결과 관리의 녹봉(祿俸)이 폐지되었다. 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 사대부 관리들은 권문세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무인정권으로 말미암아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또한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일변시켰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원나라의 강대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明)이 흥기하고 원이 점차 쇠퇴하여 북방으로 쫓겨 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공민왕은 후일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신돈이공수(李公遂) 등 권문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진 사대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편집] 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멸망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반원(反元)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이 10세의 우왕(禑王)을 옹립함으로써(1374년), 권력은 다시 권문세가의 손에 들어갔다. 이인임 일파는 신흥 사대부들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토지겸병을 자행하였다. 반원정책도 수정되어,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등거리 외교가 추구되었다.

 

우왕대 초의 최대 현안은 14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창궐하게 된 왜구(倭寇)를 격퇴하는 것이었다.

왜구는 도처에서 잔혹하게 노략질을 하여 세곡(稅穀) 수송망인 조운(漕運)까지 마비시킬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일본 막부에 왜구의 노략질을 근절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내란에 처한 바쿠후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 성과가 없었다.

 

 1377년(우왕 3년)에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가 제작되었다.

1380년(우왕 6년)에는 금강 입구에 침구해 온 왜구 5백여 척의 대선단에 화포 공격을 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 퇴로를 차단하였고 내륙으로 침투한 외구들도 이성계(李成桂) 등의 토벌군이 완전 소탕하였다.

 

이로써 왜구들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는데,

 1389년(창왕 원년)에는 박위(朴?)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최영의 묘
고려의 장수이자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왜구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인 1388년(우왕 14년) 음력 1월에는 토지 겸병으로 악명 높은 권문세가인 이인임 일당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최영(崔瑩)이 우왕과 상의하여 집행하였고, 신흥세력인 이성계 장군이 힘을 더하였다. 이로써 권문세가의 기세가 꺾이고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신흥 사대부 간에는 틈이 있었다.

 

같은 해에 명나라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쌍성총관부 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압적인 통보를 해오자,

 

최영북으로 밀려난 원나라에 명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명나라의 동북 방면 전진기지인 요동에 대한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군사적 난점을 들어 반대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원정군을 이끌고 출병한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면서 지휘권을 장악한 다음 군사를 개경으로 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1388년). 이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기도도 중지되었다.

 

이성계 일파의 집권 후 신흥 사대부들은 권문세가이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 등을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사전(私田)개혁을 추진하였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반발도 적지는 않았다. 폐위된 우왕의 아들 창왕이 이성계 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나마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만큼 구세력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계 일파가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자(1389), 정치는 완전히 신흥 사대부가 주도하였다.

 

또한 사전개혁도 본격화되었다.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이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 완료되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이 모두 불태워졌다. 사전 개혁으로 국가의 세수(稅收) 대상 토지가 확보됨으로써 국가재정이 확충되고, 관료들에게도 경제적 급부로서 과전(科田)이 지급될 수 있었다.

 

공양왕 3년 전시과제도와 마찬가지로 수조지인 과전을 분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시과제도 그대로 복구된 것은 아니었으니, 과전법의 수조지 분급 대상지역은 경기지역에 한정되도록 축소되었고, 분급대상도 대체로 현직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러한 수조지제도의 대폭적인 축소는 소유권에 의한 토지지배가 확대되고 수조권에 의한 토지지배가 축소·쇠퇴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와 사상 등의 면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개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온건한 개량을 주장하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파를 꺾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국가사회로서는 연속성을 가졌던 것이었으니, 왕조만이 아닌 기존 국가사회 자체가 멸망하여 영토와 국민이 크게 변동하였던 앞 시대의 삼국에서 신라·발해로의 변화나, 남북국 시대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왕조의 변화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왕실과 왕조로서는 종말과 새로운 개창이었으나, 영토와 국민으로서는 연속이었으며, 고려 말 당시 국가체제 안에 포괄된 지배층 내에서의 정권교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권교체의 이면에서는 고려후기 이후 광범한 사회변동 속에서 암중모색되던 개혁이 확고한 방향을 잡고 새로운 체제를 구체화시키는 결실을 보고 있었다.

 

고려 전기-중기에 벽란도개항하여 문호개방 정책을 폈으나, 고려 말기에는 그 의지가 퇴색되어 권문세족의 쇄국주의가 두드러졌다.

