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 양선례
작년과 올해 목포대 평생교육원의 ‘일상의 글쓰기’에 등록하여 공부하고 있다. 이번이 벌써 3학기 째다. 현직 교원이 대상인 두어 번의 연수로 교수님의 강의 방식은 익히 알고 있다. 교수님이 내 주시는 주제로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올리고 그 내용을 첨삭받는다. 어려운 한자어나 문어체를 습관적으로 쓰거나, 일본어나 영어의 번역투 말에 익숙해져서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을 때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내린다. 반복되는 표현이 많거나 앞뒤 문장의 호응이 맞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인, 특히 교실 안에서 만큼은 왕으로 살아온 교사들은 특히 이 부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개인 블러그’나 ‘브런치’ 에 글을 쓰고, 그 글을 모아 책을 펴내기도 쉬워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글쓰기의 전략을 가르치는 책도 넘쳐난다. 그런 책의 공통점은 일단, 무조건 시작하라고 한다. 하루 아침에 몸의 근육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글쓰기도 매일 조금씩 꾸준히 써야 는다고 말이다. 교수님은 그러신다. 사람이 되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글이 글을 부른다고. 그런데 문해력의 마지막 종착점인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족적을 남긴 전문 작가들도 그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판에 나같은 아마추어는 말해 뭣하랴.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기성 작가들의 말을 믿고 꾸준히 쓰는 수밖에. 다행히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그 지름길을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어렵지만 이 좋은 걸 나만 배우기 아까워서 문해력 공부를 함께하는 동료에게 권했다. 혹시나 했는데 예상을 깨고 모두 그러마고 했다. 스무 명 남짓한 문우 중에서 무려 일곱 명이 한꺼번에 가입했다. 글쓰기를 향한 짝사랑이 오래 되었기에 한 편의 글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그런데 내 추천으로 가입한 동료의 글쓰기 내공이 생각보다 상당해서 놀랐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인이 달리 보였다. 글이 아니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동료의 어린 시절이나 가족 이야기도 새로웠다. 아무리 오래 만나도 말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이야기였다. 그 사람의 내면을 엿본 듯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만나면 화제거리도 풍성해졌다. 40쪽이 넘는 회원들의 글을 일일이 읽고 왜 그 부분을 띄어 써야 하는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교수님의 박식함과 열정에 감동했다. 다들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해 봤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여러운지 미루어 짐작이 갔다.
두 번째 학기에는 셋이 남았다. 글쓰기가 좋은 건 충분히 알겠으나 그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란다. 주말에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놀아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넷이 빠진 자리에 오래 같은 모임에서 활동했던 언니와 그 동료가 가입하여 우리 팀은 다시 다섯이 되었다. 수업은 줌을 이용하여 비대면으로 진행된다. 각자가 쓴 글을 교수님이 첨삭한 후 일일이 복사하여 나눠주던 대면 수업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종이도 시간도 절약되니 일석이조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전남 동부에 사는 내가 수업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 몬 무서운 흑사병(페스트)에 비유되는 코로나 준 유일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교수님의 강의는 종종 삼천포로 빠진다. 특히 정치권 이야기를 할 때는 아슬아슬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다. 생각은 보수화되고 행동은 조심스러워진다. 그런데 교수님은 거침이 없다. 앞서 세상을 산 사람의 지혜를 배운다. 카페에 올라온 진보 성향의 논객들이 쓴 글을 읽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글쓰기를 하면서 얻는 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수필은 결국은 그 사람이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일에서 소재를 찾는다. 안목을 높이는 다양한 경험이 좋은 글을 쓰는데 밑천이 된다.
3학기가 시작되었다. 첫날은 교수님의 강의로 세 시간을 채운다. 원격 수업은 대면 수업에 비해 집중 시간이 짧다. 원격 수업 20분이 대면 수업 한 시간과 맞먹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집중력은 떨어지고 눈은 침침하다. 최근 들어 안과에 다닐 정도로 부쩍 심해진 안구 건조증 때문이다. 화면 한 쪽에 떠 있는 내 얼굴을 보는 것도 곤욕이다. 조명에 따라 퍼진 찐빵이나, 열 살쯤 더 들어 보이는 얼굴이 된다. 그런데도 차마 화면을 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지사지의 마음 때문이다.
언젠가 비대면 줌 강의를 할 때였다. 수강생 스무 명 중 화면을 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세 시간의 강의가 끝나고 녹초가 되었다. 반응해 주는 사람이 없는 빈 화면을 보고 홀로 떠드는 고통이 상당했다. 왜 이 강의를 한다고 했을까 자책했다. 비록 온기없는 인터넷 공간이지만 화면으로나마 서로를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그때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만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기에 그런 노력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글쓰기 반에는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나 같은 사람이 과반수가 넘는다. 알아야 잘 가르칠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부지런히 배워 다시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는 사람들이니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건 늘 진리니까. 또 힘든 농사일 틈틈이 땅과 풀꽃과 하늘과 눈 맞춤하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진짜 농부, 대식구 품어 안으며 그 많은 일을 어찌해 낼까 싶게 바쁘게 사는 생활인, 주말부부로 지내지만 글 곳곳에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는 가장도 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화면으로 만나는 그 분들은 이웃처럼 반갑고 정겹다. 15회기, 45차시나 함께 공부했는데 거리에서 마주치면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사이로 남는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으랴.
오래 전부터 꿈을 꾸었다. 정년을 삼사 년 남겨두고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수필집 한 권을 내는 일이다. 어쩌면 일상의 글쓰기 수업이 그 시간을 당겨줄 지도 모르겠다. 글 스승인 교수님께도 글 한 편 써 주십사 부탁해야지. 그리고는 함께 공부한 글벗, 들판을 걸을 때나 허방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나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지지를 보내준 사람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거야. 조촐하지만 의미있게. 독자가 많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뭐 어때.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에 부끄럽지 않으면, 그러면 된 거니까. 그러려고 풀벌레 소리 요란한 새벽 두 시에 이렇게 깨어있는 거잖아. 꿈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청춘이다.
첫댓글 우와!! 멋진 글 감사합니다.
우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 전부터 꿈꾸고, 짝사랑하며 키워 온 힘이 배어있어서 선생님의 글을 읽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며 좋은 글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저도 선생님 글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게다가 제 절친의 친구라니요.
머잖아 선생님과도 친구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재미나게 공부할게요.
선생님 글은 항상 샘이납니다. 이렇게 완벽한 실력자도 공부를 하는구나 싶어서 더 열심히 할마음을 낸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빨리 수필집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출판기념회도 꼭 가고 싶어요. 항상 응원할게요.
선생님 글은 편안하게 술술 읽힙니다. 좋은 글에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