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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빛과 소금의 강단
2021년 1월 24일 / 주일 대예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로마서 10장 4-13절
유명한 영화 ‘대부’(The Godfather) 제3편은 주인공인 마이클 콜레오네가 마피아 세계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마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 와중에서 콜레오네의 아들은 아버지와 결별하고 독립적인 길을 걷지만 그의 딸은 끝까지 아버지의 곁에 남습니다.
그런 까닭에 딸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던 콜레오네는 어느 날 그녀에게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지옥불 속에라도 들어가마.”라고 약속합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 콜레오네는 가족들과 함께 오페라를 관람하고 연주회장의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암살범의 총격을 받게 되는데, 콜레오네의 딸이 그 중의 한 발을 가슴 한가운데에 맞게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콜레오네 쪽으로 돌아보면서 “아빠!”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집니다.
하지만 콜레오네는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외동딸이 자기를 부르는 마지막 외침에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지켜 주기 위해서 자신이 ‘지옥불에라도 들어가겠다’고 했던 그였지만, 그저 자기 품에 안겨 죽어가는 딸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단 마피아 대부뿐 아니라 세상에서 그 어떤 부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부상이 심하거나 병이 위중한 경우에는, 심지어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구조대원이나 의사조차 그저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한 사람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절대로 죽게 하지 않으시는, 100퍼센트 확실한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도와 선교의 달’인 2월을 맞이하게 된 첫 주일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해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보장이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다른 구조 요청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본문 4절부터 7절에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율법’ 하면 오늘날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에게는 일단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이지만, 사실상 율법 그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한 형태이며, 여기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것처럼 그것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분명히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래서 율법은 그 대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킬 도리가 없는 죄인인 것을 겸손히 깨닫고 인정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율법은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필요했던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화육강세와 함께 율법은 그 역할을 다 마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즉 ‘죄에 대한 형벌이 공의롭게 집행되기 위하여’ 죄인을 대신하여 당신께서 스스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런 십자가 대속을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이 없는 율법의 약점을 완전히 채우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일 것도, 의존할 것도 전혀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6절과 7절의 말씀은 신명기 30장 11절부터 14절에 기록된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과 그대로 일맥상통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거나 무저갱에 내려가서’ 예수님을 직접 모셔 와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도, 십자가 대속도, 부활승천도 다 이루어졌습니다.
즉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일들은 이미 예수님 편에서 다 ‘마쳐’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무슨 선행의 공로를 쌓거나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 정진 따위를 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고, 오로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나면 반드시 바로 그 자리에서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부상당한 사람을 도와준다고 섣불리 움직이게 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기 때문에 그저 경찰이 와서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전문 응급요원들이 와서 부상자를 치료하고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빌딩 붕괴 같은 대형사고가 났을 때 통제되지 아니한 자원봉사자들이 전문 구조요원들의 작업을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오직 이 문제에 대하여 유일한 전문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맡겨야 합니다.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며, 구원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믿음직한 구조요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겠다고 헛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전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율법 준수’에 자기 생명을 걸었던 당시의 유대인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은 구세주가 아닌 교주에게 자기의 구원을 의지하고 구원의 복음이 없는 우상종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정말 다 쓸데없는 일이며 오히려 참된 구원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써 모든 헛된 노력을 종결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만 하면 다른 아무 구원주도, 다른 아무 종교도 필요 없게 됩니다.
구세주는 진정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소유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만으로 충분한 줄로 믿고, 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음’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신앙고백만 하면 됩니다.
8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은 복음이란 것이 결코 믿기 어렵거나 고백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영접하기 아주 쉽도록 이미 가까이 와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말로 신앙고백하기에도 쉽도록 “입”에도 가까이 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7절에서 보았듯이 성자 하나님 편에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 사람에게 친히 복음을 전해 주셨으며, 그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도들을 통해 그 “믿음의 말씀”을 “전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순서란 자신의 마음과 입으로 그 구세주에 대한 신앙고백만 하면 되는데,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9절의 “시인하며”라는 말은 ‘공적으로 고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신앙고백의 초점은 “예수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참된 구세주로서 자기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또한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그 신앙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까지 믿어야만 예수님을 진짜로, 제대로 믿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잘 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승리의 부활’을 빼놓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틀린 신앙이며 그런 반쪽 신앙고백은 절대로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영생 구원을 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에서는 그 믿음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신앙의 내적 작용 즉 회심과 믿음이 일어나는 곳이며, ‘입’은 신앙의 외적 작용 즉 공적 고백이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외적 고백’이 없는 ‘내적 신앙’이라는 것은 무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0장 32절과 33절에서 예수님께서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분명히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나타내는 공적 고백은 자신 속에 있는 신앙의 진실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비난과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겉으로는 부인했지만 속으로는 믿었다.’라는 말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신앙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당신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실 것이라고 이미 선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내적 신앙’이 없는 ‘외적 고백’ 역시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서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이 부류에 속하게 될 사람들이 아마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를 입만 가지고 믿었지 마음으로는 전혀 믿은 적이 없었던 교인들, 그런 ‘바리새인 통속의 외식자’들, 그런 ‘쭉정이 신자’들은 재림주께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때에’ 여지없이 날려 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른다’는 것은 이처럼 오직 예수님만을 그 믿음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며,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육체적인 부활승천을 그 믿음의 내용으로 믿는 것이며, 또한 그 예수님을 자기 마음으로 진실하게 믿는 동시에 자기 입으로 공식 시인하는 바른 방법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이런 믿음의 대상과 내용과 방법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호흡이 중단되었거나 중화상을 입은 사람을 제대로 살려내고 치료하는 방법은 오직 응급요원들과 의사들만 압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구원해 내는 방법 역시 오직 구원주만 아시는 일이며, 그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위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이나 다른 신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전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나 부활의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제일 중요한 알맹이가 빠진, 역시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가짜 신앙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바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책인 이 성경 말씀의 증거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바로 믿고 오직 이 주님만을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구원을 받고야 맙니다.
