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지금 절은 오래지 않지만, 연원은 오래고 전해오는 다양한 전설도 오래 전 이야기다. 계곡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모습은 압권이다. 물이 이렇게 깊고 맑고 구비구비 다른 풍광을 보여주는 곳은 더는 없을 거 같다. 거기다 구비구비 다 전설이 배여 있다. 역사와 전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찰 청평사, 우리 볼것 첫번째는 역시 불교 사찰이다.
1. 사찰대강
명칭 : 청평사
위치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五峰山)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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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봉산 청평사五峰山 淸平寺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973년(광종 24)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에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庵) · 양신암(養神庵) · 칠성암(七星庵) · 등운암(騰雲庵) · 복희암(福禧庵) · 지장암(地藏庵) · 식암(息庵) · 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 · 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하였고, 대부분 건물을 신축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覺禪)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6 · 25전쟁 때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이 소실되었다.
1977년 공철(空徹)이 극락보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고, 1979년 향봉(香峯)이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 서호(西昊)가 요사와 청평루 · 서향원(瑞香院)을, 1988년 석진(石眞)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청평사 회전문(淸平寺回轉門)과 극락보전(極樂寶殿), 적멸보궁 · 청평루 · 서향원 · 해탈문 · 불각(佛閣) 1동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요사채가 있다.
사지(寺址)는 1984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불전 · 회랑 · 문 등의 초석을 통하여 전성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진락공부도(眞樂公浮屠) · 환적당부도(幻寂堂浮屠) 등이 있다.
이 중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2층 옥개석만 남아 있고, 3층 이상은 없어졌으며, 2층 옥개 위에 잡석들을 올려 놓았다. 이 탑은 상삿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순제[元順帝:산동 성주라는 설도 있음]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행한 뒤, 상삿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원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이 절에 있는 고려선원(명승, 2010년 지정)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 조사단의 지표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와 거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 정원 조성용 암석 및 석축을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2㎞ 떨어진 상류에서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발견되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이 확인되었다.
또,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짜임새 있게 가꾸어졌음이 밝혀졌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이자현 소개
자현(資賢)
진락공(眞樂公)
이자현은 문벌 인천 이씨 출신으로, 이자연의 넷째 아들인 이의(李顗)의 장남이다. 선종비 사숙태후, 외척으로 이름을 날린 이자의, 이자겸과는 사촌 관계다. 최충의 학당에서 수학해 문종 37년(1083) 과거에 급제한다. 이자현은 한림원에 근무하던 어린 시절부터 은거하는 삶을 동경해, 한림원 술사 은원충을 따라 나중에 은거할만한 명당을 몰래 찾아다닌다. 27세가 되던 해인 선종 4년(1087) 관직이 대악서령(大樂署令)에 오르는데, 아내와의 사별을 계기로 개경을 떠난다. 이자현은 도성문을 나서며 다시는 개경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춘주 청평산에 향한다.
청평산에는 이자현의 부친 이의가 지었던 보현원(普賢院)이 있었는데, 이자현은 그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거처로 삼는다. 입고 먹기를 검소하게 하면서 참선 수행을 하는데, 겨우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식암(息庵)을 짓고 며칠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선종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에게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함께 하루종일 참선하기도 했다. 본인은 승려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국사가 되는 혜조, 대감, 탄연 등이 이자현의 가르침을 받았고, 의천의 제자 혜소와도 교류했다.
예종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이자현을 개경으로 부르나, 이자현은 개경을 떠나며 한 맹세를 어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예종이 남경에 행차해 직접 지은 시를 이자현의 동생 자덕을 통해 이자현에게 전달하니, 그제서야 부름에 응한다. 예종은 "짐이 이 노인의 도와 덕을 흠모한 지 오래이니, 신하의 예로 뵙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전각 위에서 절하도록 배려하고 담소를 나눈다. 이자현은 가르침을 바라는 예종에게 "욕심이 적은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하며 『심요(心要)』를 바친다. 예종은 이자현이 삼각산 청량사에 머물도록 했으며, 돌아가는 이자현에게 차, 향, 법복 등 선물을 내린다.
인종도 이자현을 주목해 병에 걸린 이자현에게 내의를 보내 약을 짓게 하고 선물을 보낸다. 65세가 되던 인종 3년(1125)에 죽고 진락 시호를 하사받는다. 사후 인종 8년(1130) 혜소가 짓고 대감국사가 새긴 진락공문수원기가 청평산에 세워진다. (나무 위키 전재)
공주 전설 소개
구비구비 맑은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는 진입로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공주탕
거북바위
구송폭포
이자현 부도
영지명문바위
영지
시장경비 흔적 비석 좌대
진락공중수 청평산 문수원기
회전문
대웅전
관음전
관음전 내부
나한전
나한전
공주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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