모든 정황에서 볼때 조선 뿐 아니라 고려도 쇄국주의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편집] 정치

광종(光宗)이 죽자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로(崔承老)였던 것이다.

 

최승로의 정치 이념은 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항복할 때 고려의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호족과는 달리 지방에 자기의 근거지를 갖고 있지 않은 학자였다. 이것은 자연히 그의 정치적 견해를 집권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고 유교의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니 그가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時務) 28조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종은 광종의 개혁이 실패한 뒤의 정치적 수습을 이 유학자들의 견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직(鄕職) 개혁을 실시하여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한편 호족들은 되도록 중앙귀족으로 흡수하려고 하였으며, 고전과 유교에 밝은 귀족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치에 반영시키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귀족 정치의 터전이 잡혀가고 있었다.

 

고려는 신라가 귀족인 진골 중심의 정치(성골인 왕족은 수가 적었다 그 증거로는 2명의 여왕이 나왔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이성(異姓) 귀족들에 의해 정치를 해 나갔고, 이 이성 귀족들은 자기의 출신지를 중요시하였다. 즉, 본관(本貫)은 호족의 세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었고,

 

그러므로 문벌(門閥) 또는 가문(家門)이 중요시되었으며, 호적(戶籍)이 평민과 별도로 작성되었다. 호족은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혼인정책(婚姻政策)을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은 가문으로서의 최고 영예일 뿐만 아니라, 정권 장악의 첩경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추구하는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나타났다.

 

안산 김씨(案山金氏)인주 이씨(仁州李氏)는 대표적인 존재였다.

 

안산 김씨는 김은부(金殷傅)가 세 딸을 현종(顯宗)의 비(妃)로 들인 이후 문종(文宗)에 이르는 4대 50여 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차지하였으며,

 

인주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문종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인종 때까지 7대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그 외에도 최충을 대표적 인물로 하는 해주 최씨도 당대의 명문(名門)이었다.

 

이리하여 고려는 정치·사회 면에서 귀족 중심의 체제가 이루어졌다.

수도 개경은 귀족의 중심지로서 또는 전국의 심장부로서 발전하였다.

[편집] 통치 기구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또한 외세의 도움 없이 한민족이 단결하여 세운 최초의 진정한 통일 국가였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태조ㆍ광종은 황제를 칭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의 군주들 또한 스스로를 짐(朕), 수도를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을 폐하(陛下), 차기 보위를 예약한 임금의 장남을 정윤(正胤) 또는 태자(太子), 군주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와 칙(勅)으로 부르는 등 제국의 제도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3세기 원나라의 내정 간섭 이후, 모든 제도가 격하되었다.

 짐(朕)도 고(孤)로, 폐하(陛下)를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도 세자(世子)로 낮아졌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12세기 후반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편집] 중앙 관제

 

고려 행정조직

 

태조 왕건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신라시대의 골품제(骨品制)를 청산하고 왕권(王權)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지고 왕권이 확립된 성종(成宗)에서 문종(文宗)에 이르는 기간에 당(唐)·송(宋)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 완성하였다.

 

 임금의 최고 고문(顧問)으로 삼사(三師)[6]와 삼공(三公)[7]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가 최고의 영예직이요, 실무는 보지 않았다.

 

중앙행정의 최고기관으로는 삼성(三省)[8]·육부가 있었으며, 삼성은 중서(中書)[9], 문하(門下), 상서(尙書)[10]의 세 성(省)이며, 이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문하성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사무, 중서성은 조칙(詔勅)에 관한 사무, 상서성은 실지로 국무(國務)를 맡아보는 집행기관으로 그 밑에 6부가 있었다.

 

문하성의 장관을 시중(侍中)이라 하고 수상(首相)격이었으며,

중서성의 장관은 중서령(中書令)[11],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尙書令)이라 하였다. 이 성의 고관을 재신(宰臣)이라 불렀다.

이 중에서 문하성과 중서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합해서 중서문하성이라 불렀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육부는 이부(吏部)·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形部)·예부(禮部)·공부(工部)였다.

① 이부는 관리의 임면과 상작(賞爵),

② 병부는 무관의 임면, 군무의(軍務)·의장(儀仗), 우역(隅驛),

③ 호부는 호구, 부역, 전량(錢糧),

④ 형부는 법령, 소송, 형옥(形獄),

⑤ 예부는 예의, 제사, 조회(朝會), 교빙(交聘), 학교, 과거,

⑥ 공부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조(營造)를 각각 맡았다.

