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리
◎ 위치 및 환경
우리 마을은 군청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4km의 거리에 위치한 해변마을이다.
마을의 주산인 용두산(龍頭山)이 북서풍을 막아주고 동남으로 앞산인 채산(菜山)이 막아주어 풍해가 심하지 않으며, 한재골에서 풍부한 물이 흘러내려 농업용수가 풍족하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장산리와 덕산리가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신상리, 신덕리와 경계를 이룬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해안도로가 개설되어 아름다운 해변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 풍수지리적 유래
용암산(龍岩山)의 동쪽에 펼쳐있는 대리(大里)마을은 풍수설로 보면 용의 입에 해당되는 곳으로 龍이 여의주를 맞이하려는 형국으로 본다. 그러므로 주민들의 지속적인 꿈과 희망을 위하여 여의주를 입술 앞에 놓고 때를 기다리는 형상 그대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금세에 이르러 여의주가 용 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불원간 여의주를 얻는 셈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 고장에 큰 경사가 있을지 희망을 가져 볼 만 하다.
◎ 마을의 연혁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1,300년께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마을 주변에 산재한 묘비가 그때 세워진 것이 많고 높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확인되는데 관속들의 유배지였거나 세(勢)가 불리했던 종족들의 은거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씨가 처음 입촌했으나 쇄하고 정씨가 들어와 설기했다고 전해온다.
• 1,400년경부터 약 200년간: 해안 도서지방과 장흥 일대에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거주민 대부분이 화순군, 보성군 일대로 피난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였다.
• 1759~1765년(6년간): 대흥방에 속하였는데 당시의 마을 이름은 내덕도 대평리임.
• 1766~1789년(23년간): 제도면. 당시 내덕도 동쪽은 대평리(大坪里), 서쪽은 덕산리(德山里)로 불렸으며 치소가 있었던 자리이다.
• 1790~1895년: 제도면 도청리에서 내덕면 도청리로 개칭.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덕면과 대흥면이 통합되어 내덕도를 덕도로 개칭하고, 마을 이름을 大里(큰 마을)라 불렀다.
• 1986년 4월 1일: 당시의 대덕읍에서 회진면으로 분면하여 오늘에 이른다.
◎세대수, 인구, 마을임원
대리마을의 세대수 및 인구는 다음과 같다.
연도별 인구 및 세대수
연도별 | 세대수 | 인 구 (단위; 명) | 이장 / 연락처 |
남자 | 여자 | 계 |
2010.12.31 | 129 | 149 | 171 | 320 | 김백운 / 010-5399-7787 |
2011.12.31 | 128 | 142 | 162 | 304 | |
2012.12.31 | 136 | 152 | 166 | 318 | |
2013.12.31 | | | | | |
2014.12.31 | | | | | |
2015.12.31 | | | | | |
2016.12.31 | | | | | |
2017.12.31 | | | | | |
2018.12.31 | | | | | |
2019.12.31 | | | | | |
<자료제공: 회진면사무소>
세 대 수 | 129 세대 |
인 구 | 남자; 149 명. 여자; 171명 (합계) 320 명 |
마을임원 | 이장: 김백운(010-5399-7787). 새마을지도자; (남)김길봉. (여)박종단 |
(2010.12.31.현재)
◎ 마을의 지명 설명
• 너멍골: 큰동네 서남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
• 널바우: 큰동네 남쪽에 있는 너른 바위.
• 높은 바위: 양골 동쪽 바닷가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
• 도청: 대리마을의 두 번째 이름.
• 뒷등: 큰동네 뒤에 있는 등성이.
• 마당바우: 너구리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 마당처럼 평평함.
• 밭작은메: 작은메 바깥쪽에 있는 산.
• 불등: 큰동네 남쪽에 있는 등성이처럼 토사가 쌓여있는 곳.
• 산골: 큰동네 동쪽 골짜기에 있는 동네.
• 안골: 큰동네 동뿍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 있었음.
• 앞개: 큰동네 앞에 있던 개(현재는 농경지임).
• 양골: 질맛금 북쪽에 있는 골짜기. 두 골이 나란히 있음.
• 연대봉: 큰동네 앞에 있는 산. 봉수대가 있었다 함.
• 용두정(龍頭亭): 용두산 정상에 세운 정각. 옛날에는 그곳에 요망대(瞭望臺)가 있 었다.
• 작은메: 큰동네 남쪽 작은산.
• 제일여 끼: 제일여 옆에 있는 산부리.
• 죽천평/ 대냇들: 마을 앞 들의 옛 이름.
• 지추바우: 숫골 아래에 있는 바위. 지추(지치)가 났었음.
• 질마재: 작은메 동남쪽에서 하나지로 넘어가는 재.
• 큰골: 큰동네 서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 큰골재: 큰골 위에 있는 고개. 대리에서 장산리로 넘어감.
• 대평리: 대리마을의 첫 번째 이름.