11절 이하 13절에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런 구원의 복음은 인종, 민족, 사회계급에 아무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사람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어떤 종류의 부끄러움도 당하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신자도 자기 인생을 통하여 여전히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남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아니할 분야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곧 영생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신앙인은 이 마지막 영생구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평생 열심히 믿고 살았는데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창피한 노릇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망쳐 버린 대표적인 못난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신자가 적어도 영생구원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삼재사 보증해 줍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지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다 구원하시고도 남을 만큼 구원의 능력이 무궁하시고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확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12절에 보면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 많은 사람을 구원 하게 되면 힘이 달리게 되는 유한자가 아니라, 구원해 주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혼자서 구세주가 되셔도 넉넉한 전능자이십니다.
즉 그 예수님 “한 분”만 해도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13절에서 증언하는 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너무나도 멋진 대단원에 도달하고야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고 모두 다 영생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단 한 명의 오차나 실수 없이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믿음과 구원의 인과관계를 완전무결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의사나 구조대원들은 자주 실패하게 됩니다.
맥박이 멈춘 사람의 심장에 전기 충격기를 대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도 결국 무위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물에 빠졌던 사람을 건져내 놓고 열심히 인공호흡을 했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생길 것입니다.
혹은, 아주 드물기는 하겠지만, 의사나 구조대원이 당황하거나 실수함으로써 원래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구조대원이나 의사들에게는 허탈감, 무력감, 그리고 죄책감마저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에게 그런 실패는 단 한 번도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살려 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너무나 ‘부요’하여 ‘모든 믿는 자’들을 다 살려 주셔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의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은 ‘실패 확률 제로’이며 ‘100퍼센트 성공률’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살려달라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구원해 주려 하시다가 실패하실 리가 결코 없으니, 우리 기독신자들이 그런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세상 앞에서 당할 리도 결코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이 구원은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그 결과는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놀랍고도 쉽기 짝이 없는 구원의 길을 꼭 찾고 그 영생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칭함을 받아 결국 영생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도를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종교를 찾아서도 안 됩니다.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을 구세주로 믿고, 그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 승천하셨음을 믿고, 그렇게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고백만 하면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그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앞에서 우리 예수님은 ‘다른 신’의 도움을 받거나 ‘다른 종교’와 협력해야만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반쪽 구세주’가 결코 아니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라고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오직 당신의 은혜와 능력만으로도 단 한 명도 실패하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생명을 건 포획’(Deadliest Catch)은 북빙양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대게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입니다.
언젠가 그 어선들 중 하나가 갑자기 덮친 파도에 휩쓸려 미처 구조신호를 보낼 여유조차 없이 순식간에 침몰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다른 동료 어부들은 다들 침통해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한 어선의 선장이 그 와중에도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사고 뉴스를 자기 배에 탄 어부들에게 갑판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전해 준 후에 곧 이어서 그들과 같이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그 선장은 우선 ‘비록 이런 일을 당해도 우리는 하나님 당신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다 공의로운 것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후에 ‘우리는 그저 그 사고 어선의 어부들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기만 바랄 뿐입니다.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기도를 들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불신자는 두말할 것 없고 웬만한 기독신자라 해도 그저 당황하거나 원망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선장은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과 동시에 ‘예수 구원’ 신앙을 너무나 멋있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콜레오네의 딸이 ‘아빠!’를 불렀던 마지막 외침은 아무 소용없었지만, 그 사고 어선에 타고 있던 어부들 중에 누군가가 죽기 직전이라도 ‘예수님!’이라고 한마디만 외쳤다면 그는 반드시 영생부활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주를 부르는 소리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로 비참하게 끝나고 말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소리는 평생을 죄만 짓고 살다가 한 편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던 강도의 입에서 나오더라도 반드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응답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른 구원주를 부를 필요가 전혀 없는 유일한 구세주의 이름,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성경이 가르쳐 주는 놀라운 주의 이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먼저 구원의 확신을 간직하는 가운데 이웃과 온 세상 앞에 널리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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