 

이 밖에 삼성과 거의 같은 자격을 가진 삼사(三司)가 있어 국가재정을 통일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12]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삼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삼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이 두 기관을 양부(兩府)라 한다.

 

특수 기관으로,

국가의 주요한 격식(格式)을 결정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

감찰을 맡은 사헌대(司憲臺), 조명(詔命)을 맡은 한림원,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사관(史觀)[13], 대학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보문각(寶文閣)은 경연과 장서를 맡았고,

어서원(御書院)은 왕실도서관이었고,

비서성(秘書省)[14]은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맡았다.

재주 있는 문신(文臣)을 뽑아 임금을 모시게 한 홍문관(弘文館)[15],

또 조회(朝會)와 의식(儀式)을 맡은 합문(閤門),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은 태상시(太常寺)[16],

감옥을 맡은 대리시(大理寺)[17],

빈객에 대한 연회와 접대를 맡은 예빈시(禮賓寺)[18],

시장을 단속하는 경시서(京市暑),

왕실과 종친의 족보를 맡은 전중성(殿中省),

왕실의 의약과 질병 치료 등을 맡은 태의감(太醫監)[16],

공로(公路)와 역원(驛院)을 맡은 공역서(供驛暑) 등이 있었다.

[편집] 지방 행정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의 행정 구역입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건국 초기에는 미처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칠 수가 없어서 지방행정은 호족(豪族)들에게 방임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뒤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두어 여기에 중앙의 관원을 파견한 것이 지방관제의 시초였다.

 

그러다가 차츰 왕권의 확립을 보게 된 995년(성종 14)에는 경기 이외의 전국을 편의상 10도(道)로 나누는 동시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단련사(團練使)·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 등 외관을 설치하였지만 10도는 이내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단련사·자사·방어사 등의 외관직도 곧 폐지되었다.

 

결국 전국은 5도 양계와 경기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편집] 관계

고려의 관계(官階)는 종1품(從一品)에서 종9품(從九品)까지 29단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정4품상·정4품하·종9품상·종9품하가 있어 29관계로 된 것이다.

이 밖에 왕의 최고 고문격으로 삼사(三師)·삼공(三公)의 직이 있었는데, 문종 때 이들의 관계는 정1품이었다.

[편집] 경제

고려의 화폐 
고려의 토지제도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안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개경의 외항벽란도에는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이 와서 활발하게 무역하여 인삼, 농기구,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유리 공예품, 서적, 비단 등을 수입했다.

[편집] 대송 무역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나라와 밀접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민족을 견제했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귀족들의 애호품인 능견(綾絹 : 비단)·자기·약재·악기·향료·문방구(종이·붓·먹)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자기·서적은 각각 고려의 청자와 목판인쇄술(木版印刷術)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밖에 다른 물품 수입은 귀족의 사치풍조를 더욱 조장시켰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은·구리·인삼·송자(松子 : 잣)·모피 등의 원산품과 능라(綾羅 : 비단)·저마포·백지(닥나무 종이)·금은동기·부채·금은장도, 그밖에 종이·붓·먹 등 가공품이 많았다.

[편집] 사회

고려사회는 신분사회로서 중인, 평민, 천민, 양반 관료 등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제도를 두어 영국귀족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다.

 

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 소, 부곡민, 화척, 재인 등이 있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편집] 고려의 수취체제

전시과(田柴科)로 대표되는 토지제도 밑에 고려의 농민은 공전 또는 사전을 경작하고 국가 또는 개인 지주에 대하여 조세(租稅)·공부(貢賦)·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졌다. 전조(田租)는 토지 수확물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며, 그 양은 공전과 사전에 차이가 있었다. 공전은 1결마다 수확물의 ¼에 해당하는 2석 정도를 바쳤으며, 사전인 경우에는 그보다 배가되는 수확물의 ½을 바치게 규정되었다. 또한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조세율에 차등이 있었으며, 흉작일 경우에는 조세를 감면하도록 하였다. 고려에서는 개간을 장려하여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농민에게는 1~2년 동안 전조를 면제해 주었다.

