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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공간의 메타포, 自影
-『김해문학』(2013년)을 읽고
김지숙(문학평론가)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곳은 공간이다. 이 공간은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으로 구분되며, 우리는 이들 두 공간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가시적 공간에는 흙 물 공기 식물 동물 광물 등이 있으며, 비가시적 공간은 인간의 내면에서 경험이 가능하며 신체와 인격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시공간 안에서 변화하며 후자의 경우는 비선형성을 지닌다. 오늘날 이 두 공간(space)의 경계는 흐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공간은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살만한 장소(place)로 바뀌어 간다.(Kastern Harris 1982) 한편, 인간의 몸은 소우주로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의 섭리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형체를 지닌 존재로 가시적인 공간과 비가시적인 공간을 동시에 보고 느끼는데 이는 인간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느끼고 경험한 에너지들이 주변 환경과 더불어 체득된 언어로 만들어 낸 사유의 결정체가 바로 시이다. 따라서 시에 나타나는 공간이 인간의 내면에서 상호작용을 거쳐 장소로 인식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사유가 덧붙여진다.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사유하면서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어느 틈엔가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와 닮아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시적 공간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힘은 자신과의 내재적 만남의 정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보이는 부분을 더욱 세심하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읽어내는 눈, 그리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관점에서『김해문학』(2013년)을 읽었다. 시에서 가시적 공간은 물론 비가시적 공간으로 대표되는 내면적 공간 역시 체험 사건 시간 의미 등과의 상호관련성 속에서 복잡하고 치밀한 사유와 더불어 표현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에스프레소 검은 피가 내 혀를 적신다. 목젖 깊이 식도를 적시고 갈/비뼈를 헤집는다. 나는 네가 스며들기 좋도록 순백의 앞단추를 풀어/길을 튼다 슬픔이 울컥거린다. 무겁고 깊은 /너의 중심과 내 중심이 합/쳐 숨길 틀 때, 네가 너를 나에게 버릴 때, 내가 네 속에 나를 버릴 때,/우린 공배의 빈 점이다.//낮달 걸린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오래 골목을 흘러갔던 사/랑으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네 눈을 검은 피로 적셔줄게, 네 귀를 적/셔줄게, 네 살을 발라 근사한 무덤을 지어줄게, 어차피 죽음의 길,/에스프레소 검은 피가 내 등줄기를 타고 발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수/천의 실핏줄 예민하게 뜨고 까무라치는 한나절 누가 나를 허물었나/봐, 너의 검은 피, 허물어진 빈 집의 뒷맛이 쓰다
-송인필, 「바둑, 낮달 걸린 카페」전문
인간이 공간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단 하나의 감각은 ‘특별한 장소에 대한 감정(Michael Leonard 1969)이다. 이러한 특별한 장소감은 필연적으로 인체와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며 오랜 세월 속에서 체화되고 각인된다. 송인필의 시 「바둑, 낮달 걸린 카페」에서 화자는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카페라는 낯선 공간은 사라지고 화자는 에스프레소와 하나가 되어 간다. 에스프레소는 화자의 눈 귀 살 피 발가락의 순으로 화자의 몸을 적시고 특히 화자의 눈은 인식의 중심이 되어 사물을 꿰뚫어 보기에 이른다. 한편, 오른 눈은 미래를 왼눈은 과거를 그리고 전면을 보는 눈은 현재와 상응한다.(이승훈 1995) 화자의 인체가 에스프레소를 각성하는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살에서 실핏줄에 이르며, 이는 시간적 흐름이 감안된 채 화자의 정신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스며들’다가 ‘합쳐’지고 ‘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에스프레소는 화자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 화자에게 피 귀 살이 되는 일체의 과정을 끝으로 화자 속으로 사라진다. 카페라는 가시적 공간에서 화자는 에스프레소와 자신 간의 일체감을 음미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의 내면을 향해 치닫다보니 카페라는 가시적 공간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은밀하고도 특별한 ‘화자의 몸’이라는 장소로 바뀐다. 르네 궤농 (Rene Guenon에 따르면 인간은 구조적 특성으로 카발라(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지혜)의 장소이자 내적 장소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화자의 경우, 만물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실재(Reality)에 다가가는 정신적 접근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는 가시화된 공간에서 비가시화된 내면적 장소로 이동하면서 화자는 환상과 더불어 인체를 각성하고 화자의 몸은 에스프레소의 죽음과 화자의 삶이 공존하는 장소로 기억한다. 