• 도청밑에: 마을의 두 번째 이름이던 도청리의 하단.
• 큰동네: 대리마을의 중앙부(설기터)
• 잔등: 마을 중앙부의 남쪽 등성이.
• 안자근메: 절터골 토사로 형성된 방풍림이 있던 낙림. 불등이라고도 함.
• 윤대미: 옛날 바닷물이 동서로 넘치던 곳.
• 하나지: 마을 남쪽 끝에 있던 외진 나지(羅地). 정남진에 해당한 곳.
• 앞뻘: 마을 앞에 펼쳐있는 바다. 간만의 차가 큰 개펄.
• 질마금: 마을 남동쪽에 있는 바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
(말 1필에 실을 만한 금이 있다는 곳으로 전해온다)
• 웃여거리: 질마금의 북쪽 끝에 여가 있는 곳.
• 아릿구석지: 질마금의 남쪽 끝에 있는 구석진 곳.
<대리앞산(내산)>
• 굴앞: 하나지 동남쪽에 있는 석굴 앞 주변.
• 숨은여: 사리 때 간조 시 나타난 숨어있는 바위. 지금은 선착장으로 연결되었다.
• 선창: 하나지에 있는 선착장.
• 조금여: 조금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여. 도둑골 앞에 있다.
• 모래등: 앞뻘에 모래가 쌓인 곳. 바지락 종패로 유명하다.
• 수문통거리: 마을 남쪽 바다로 진입하는 수문이 있는 삼거리.
• 도둑골: 옛날 도둑떼가 소를 훔쳐 도살하던 곳. 후미진 바닷가에 있다.
• 팔둑까끔: 팔뚝처럼 생겼다는 산. 문필봉이 있는 산.
• 질마금몰랭이: 마을에서 질마금으로 넘어가는 고개.
• 양골: 마을 동편 바닷가에 있는 두 개의 골짜기가 나란히 있는 곳.
• 돌장기미: 옛날 돌을 쌓아 고기를 잡았다는 동편 바닷가.
• 노랫골: 동편 바닷가 후미진 곳. 목동들이 마음 놓고 노래 부르던 곳.
• 제일여: 마을 경계선에 길게 숨어있는 바위.
• 웃너바구: 마을 경계에 넓게 깔린 바위. 마을 토지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
• 안여: 질마포 북쪽 끝에 길게 숨어 있는 바위(임초)
• 공동지: 공동으로 이용하는 공동묘지. 마을 동편에 있음.
• 밧골: 마을 앞에 있는 오목한 곳.
• 코팽끄터리: 마을 산 1번지 꼭지점. 코끝처럼 생겼음. 전어바위가 있다.
• 솔대등: 옛날 솟대를 세웠던 등성이. 산 2,3번지.
• 전어바구: 옛날 전어를 잡았다는 곳에 있는 바위.
• 형제바구: 마을 앞 하천변에 있는 두 개의 바위. 신령께서 주민들이 형제처럼 의 좋게 살라고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 숫골번덕지: 신선바위가 있어 풍광이 좋은 옛날의 공원.
• 숫골: 옛날에 숯을 구운 골짜기. 마을 서편에 있다.
• 신선바구: 숫골번덕지 하단에 있는 신선같이 생긴 바위.
• 대통바구: 신선바위 아래에 있는 신선의 장죽처럼 생긴 바위(담배대통 같은 바위)
• 미끌바구: 뒷산 골짜기에 있으며 용이 등천하려다 미끌어졌다는 바위다.
• 절터: 뒷산중턱에 있는 절터. 지금은 빈터와 우물만 남았다.
• 너구리바구: 절터 남쪽에 있으며 굴이 숭숭 뚤려 너구리 대가족이 살았다.
• 경선바구: 착함을 깨다르게 한다는 바위로 학교 뒤에 있다.
• 개목: 눈을 뜨게 한다는 곳으로 학교가 자리한 곳.
• 불당골: 옛날 불당(사찰)이 있던 곳으로 학교 뒤의 골짜기.
• 율목동: 밤나무가 많던 곳.
• 말바구: 말이 뛰는 모습의 바위로 뒷산 중턱에 있다.
• 북바구: 비가 오면 북소리가 난다는 바위.
• 호두용골: 산머리는 호랑이 같고 등성이는 용과 같다는 산.
• 큰 골: 산등과 골짜기가 크게 생긴 산과 계곡.
• 무섬등: 마을 입구에 옛 무덤이 있는 무섭다는 등성이.
• 대냇들: 마을 앞들의 옛 이름. 죽천평이라고도 한다.
• 한둑: 옛날 마을 앞들 중앙으로 구불구불 흘러 내린 하천 뚝으로 용의 혀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했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흔적도 없어졌다.
• 당산제단: 사장나무 아래에 있으며 매년 정월 열나흣날 밤에 당제를 모신다. 그 옆으로 당산할매라는 바위가 지긋이 앉아 있는 모습이 기이하다.