 

전조는 수조자(收租者)가 국가에 바치는 세미(稅米)와 아울러 각 지방의 조창(漕倉)에 수집되어 육로 혹은 해로를 통하여 중앙에 수송되었다. 전조 외에 공물(貢物)이 있어서 상공(常貢, 歲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었다. 상공은 쌀·포(布)·면사(綿絲)·유밀(油蜜) 등을 바치게 했으며, 별공은 그 지방 특산물을 따로 바치게 한 것이다. 농민에게 가장 부담이 큰 역(役)은 군역(軍役)과 요역(?役)으로 구별되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남(丁男)이면 누구나 이를 져야 했다. 요역은 각종 토목공사(土木工事)에 동원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군역은 장기간에 걸쳐 복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반 농민은 대개 20세가 되면 군정(軍丁)이 되어 대체로 노동 부대 성격을 띤 지방군(地方軍)에 편입되었고, 여정(餘丁)은 군정을 경제적으로 돕게 되었다. 이러한 수취 체제 중 농민은 특히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유민(流民)이 되거나 호족에 의지하여 전호(佃戶)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편집] 문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 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 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관촉사 미륵보살 입상

 

고려는 불교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고려 후기의 문화는 조계종의 융성과 주자학의 전래로 특징지어진다. 불교에 있어서의 조계종은 백운(白雲)·태고(太古)·나옹(懶翁)·무학(無學) 등의 활약으로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으나 새로 일어나는 주자학의 발전으로 불교의 정신계에 대한 지도력은 상실되어 갔다.

 

주자학은 충렬왕 이후 유교의 진흥으로 중국에서 전래되어 점차 발달, 불교 배척의 기운을 조성했다. 또한 사학(史學)이 발달하여 많은 사서(史書)가 편찬되었으며, 한편 새로운 형식의 시가인 경기체가(景幾體歌)와 장가(長歌)가 나타났다. 미술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現存)하는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적잖은 건축물들이 당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외에 석탑(石塔)·석부도(石浮屠) 등도 당시의 예술을 말해준다. 또 회화도 점점 발달하였으며, 서도에는 우아한 송설체(宋雪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문물 중 무엇보다 특기할 것으로는 인쇄술의 발달과 목면(木棉)의 전래 및 화약의 제조를 들 수 있다.

[편집] 풍속

백관의 관복은 광종 때 송나라 제도를 따랐다가 몽골이 들어온 후로는 그 제도로 바꾸었고, 말기에 원과 명의 세력이 변동됨에 따라 때로는 몽골복, 때로는 명제(明制)를 따랐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온 후로 명제가 확정되어 근세에 이르렀다.

 

일반 서민은 대개 흰 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紅)·황(黃)색 등 색옷을 입기도 하였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으며 귀족의 부인은 너울을 썼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그릇과 정밀한 도자기를 썼고, 서민은 조제(粗製)도자기·토기·구리그릇·놋그릇을 썼다.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에는 대개 100일 동안 복상하였다. 삼년 동안 복상하는 습관은 말기의 정몽주 등 유학자들에 비롯된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성행하였고, 산신(山神)을 모신 사당과 서낭당 등이 있었으며 기타 귀신도 많이 모셨다.

 

설·정월보름·한식·상사(上巳: 음력 3월 3일)·단오·추석·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동지·팔관회(八關會)가 일반적인 명절이요, 이 밖에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입춘·2월 연등·3월 삼짇날·사월초파일·유두(음력 6월 15일)·우란분회(음력 7월 15일)·제석(際夕) 등이 있다.

 

설에는 차례를 지내고 관청에서도 전후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보름에는 다리 밟기, 입춘에는 첩자(帖子)를 써 붙였고, 한식에는 성묘(省墓)와 그네, 삼짇날에는 들놀이에 쑥떡을 먹었고, 사월초파일에는 집집이 연등(燃燈), 단오에는 공치기·석전·그네·성묘, 유두에는 머리를 감아 액을 씻었고, 우란분회에는 절에 가서 공양했고, 추석과 중양절에도 성묘와 놀이, 동지에는 팥죽을 먹었다. 이 가운데서 국가적 경축일은 원정(元正), 즉 설날을 비롯한 동지·팔관·성상절일(聖上節日 : 임금의 생일)이었다.

 

놀이와 오락으로는 공치기·씨름·제기차기·석전(石戰)·바둑·장기··연날리기·투호·꼭두각시놀이·광대놀이 등이 있었다.

[편집] 군사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나누어졌다.

