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22) 광종 2
*멀리 뛰고자 웅크린 세월, 드디어 날개를 얻다....
어느 정도 정세의 안정을 이룬 광종은 임금으로서의 지위와 위엄을 확고히 하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유지하면서도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는 중국에 종속된 국가가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에 알리고, 임금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려 내부에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호족들과의 갈등과 왕족들 간의 갈등을 방치해 둔 채 스스로를 다스리고 나라를 안정시키느라 상당한 세월을 보낸 광종은 956년 즉위 7년 만에 드디어 개혁의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는 집권초기부터 개혁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7년 동안 어느 정도 개혁안을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7년의 세월을 내실을 다지면서 좌우 눈치를 봐가며 앞으로 펼쳐나갈 정책의 밑그림을 면밀하게 그려왔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후 좌우를 살펴보아도 그가 생각하는 개혁정치를 도울 만한 신하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당시 광종의 주변에는 개국 초에 공을 많이 세운 신하, 다시 말해서 개국공신이나 그들의 자손 혹은 지방호족의 피붙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정계의 주요한 자리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사람이 문제로다.” 광종은 암담한 현실에 깊은 고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광종이 그려 놓은 개혁의 밑그림은 중앙집권적 왕권중심 국가이었습니다. 이를 실현하려면 개국공신들과 지방호족들의 힘을 완전히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의 세력이 더욱더 성장하여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통일국가를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들의 힘이 왕권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크나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광종의 눈에 확 띄는 마음에 드는 인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고려왕조실록(23) 광종 3
*날개 얻은 광종, 노예를 해방하라....
956년 어느 날,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던 광종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쌍기(雙冀)라는 자입니다. 후주의 봉책사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던 그는 병이 나는 바람에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치료 중이었는데 어느 날 광종은 그를 궁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런 인물임을 간파하고 자신의 신하로 삼게 됩니다.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 최후의 왕조로서 951년 건국된 후주는 고려의 상황과 비슷한 나라로 당시 나라의 기틀을 다져 가는 시기였습니다.
이시기에 쌍기는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쌍기에게 반한 광종은 후주의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쌍기를 자신의 신하로 삼게 해달라고 청을 하여 허락을 받게 됩니다.
이리하여 자신의 정책을 믿고 맡길 만한 인물을 얻은 광종은 나라를 개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광종은 쌍기를 신하로 받아들인 직후 노비안검법을 만들어 호족들을 압박해 가기 시작합니다. 노비안검법의 충격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이는 호족들의 존립기반 자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개혁조치입니다.
호족들은 넓은 토지와 많은 노예를 바탕으로 전국 각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광종은 이들 호족들이 가진 힘의 본질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토지와 노동력이 그들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
이 중에서 광종은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들의 노동력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보통
몇 백에서 몇 천명을 거느린 호족은 그 무수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가고 있었으며, 때에 따라 그들을 훈련시켜 군대로 동원하는 등 노비가 그들을 지탱하여주는 힘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만, 반대로 왕권에는 중대한 위협 요건이었던 것입니다.
노비안검법의 핵심은 원래 양인이었으나 노비가 된 자들을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준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노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삼국시대부터 노비의 신분이었던 자들은 극소수이었습니다. 대부분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된 자들이거나 호족들에 의해 노비신분으로 전락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호족세력의 몰락을 뜻한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호족들의 거센 반발은 자신들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입장이므로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심지어는 광종의 비인 대목왕후(大穆王后)까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폐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경종 때 호족들의 반발이 더욱 격화되자, 그 무마책으로 987년(성종 6년)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이 실시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노비안검법은 지속적으로 추진이 됩니다.
양민들의 반발에 대한 무마정책의 하나로 채택된 노비환천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양인이 된 자들을 무조건 다시 노비신분으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고, 옛 주인을 경멸하는 방량(放良)노비와 공로가 있는 노비로서 나이 40세 이후에 방량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본 주인을 모욕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자 및 옛 주인의 친족과 서로 싸우는 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외조항으로 노비로서 본 주인을 대신해 전쟁에 나간 자 또는 본 주인을 대신해 3년의 여막(廬幕, 묘를 지키기 위해 묘지 옆에 지은 움막)을 산 자를, 그 주인이 담당관청에 보고하면 그 공을 헤아려 나이 40이 넘는 자에 한하여 면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노비환천과 아울러 다른 사람의 도망노비를 몰래 숨겨 자신의 노비로 부렸던 자는 하루에 포 30척씩을 그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는 타인노비 사역가(使役價)도 책정하였습니다.
고려왕조실록(24) 광종 4
*얻은 자와 잃은 자....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한 가지는 멍하게 넋을 놓고 앉아서 가진 것을 그냥 내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호족들의 거센 반발과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게 됩니다. 7년이라는 세월을 노심초사 준비하여온 비책인데, 그대로 물러설 광종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정도의 반발과 사회혼란은 통과의례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노비에게는 국가에 대한 병역의무나 세금 납부의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사병으로 동원되어 주인의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는데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노비안검법은 이러한 개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노비의 삶을 송두리 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관청으로 달려가 노비가 되기 전에는 양인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신고만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호족들의 손에서 풀려난 새로운 양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국가에 병역 의무를 가지게 되어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결국 태조 왕건에 의해 고려왕조가 열리면서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강력한 지방호족과 왕권의 팽팽한 대립과 공생은 노비안검법의 시행과 함께 그 중심추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게 됩니다.
노비안검법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자, 광종은 쌍기를 불러들여 후주에서 실시하고 있는 과거제도의 시행을 추진하도록 합니다.
과거제도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널리 활용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표방하고 있으나 기실은 어디까지나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제도이었습니다. 과거제가 실시되기 전만 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공신들이나 호족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외형상으로 지방 호족들은 자기 지역에 한정되어 제왕처럼 군림하며 중앙의 왕권에 협력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자손들이나 친인척, 측근들을 중앙정치에 진출시킴으로써 군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제도가 전격 시행되자, 노비를 잃어 한쪽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고 주저앉은 상태에서 꼼짝 못하고 또다시 치명타를 맞게 된 바나 다름이 없게 된 것입니다.
광종의 개혁의 물살은 거세었습니다. 백관의 관복 제도를 체계화하여 서열화 시킴으로서 군왕의 권위가 더욱 높아 보이도록 개정하였는데 이는 과거제를 통하여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관료층이 탄생하면서 자연스레 시행된 제도 중에 하나입니다. 전에는 관복의 체계가 없어서 경제력이 있는 자는 좋은 옷을 입고 그렇지 못한 자는 허름한 옷을 입어 신분과 계급의 구별이 쉽지 않았는데 이제도를 시행함에 따라 임금을 정점으로 한 서열의 구분과 위계질서가 정연해졌습니다.
또한 호족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은 왕권으로부터 단절시키면서 개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쌍기를 비롯하여 귀화시킨 인물들을 개혁의 주체로 끌어 올렸으며, 차츰차츰 과거제를 통하여 선발한 신진학자층 관료들을 개혁의 또 다른 주체로 키워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