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반 사람들 / 김석수
지지난해 가을부터 매일 새벽 담빛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6시 전에 도착해서 문 열자마자 탈의실로 들어가 재빠르게 옷을 벗고 샤워실로 간다. 더 일찍 온 사람들이 항상 서너 명 있다. 서로 눈인사만 한다. 간단하게 씻고 풀장으로 가면 벌써 두 사람이 수영하고 있다. 한 사람은 키가 건장하고 체격이 좋은 중년 남자다. 그는 자유형으로 쉬지 않고 날마다 30여 분 하고 나간다. 다른 사람은 70대 노인이다. 그는 풀장에서 매일 10여 분 수영하고 밖으로 나간다. 아마 수영을 잘하지 못 한 것 같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적은 없다.
풀장 입구 반대쪽에 목욕탕처럼 온탕이 있다. 우선 나는 그곳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풀장에 몸을 담근다. 온탕에서 몸을 데우고 있으면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온다. 그중에 내 또래 여자 ㄱ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킥보드를 잡고 오리처럼 물보라를 일으키며 발차기를 한다. 그녀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멀리서 고개를 끄떡이며 늘 인사한다. 수영을 한 지 3년 됐다고 한다. 읍내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살면서 광주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 컵 먹고 삶은 달걀을 두 개 먹고 온단다. 남편은 소를 키우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수영 강사에게 가끔 개인 지도를 받으면서 매우 열심히 한다.
내가 두 번째 레인에서 발차기로 몸을 풀고 있으면 중앙에 고급반 사람들이 와서 자유영으로 물살을 가른다. 그중에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ㄷ의 행동 때문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다. 처음에 오자마자 내가 고급반으로 왔다고 일종의 ‘텃세’를 부린 것이다. 등록하기 전에 강사에게 물었더니 접영을 할 줄 아니 고급반으로 가라고 해서 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상급반을 거쳐 올라와야지 무턱대고 고급반으로 왔다고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고급반은 남자 셋이고 여자가 넷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운동해온 것 같다. 쉬는 시간에 서로 물장구를 치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ㄷ은 다른 남자 얼굴에 가끔 물을 뿌리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짓을 하기도 했다. 헤엄을 칠 때도 배려하지 않고 내가 조금 뒤처지면 여지없이 앞질러 가곤 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수영장에 나갔다.
며칠 지나서 아내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 집에 와서 아내는 두 여자가 샤워실에서 내 얘기 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ㄷ이 ㄱ에게 내가 수영도 잘하지 못하면서 고급반에 들어왔다고 험담을 하더라고 했다. ㄷ이 주로 말을 하고 ㄱ은 듣고 있었다. 아내는 ㄷ이 내가 70세로 보인다고 하더라면서 나를 놀렸다. 나는 ‘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 이후로 ㄷ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게 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몇 달 뒤 여느 때처럼 발차기를 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게 다가와 ‘단톡 방’을 개설하려고 하니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서 접수대에 맡겨 놓으라고 했다. 서먹서먹하게 지내서 내키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보는 얼굴이라 응해 주기로 했다. 얼마 후 ‘새벽반’ 카톡에 초대되었다. 카톡 프로필을 보니 새벽반에 다양한 사람들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맨 앞에서 수영하는 ㅅ은 20여 분 떨어진 다른 지역(군)에 살면서 매일 영어 방송을 들으면서 온다. 몸매가 짱짱하다. 물 찬 제비처럼 접영을 한다. 조기 축구를 30년 하고 철인 삼종 경기에 도전해서 여러 번 완주했다. 생활체육 수영 경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접영을 시작하면 큰소리로 기합을 넣는 버릇이 있다. 코로나로 수영 강사가 없으면 그가 훈련반장이다. 사람이 모이면 앞에서 물살을 가르고 다른 사람에게 뒤를 따르라고 한다. 내 어설픈 동작을 지적해 주기도 한다.
ㅈ은 허리가 아파서 가끔 풀 브이(pull buoy)를 가랑이에 끼고 헤엄친다. 그는 나와 갑장이다. 광주 근교 전원주택에 살면서 시내에서 인생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상담한다고 하길래 처음에는 심리 상담사인 줄 알았다. 사주나 관상을 봐 주는 철학관을 운영하는 것 같다. 수영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내게 늘 차 한잔하고 가라고 한다. 정이 많고 감정이 풍부하다. 금융계 종사하다 퇴직하고 심심풀이로 인생 상담을 하면서 즐겁게 산다. 며칠 전 새벽반 회원 ㅁ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처음으로 파마했다면서 자랑했다.
처음 내게 까칠하게 대했던 ㄷ은 카톡으로 가끔 이런저런 소식을 전달하고 의견을 내놓는다. 회원 수모(수영 모자)를 주문하고 담빛 카페에서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카톡 공지에 회원들의 응답이 없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 덕분으로 카톡 방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과 친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해 보니 그녀는 말을 많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례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내가 회원들 커피값으로 약간의 돈을 카페에 맡겨 두었더니 복 많이 받을 것이라고 전체 카톡 방에 알려 주기도 했다. 새벽반 사람들과 만나 서로 소통해 보니 그동안 서먹했던 마음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속 좁은 내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