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과 인간론 중심의 신학방법은 주로 '구속사 중심'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구속사는 중요하지만 구속사만 말하면 안 됩니다. 창조와 구속이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이해가 기독교강요, 대요리문답의 설명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소개하면서 창조주와 구속주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으로 구분했으며,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안에서(고후 4 : 6)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는 적당한 곳에서 다루고자 한다."(1.2.1)라고 언급하여 기독교강요를 창조와 구속으로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제네바교리문답]도 전능한 창조주와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주로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8문: 이 모든 것을 순서로 만들어서 자세하게 이야기 해 봅시다.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9문: 그것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답: 먼저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분으로 아는 것입니다.
10문: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답: 아닙니다.
11문: 충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돕는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시거나 그의 선함을 나타내실 만한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문: 그러면 더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와 구원자가 되시기를 원하신 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도 성경 전체의 요약은 창조와 구속의 구조로 세워져 있다고 소개합니다.
문 121. 제4계명의 첫 머리에 왜 ‘기억하라’는 말이 있는가? 답: 제4계명의 첫 머리에 기억하라는 말이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안식일을 기억함으로 오는 큰 혜택 때문인데, 우리가 ‘기억함’으로 이 날을 지키려고 준비하는 일에 도움을 받으며, 안식일을 지킴으로 다른 모든 계명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고, 또한 종교의 요약을 담고 있는 창조와 구속의 두 가지 큰 혜택을 계속하여 감사히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속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루터파 방식입니다. 메이첸, 반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한 유명한 개혁파 신약학자도 이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스톤하우스는 루터신학을 평가가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신학의 한계’로 정리했습니다.
“내가 루터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루터가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하나님 중심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축소하여 빈곤하게 만든 결과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것이 신약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의미 깊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결국 축소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신약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하여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실현된 종말이나 아직 실현되지 아니한 대망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신약성경을 단순히 그리스도와 나의 구원이라고 하는 점에 국한하여 보는 사고방식으로는 성경의 종말적 메시지의 본질적인 의미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루터가 성경적 계약관(언약)에 의해서만 이해하기보다는 광범위한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조망하였더라면 적어도 은혜의 교리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 본래의 의의를 정당하게 인식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의하여 은혜의 의미도 더욱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베르카우어도 인정한바와 같이 그는 반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방식만으로는 율법의 충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성경 전체의 생생한 체계적 계시의 풍부한 내용 가운데서 적지 않게 누락되어 버리는 것을 방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개혁파와 루터파의 차이에 대해서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신론을 중심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는 개혁파와 기독론과 인간론을 중심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는 루터파의 신학원리차이라고 구별합니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반면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개혁주의자는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간다는 것이요, 루터주의자는 그 입장들을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경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루터주의자들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신학은 분명 구속주를 강조하기에 좋은 장점은 있지만 창조주를 등한시 하는 부분은 가려서 수용해야 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신학방법들이 주로 ‘성경신학’, ‘구속사적 성경해석’,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읽기’ 형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신적작정과 섭리보다는 시간역사를 성경해석의 원리로 적용하기 시작한 성경신학방법(성경신학은 성경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보는 방식)은 19-20세기에 G. 가블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먼저 사용했던 철학적 방법입니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성경신학의 문제점은 [성경신학의 위기-S 차일즈]책에 잘 소개합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성경신학은 가려서 수용하고, 자유주의적 성경신학은 멀리해야 합니다.
[신원균 목사, 분당한마음개혁교회, 대신총회신학연구원(조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