중앙군은 2군과 6위로, 지방군은 양계의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군현군으로 이루어졌다.

 

무관제도로는 2군과 6위를 두었는데,

2군은 응양군·용호군,

6위는 좌우위·신호위·흥위위·금오위·천우위·감문위였다.

각 군과 위(衛) 아래에는 영(領 : 부대)이 소속되었다.

영은 1천 명의 정규군과 6백 명의 망군정인(望軍丁人 : 예비병)으로 구성되었고 도합 45영이 있었다.  정규군 4만5천명

 

군과 위에는 각각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 1명씩 있었고, 지휘하는 영의 수에 따라 영마다 장군 1명, 중랑장(中郞將) 2명이 있었고, 그 아래 낭장(?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다.

 

2군 6위의 상장군 8명과 대장군 8명으로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중방은 최고급 장성들의 회의기관이었다. 하급 장교들도 회의기관이 있었으니 이를 교위방(校尉房)이라 하였다.

전국의 모든 군대는 2군 6위에 소속케 하였다.

 

이 밖에 예비군단으로 광군(光軍)별무반(別武班)이 있었다.

광군은 정종 때에 요나라에 대비하기 위해서 30만을 뽑은 예비군단으로 이를 통할하는 기관을 광군사(光軍司)라 하였다.

별무반은 숙종 때 윤관(尹瓘)의 건의에 따라 여진(女眞)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병을 중심으로 만든 예비군단이다. 전국의 말을 가진 자는 모두 여기 편입시켜 신기(神騎)라 했고, 20세 이상의 남자로 과거를 보지 않은 자는 모두 신보(神步)로 편입하였으며, 승려들로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였다. 즉 별무반은 신기와 신보로 편성되고 방계로 항마군이 여기 속하였다.

 

별무반은 정규군과 같이 4시를 통해서 훈련을 받았다.

전시에 출정하는 군대는 오군(五軍 : 경우에 따라 3군이 되는 수도 있었다)으로 편성하였는데,

좌·우·중·전·후군(左·右·中·前·後軍)이 그것이다.

오군이 출정할 때에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또는 行營兵馬使, 국초에 는 大番兵馬使)가 총지휘했는데 이들은 중신(重臣)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편집] 과학

고려의 과학기술은 삼국시대의 과학기술을 계승하고 송(宋)·원(元)시대의 중국 과학기술을 이어받아, 귀족문화 속에서 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운데 발전하였다. 고려의 기술적 발전을 대표하는 인쇄술과 고려청자는 그러한 귀족문화의 소산이었다.

 

천문학에 있어서는 천체관측이 특히 발달하였으며, 그 관측기록은 독자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또한 고려 말에는 화약을 제조할 줄 알았으며, 조선기술(造船技術)은 특히 병선(兵船)에서 뛰어났다.

 

고려의 지리적 지식은 종래의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동양 중세의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이른바 5천축국(五天竺國)에 걸치는 것이었으며, 아라비아와 중동지역의 지리적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의학은 958년에 시작된 과거제(科擧制)에 의학부문이 포함되고, 중국의 의서(醫書)와 고려인에 의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의 의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고려 과학의 학문적인 면에서는 기술분야에서처럼 특이한 점이 뚜렷하지 않다. 고려인은 이론적인 새로운 발전은 없었지만,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서는 꾸준히 업적을 쌓아 나갔다.[19]

[편집] 기타

고려(高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는 의견이 있다.[20]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21][22][23][24]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려라 나타나고[25]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26]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27][28][29]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편집] 같이 보기

한국의 역사
이전 시대 고려
918년 ~ 1392년
다음 시대
후삼국 시대 조선

 