즉 카페라는 낯선 공간에서 화자가 마시는 ‘에스프레소’라는 메타포를 통해 비가시적인 공간인 내면으로 향하는 친밀한 장소로서 가서 자기 몸을 느끼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히 자각하는 장소를 갖게 된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이 슬픔이면/꾸역꾸역 내려가는 것은 밥//밥의 힘으로 삼켜버린 슬픔/지금은 무른 지방질 되어/내 살의 어느 단층을 이루고 있겠지// 봄날 꽃잎이 밥알인양 흩어진다/속모를 슬픔이 창자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리라//슬픔도 살아가는 일의 한조각/그래 먹는 것이 좋겠지/비극 드라마의 시청률이 더 높다는데/애잔한 발라드 곡의 인기가 더 좋다던데/견고한 슬픔일지라도 곱게 바스라지게 꼭꼭 씹어/맛있게 먹는 것이 좋겠지/꾸역꾸역 올라오는 슬픔이래도/밥과 함께 꾸역꾸역 다시 내려가기에/세 번만 삼키면 하루해가 가고/지나는 세월은 약이기에/밥 먹을 힘만 있으면/견디지 못할 슬픔은 없다
-목영해 「슬픔」전문
인간의 몸은 다양한 체험으로 타인을 경험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관계에 적합하고 이를 충족시킬 공간으로 만들어 간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은 바로 ‘자신의 신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Yifutuan 2007)는 의미이기도 하다. 목영해의 시「슬픔」에서 화자는 슬픔이 목구멍으로 치올라오지만 ‘밥의 힘’으로 그 슬픔을 삼키다보니 어느 틈엔가 그 슬픔은 ‘살’이 되고 ‘꼭꼭 씹’다 보면 ‘견디지 못할 슬픔’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확신은 화자 스스로 자신의 신체 반응에 적응하려는 현상으로 보인다. 화자의 낯선 슬픔이 어디서 왔던지 간에 화자의 몸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화자는 내면의 슬픔을 다시 눌러 삼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 슬픔을 극복한다. 또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 간다. 시에서 화자의 몸과 슬픔은 서로 ‘안정 애착관계’(Jeremy Holmes 2005)를 형성한다. 이러한 종류의 애착관계는 인간이 어떤 신체적 욕구를 느끼거나 환경적 위협을 받을 때 대인관계 문제를 경험할 때 발생한다. 시에서는 화자는 짙은 슬픔을 느끼지만 하지만 화자는 가시적 공간에서 밥을 먹으며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반복적 행동을 하는 행위들을 ‘살아가는 일의 한 조각’으로 여긴다. 자신의 몸으로 슬픔을 체화시키고 일상화하는 과정에서 비가시적 공간을 형성하는 내면의 자기 그림자인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
해님의 양산이라 / 아침에 / 물구슬로 씻고 // 별님의 방석이라 / 저녁에도 /물구슬로 닦고 // 연지에 사는 바람 / 차암 / 땀 나겠다 // 보나마나 / 바람의 손도 / 연잎을 닮아 / 물구슬 닮아 / 동그랗겠다 /파란 / 바람의 손 -선용 「바람의 손」전문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과 장소의 차이를 두고, 공간은 물리적 개념으로, 장소는 사람들의 관계가 누적적으로 개입한 곳이라고 정의를 내린다.(Henri Lefebvre 2013) 공간이 물리적 속성을 찾는다면, 장소는 삶 문화 기억 생태계 공동체와 같은 속성을 갖는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는데 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을 거부하고 측정 불가능한 것이나 체험된 것으로 이해한다. 선용의 시「바람의 손」에서는 화자가 연못에서 체험한 장소적 속성을 지닌 시공간이 나타난다. ‘연잎’을 두고 낮에는 해님의 양산으로 밤에는 별님의 방석으로 여겨 밤낮으로 공들여 닦다보니 바람의 손은 동그랗게 달았다고 여긴 점에서 바람의 손이 닿는 곳은 다름 아닌 생태계의 속성과 삶 등을 상징하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바람’은 우주의 호흡을 상징하며 보호의 힘을 상징한다.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한다. 또 연잎은 둥글기 때문에 완전성을 상징하며 존재의 영겁 회귀를 상징한다.(진쿠퍼 1978) 시에서는 ‘연못’이라는 공간과 ‘연잎 위’라는 특정한 장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우산’과 ‘방석’의 역할에 걸맞게 이 공간에서 바람이 이들을 잘 닦는 일상 적 행위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리듬 속에서 비가시적인 바람의 손도 ‘동그랗겠다’는 우산-방석-손의 관계가 내포된 의미를 토대로 비가시적 공간을 창조적 관계로 변형하며 ‘연못’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자각하는 인식의 변화를 추구한다. 즉, ‘연못’이라는 가시적 공간은 바람의 손이 드러나면서 비가시적 공간을 구현하고 있으며, 바람의 손은 비가시적 공간으로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매개가 된다.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기다리다가 오만 것들을 다 받아들였다 어제도 오늘도 아니 어쩌면 내일까지도 기다리고 맞아주는 일에 익숙해진 삶 이름모를 하얀 생각을 심장 깊숙이 찔러 넣는 순간 한참 물세례를 받고 몇 번의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또 돌아야 하는 운명. 시곗바늘이 한 칸을 지나 또 한 칸,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향기나는 향수 흥건히 바르고 또 한 번의 몸부림으로 부르르 떨다가 멈춰서는 순간 그의 임무는 끝이 아니었다. 돌고 도는 세상 속에 또 돌고 돌아야 한다는 걸 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라옥분 「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전문