• 송문: 마을 남쪽 내소산 중간 지점에 있는 300여년 전에 심어진 나무이며 옛날에 는 그 송문을 통해야 마을에 진입할 수 있었다(불행히도 한주는 고사하였다)
• 샘(井): 산골샘, 큰동네샘, 너믄골샘, 자근매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쇄되고 상수도를 사용함.
• 도로: 아랫길, 웃길, 잔등길, 큰골길, 잿몰길, 중천길, 솔대건너길, 넘은골길, 개목 길, 암매길, 밧골길, 한제길, 노두, 아릿목길, 넓바구길, 하나지길, 학교길, 무섬 등길, 큰재길 등이 있다.
• 들독: 힘을 겨루는 힘자랑 운동기구를 들독이라 한다.
• 강도령묘끝: 돌장기미와 노랫골 사이에 뻗어있는 산 끝에 강도령의 묘가 있다.
□강도령묘
1708년경 이조 중엽 중국 청나라와 해상무역이 한창일 때 득량만을 무대로 장사하던 돛단배가 풍랑에 휩싸여 침몰하여 거기에 승선했던 사람의 시체 한 구가 이곳 바닷가에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어민들이 시신을 뭍으로 옮기고 그 신분을 확인한 바 강씨 성을 가진 도령으로 판명되어 돌장기미와 노랫골 사이에 뻗어있는 산 끝에 묘를 모시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을 항해하던 선박은 강도령묘끝을 향해 반드시 고사를 지내야 했다. 고사를 지낸 배들은 1년 내내 무사하여 사업에 큰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지나면 풍랑으로 실수하거나 황구렁이의 침범을 당하여 곤욕을 치루었다 한다.
이 구렁이는 강도령묘 앞 바위틈에 숫놈이 살았고, 득량만 건너편 완도군 금당도 대팽이 끝에 암놈이 살아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바람이 일면 숫놈 구렁이가 금당도를 향하여 물결을 헤치고 건너가는 모습을 광복후까지 이 지역 주민들은 목격했다 한다. 그러나 6.25동란 이후 구렁이 왕래도 찾아볼 수 없고 지나는 배도 고사지내는 일이 없어져 해상사고도 때때로 있었다 한다.
그러다 30년 전 강도령묘산끝 주변에 해안경비초소가 자리 잡자 초소장으로 부임한 목포사람 조지환 경장의 꿈에 강도령이 나타나 도와달라고 애원하여 옛 묘 등을 성토하였고, 이리하자 대원들의 사기가 좋아져 지역주민들의 협력으로 묘를 다시 더 크게 성봉하고 비도 세웠다.
그리고 강도령의 한을 알고 풀어주기 위해서 관산읍 삼산리 백상철씨가 음력 4월 5일을 택하여 산제를 시작으로 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 제사답 600평을 마련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구비전승)
□피바위 전설
옛날에 대리마을 산골똠에 박장사 형제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이 장사 형제는 육척 장신에다 형언할 수 없이 힘이 셌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해적 7인이 이 마을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자 장사 형제는 그들이 타고온 배를 육지로 끌어다 놓자 해적들이 섬을 떠날 수 없을 뿐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박장사 형제에게 백배사죄하고 섬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에 심술궂은 노승이 나타나 많은 공양을 요구하자 주민들이 노승에게 콩태형벌을 가하자 살려달라고 빌면서 이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노승이 마을을 떠나면서 장사 형제의 선산을 이곳 백호등으로 모신다면 계속 장사가 출생하고 더 잘 산다고 하면서 1km 전방에 있는 큰 바위를 파괴하면 더욱 좋다고 하였다. 그 말을 믿은 장사 형제는 즉시 그 바위를 부셔버리자 그 바위에서 붉은 피가 흘러 피로 물드리니 세상 사람들이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그후 박장사가 죽어서 그 곳에 안장되었는데 박장사 가정은 점차 망하였고 그 자손들은 타지로 이사하여 산골마을 백호등에는 박장사 묘만 남아 있다. 죽도의 중간지점 바닷가에 부서진 붉은 돌만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연륙공사로 깊이 매몰되고 말았다. (구비전승)
◎ 마을의 문화유적
□옛터
• 암자(뒷산 중턱): 절터와 우물 현존
• 불당(뒷산 하단): 소멸
• 신선암(神仙菴)터: 대리 숫골 서남쪽
□현존하는 마을 제사
제사종류 | 장 소 | 제사대상 | 제사 날짜 | 제관선출법 | 경비부담 |
당산제 | 마을사장 | 당산할매 | 정월보름 | 동님 주관 | 마을 자산 |
갯 제 | 질 마 포 | 진 서 방 | 정월보름 | 어촌계장주관 | 마을자산 |
기우제 | 용바위 | 용암산신 | 한발 때 | 마을에서 선출 | 지역민부담 |
□유물 발굴지
<TD style="BOR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