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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하회마을과 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낙동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부용대(芙蓉臺)에 오르면 西厓 柳成龍선생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거처했던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습니다. 선생은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와 전란을 되돌아보며 임진왜란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을 집필, 몸소 체험한 역사의 귀중한 대기록을 남긴 곳입니다.
선생이 저술활동을 폈던 곳으로 보이는 玉淵精舍 본채 대청마루에는 ‘光風霽月’이라는 글귀가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교수들이 2008년 새해벽두 선정한 희망의 四字成語가 바로 光風霽月(광풍제월). 지난해 玉淵精舍를 둘러보며 이 四字成語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2008년 희망의 메시지로 되살아나는 듯 합니다.
‘광풍(光風)’은 ‘비가 개인 뒤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말하며 ‘제월(霽月)’은 ‘구름에 가려 있다가 구름이 걷힌 뒤 달빛이 더욱 맑다’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한 말인데 바로 그 사람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 周敦頤(주돈이, 1017~1073).
宋代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이 중국 송학(宋學)의 개조(開祖)이자 성리학의 세계를 처음으로 연 주돈이의 인품과 사상을 존경하여 표현한 다음의 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요.
“그의 인품이 심히 높고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구나
其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애시당초 광풍이란 말은 중국 초나라의 辭 즉 楚辭(초사)에서 전해내려 온 말로 “해가 떠오르자 바람이 불어서 풀과 나무들이 광색(光色)이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아침 해를 받아 온갖 식물들이 맑고 고운 생기를 띄고 있는 모양을 표현한 것. ‘제월(霽月)’이란 말은, 비가 그치고서 나온 달을 뜻하므로, 밤에 비가 그치고 난 뒤에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정말로 맑고 깨끗한,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 있던 광풍루(光風樓)라는 누각에 다음의 글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느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공경과 방종, 바른 것과 어긋나는 것의 분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도(道)의 본원(本原)에 통달하는 공부에 종사해서 가슴속이 쇄락하여 털끝만한 인욕(人欲)의 속박도 없이 태극(太極)을 마음에 간직한 뒤에야 기대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그의 두 아들에게 주는 편지(示二子家誡)에도 광풍제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아 털끝만큼도 가려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나온다'
달성군 현풍면 池洞 한훤당 古宅 光霽軒(광제헌), 담양 소쇄원(瀟灑園)의 광풍각, 제월당을 비롯해 제주 오현단 경내의 광풍대 등, 정원의 정자 이름, 雅號, 주련(柱聯) 등에서도 광풍(光風)과 제월(霽月)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國譯 경현록(景賢錄)에는 光風霽月(광풍제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金宏弼(김굉필 1454~1504)이 佔畢齋 金宗直(점필재 김종직)선생에게 나아가서 배우기를 청하니, 선생은 ‘小學’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光風(광풍) 霽月(제월)이 모두 이 속에 있다.”하니, 김굉필이 드디어 그 말을 가슴 속에 간직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김굉필은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小學’을 다시 살폈습니다.
경현록에는 ‘소학을 읽고(讀小學)’라는 제목의 김굉필의 七言絶句 詩가 있습니다.
業文猶未諳天機(업문유미암천기)
글공부를 하여도 천기를 모를러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에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 다하련다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잡달게 어찌 잘 살기를 부러워하랴
成均館 사이트에는 우리나라에서 『小學』이 중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교 윤리관을 체득하게 하기 위하여 아동의 수신서로서 장려되어, 사학(四學)·향교·서원·서당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는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권근(權近)은 『小學』의 통달을 강조하면서 먼저 『小學』을 읽은 다음에 다른 공부를 할 것이며, 성균관에 입학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小學』의 능통 여부를 알아본 다음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小學』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하고, 그 자신 일생 동안 『小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 불렀습니다. 이는 소학 속에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담겨져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기회가 되면 小學의 내용을 차례로 전해 드릴까 합니다.(澄懷)
《서흥김씨대종보 제47호|2008년2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