역대 국왕 목록

대수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추존)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 (추존)
(추존) 의조(懿祖) 경강대왕(景康大王) 작제건(作帝建) (추존)
(추존) 세조(世祖) 위무대왕(威武大王) 왕륭(王隆) (추존)
1 태조(太祖)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왕건(王建) 918년~943년
2 혜종(惠宗)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왕무(王武) 943년~945년
3 정종(定宗)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왕요(王堯) 945년~949년
4 광종(光宗)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왕소(王昭) 949년~975년
5 경종(景宗)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왕주(王胄) 975년~981년
6 성종(成宗) 강위장헌광효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文懿大王) 왕치(王治) 981년~997년
7 목종(穆宗) 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왕송(王訟) 997년~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폐위됨
8 현종(顯宗)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왕순(王詢) 1009년~1031년
9 덕종(德宗) 선효강명광장경강대왕(宣孝康明廣章敬康大王) 왕흠(王欽) 1031년~1034년
10 정종(靖宗) 홍효안의문경용혜대왕(弘孝安毅文敬容惠大王) 왕형(王亨) 1034년~1046년
11 문종(文宗)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왕휘(王徽) 1046년~1083년
12 순종(順宗) 영명정헌선혜대왕(英明靖憲宣惠大王) 왕훈(王勳) 1083년
13 선종(宣宗) 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왕운(王運) 1083년~1094년
14 헌종(獻宗) 공상정비회효대왕(恭?定比懷孝大王) 왕욱(王昱) 1094년~1095년
15 숙종(肅宗) 문혜강정명효대왕(文惠康正明孝大王) 왕옹(王?) 1095년~1105년
16 예종(睿宗)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 왕우(王?) 1105년~1122년
17 인종(仁宗)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 왕구(王構) 1122년~1146년
18 의종(毅宗)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왕현(王晛) 1146년~1170년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됨
19 명종(明宗)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왕호(王晧) 1170년~1197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0 신종(神宗)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왕탁(王晫) 1197년~1204년
21 희종(熙宗) 인목성효대왕(仁穆誠孝大王) 왕영(王?) 1204년~1211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2 강종(康宗) 명헌원효대왕(明憲元孝大王) 왕오(王?) 1211년~1213년
23 고종(高宗)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1] 왕철(王?) 1213년~1259년

원에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림

(최충헌-최우-최의)

24 원종(元宗) 충경순효대왕(忠敬順孝大王) 왕전(王?) 1259년~1269년
개경천도 복위 1270년~1274년

1259년 김준 집권

 몽골에 실질적 항복

1268-1270년 임연,임유무 집권=>원종 복위

원에서 충경(忠敬)이란 시호를 내림

(임시) - 영종대왕(英宗大王) 왕창(王?) 1269년~1269년 정식적인 국왕이 아니어서 묘호를 받지 않았다.
25 - 충렬경효대왕(忠烈景孝大王)[2] 왕거(王?) 1274년~1298년[3]
복위1298년~1308년
원에서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림
26 -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 왕장(王璋) 1298년
복위1308년~1313년
원에서 충선(忠宣)이란 시호를 내림
27 -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왕만(王卍) 1313년~1330년
복위1332년~1339년
원에서 충숙(忠肅) 시호를 내림
28 -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왕정(王禎) 1330년~1332년
복위1339년~1344년
원에서 충혜(忠惠)이란 시호를 내림
29 - 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 왕흔(王昕) 1344년 ~ 1348년 원에서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림
30 - 충정대왕(忠定大王)[4] 왕저(王?) 1348년~1351년 원에서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내림
31 -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왕전(王?) 1351년~1374년 에서 공민(恭愍)이란 시호를 내림
32 - - 왕우(王禑)[5] 1374년~1388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33 - - 왕창(王昌)[6] 1388년~1389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34 - 공양대왕(恭讓大王) 왕요(王瑤) 1389년~1392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편집] 추존왕 목록

태조와 신정왕태후의 아들 왕욱(王旭)은 아들 성종(成宗)에 의해 대종(戴宗)으로 추존되었다. 태조와 신성왕후의 아들 왕욱(王郁)은 아들 현종(顯宗)에 의해 안종(安宗)으로 추존되었다. 영종(英宗)은 고종(高宗)의 아들이며 원종(元宗)의 동생으로 임연(林衍)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고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몽고에 의해 다시 폐위되었다. 정식 왕으로는 인정되지 않으며 안경공(安慶公)으로 불린다.

 

대수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추존) 대종(戴宗) 예성선경대왕(睿聖宣慶大王) 왕욱(王旭) (추존) 성종의 생부, 현종의 외조부.
(추존) 안종(安宗) 헌경효의대왕 (安宗憲景孝懿大王) 왕욱(王郁) (추존) 현종의 생부.
(추존)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추존) 묘호 없음.
(추존) 정간왕(靖簡王) 왕기(王基) (추존) 묘호 없음.
(추존) 영종왕(英宗王)[7] 왕창(王?) (추존) 묘호 없음, 안경공(安慶公)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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