명상에 이르는 길은 집중과 무의식의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이는 현재 존재를 결정하는 인상을 지우고 더 심오한 존재들을 토대로 흡수하는 것이 이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의식 상태에서 명상은 생각이 순전히 그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생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형 양상들은 외적 사물에 의존하는 만큼 고통은 멈추고 형상인 존재는 자각하게 된다. 나아가 명상이 무의식(unconscious)에 이르면 사고하는 기관이 그것의 원인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즉 생각이 머무르는 대상 명상 그 자체 행위가 하나이다.(Joseph Marechal) 이는 라옥분의 시 「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에서 볼 수 있으며 화자가 가시적 공간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몰입하는 과정에서 확인된다. 통돌이의 임무를 생각하면서 화자는 망아(忘我) 무아(無我) 상태로 들어간다. 통돌이는 비가시적인 공간이 화자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매개가 되며 소용돌이 속을 들여다보면서 화자는 자신의 본성을 더 깊고 폭넓게 체험하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한편 시에서 나타나는 장소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세탁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화자에게 세탁실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지니는 성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통돌이를 바라본다. 이로써 화자는 주어진 가시적 공간에서 벗어나 내면 세계 속으로 나아가면서 사유는 확장되어 내면의 자아와의 상호 작용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개인적 삶의 열망이나 필요 등을 세탁실이라는 가시적인 공간에서 세탁기 통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나아가 화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틈엔가 통돌이라는 가시적 공간은 사라지고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의 내면에서 나아가 무한 세계로 확장된다.
고치모양 땅콩껍질 안에서 긴 잠을 잔다/돌아누워 팔베개를 하고 구부린 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깨기 싫은 긴 잠을 잔다/셀수도 없는 수많은 사계가 지나가고, 강물이 기원전부터 버려진 황무지를 기로질러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났다가 죽어간다/거대한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 지른다/인류문화의 정점에 탄생된 컴퓨터의 소음이 시계소리보다 크게 울리며 잠을 방해할 그때였다 / 나는 좁은 내 고치모양 땅콩껍질 속이 우주의 본 모습이며 광활한 끝이 없는 크기의 우주이며, 오히려 껍질 밖이 허상이며 작고 제한된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땅콩 껍질을 부수고 일어날 수 있었다/안과 밖이 없는 어떠한 사유의 차별이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비로소 감겨졌던 눈을 뜨며 나는 긴 기지개를 편다 -김석계 「초끈이론」전문
초끈 이론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통일하기 위해 제안된 모델로 기본 입자가 미세한 끈에서 출발한다는 이론으로, 여기서 초끈이란 1Cm의 10억분의1의 크기와 끈의 굵기는 0인 상태를 일컫는다. 나아가 우주는 우리가 느끼는 넓이 길이 높이의 3개 공간 차원과 깊이(시간)차원 외에도 6개의 차원이 똘똘 말린 채로 더 존재한다는 이론의 대략이다. 김석계의 시「초끈 이론」에서 화자가 존재하는 곳은 애초에 화자가 존재하기에는 불가능한 가시적 공간인 ‘땅콩껍질’ 안이다. 하지만 화자는 생각 속에서 그 곳으로 들어가 방해받지 않고 긴 잠을 자는 동안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주가 생성되는 순간들을 맞으며 비로소 껍질을 부수고 나오니 밖이 허상이고 제한된 공간이며 안과 밖이 하나인 ‘물아일체’의 세상을 맞게 된다. ‘우주를 알려거든 가까이 있는 내 몸을 살피라’(공자)고 했고, 데모크리토스 역시 ‘인간은 소우주’라고 했다. 이유는 대우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도 원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코메니우스 역시 대우주(자연)과 소우주(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가정하여 상호연관성을 주장한다. 우주와의 관계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은 소우주로 육체는 땅, 몸의 열은 불 혈액은 물, 숨은 공기에 해당한다.(진쿠퍼 1978) 시에서 화자 역시 3개의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라는 4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우주의 차원을 경험하면서 결국 우주와 화자의 몸은 둘이 아니라는 소중함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화자는 땅콩 껍질이라는 가시적 공간을 가정한 상태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진입하여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우주를 향한 심연을 화자가 깨닫고 물아일체가 되는 양가적 사유를 하고 있다.
로댕의 사색하는 대리석 조각같다 / 걸어온 길 헤아리는 갈비뼈 아래가 묵직하다 / 상처난 고물의 틈새로 들락거리는 바다 // 휘저으며 달렸던 먼 바다의 항구의 불빛 / 이끼 낀 어창에 까치놀이 꽃 피운다 / 도요가 간호사인양 이마 짚으며 울고 -손영자 「꿈꾸는 폐선」전문
기든스(1995)의 시간 개념에 따르면 시간은 단순한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지속이자 제도의 지속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공간 역시 사회적 상호작용의 틀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손영자의 시「꿈꾸는 폐선」에서는 여행지에서 풍경으로 바라보는 ‘폐선’인지 혹은 화폭 속의 ‘폐선’인지는 종잡을 수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폐선을 화자는 사유하는 모습으로 본다. 또 그렇게 여긴 화자는 배가 걸어 온 길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폐선을 보면서 그것에 삶의 무게를 부여하는 화자의 태도는 비록 움직이지 못하는 배이지만 귀중하게 생각하고 또 움직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고 다만 아픈 것이라고 여겨 ‘도요’를 불러들여 폐선을 위로한다. 인간은 거대한 우주에 비해 연약하고 한시적인 존재이므로 의지의 한계를 수긍해야 하며 특별한 장소에 놀라기보다는 그곳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 장엄함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여행이라 했다.(Alain de Botton 2002)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장소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풍경처럼 가슴 속에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러한 짧고 강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 자신의 내면적 존재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가운데 ‘폐선’의 사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가지끝에 매달린 꽃눈 하나/꿈을 꾸고 있기에 힘든/겨울밤을 견디고 있어요//바람이 세차게 가지를/흔들어도 나에겐/더 이상 떨어질 눈물이 없어요//살을 에는 추위가/가지를 떨며 울게 하여도/몸을 감쌀 외투는 더욱 없어요//서대문 형무소에 기댄 겨울/시간이 멈추어버렸어요/수인번호 1819 -이은호, 「고드름」전문
장소는 안전을 의미하며 공간은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장소에 고착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공간이 지니는 자유를 열망하는 양가적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경험의 생물학적 토대 공간과 장소의 관계 그리고 인간 경험의 범위에서 주어진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한다.(Yi-Fu-Tuan 1999) 이은호의 시「고드름」에서 화자는 고드름을 보면서 세찬 바람이 불고 살을 에는 겨울밤에 수인번호를 받고 추위에 떠는 죄수를 떠올린다. 고드름은 계속 변화하지만 화자의 눈에 고드름은 어떤 순간 정지한 상태로 부각되어 보일 뿐이다. 고드름은 가시적 현실 공간에서 추위에 떨며 몸을 감쌀 외투조차 없는 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아 삶의 절박함을 지닌 장소에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화자의 내면은 이미 비가시적 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앙리는 빛의 영역에서 가시적인 것과 어둠의 영역에서 가시적인 것으로 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모든 것이 가시화되는 세계 속에서의 나타남이고, 후자는 어떤 세계 안에서도 어떤 세계의 방식으로도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이 직접 느끼는 내적 느낌의 체험 방식으로 드러나는 삶을 일컫는다. 핵심은 ‘자기의 나타남이 나타남의 본질’이라고 하여 자신이 감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대상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Michel Henry 1963)는 의미이다. 시의 화자 역시 가시적인 공간 속에서 비가시적인 공간을 꿈꾸고 있다. 비록 화자는 비가시적인 공간에서 따스함을 꿈꾸지만 가시적인 현실 공간에서 화자가 느끼는 신체적 감정은 ‘겨울’ ‘추위’ ‘눈물’ 등과 같이 추위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비가시적 공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수록 화자는 고드름이라는 가시적인 사물에서 떠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화자 자신의 삶의 자세를 이입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