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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정신을 가진 제자
2017. 4. 23(주일낮예배) 누가복음 9:57-62
어느날 밤 12시 정각에 맹구집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더니 누군가 느닷없이 고구마 원!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별 사람도 다 있네 하는 생각으로 전화를 끊고 맹구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밤 12시 정각에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맹구는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고구마 투! 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전화가 와서 고구마 쓰리! 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화가난 맹구는 다음날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날 12시 정각에 또 벨소리가 울렸다. 그때 맹구는 전화를 들자마자 고구마 포라고 말하려 했지? 하고 소리쳤다. 그때 수화기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이번에는 감자 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자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맹구의 기분은 어떠했겠는가? 한 아동심리연구기관에서 아이들에게 계란과 약간의 소금을 주고 계란을 세우라는 미션을 주었다. 그때 아이들은 계란을 세우기 위하여 집중하여서 어떤 아이는 성공하고, 또 어떤 아이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선생님은 개별적으로 아이와 상담하면서 다시 계란을 세워야 하는데, 소금의 양을 이전과 같이줄까? 더 많이 줄까? 더 적게 줄까? 하고 물었다. 그때 더 많이 달라는 아이도 있었고, 적게 달라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이유였다. 아이들이 소금을 더 많이 달라고 하는 이유가 앞에 실패와 성공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냥 쉽게 계란을 세우려면 소금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 많은 소금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몇 명의 아이들은 어려운 일을 해야 성취감이 있기 때문에 소금을 적게 달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 아이들의 반응이 이렇게 다르겠는가? 이 실험은 그 이유를 부모님에게서 찾았다. 그래서 부모가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 자녀들은 쉬운 것을 찾았지만, 부모가 도전적인 삶을 살면 자녀들도 성취감이 높은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실험은 부모의 삶이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제가 목사고시를 치룰 때 설교본문이 마태복음 5:1-2이었다. 산상수훈의 서론이 되는 이 본문으로 고시부 목사님 앞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때 저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라는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이 나의 아픔과 문제를 해결해 주실꺼야! 하는 기대를 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보시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보시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그때 왜 나를 보고 그냥 가버리는거야! 하면서 불평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린 사람은 무리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 그냥 가실 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간 사람을 성경은 제자라고 하였고, 그들은 산산수훈을 들을 수 있었다고 설교하였다.
저는 그렇게 설교한 후에 정말 좋은 설교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평가를 하는 목사님들이 설교에 은혜받았다고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격려도 해 주었다. 그렇게 설교평이 다 끝나갈 때 한 목사님이 그런데 강도사님 마태복음 7장 28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왜 무리라고 했을까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태복음 7:2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제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목사님은 웃으시면서 이 질문에 대하여 좋은 답을 한번 찾아보라고 말씀해 주었다. 그리고 저는 늘 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무리라고 했을까? 고민하였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마태복음 7:28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했는데, 여기서 놀라다(엑세플레손토)는 단어는 미완료이다. 그러므로 그 놀라움은 그 순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9절을 보면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놀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고백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는 그 질문에 베드로가 정확한 답을 했을 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네 혈육이 아니요,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였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이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권위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엄청난 복이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또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무리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와 무리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제자인가? 무리인가? 13세기 세계 판도를 뒤흔들었던 칭기즈칸은 유목민이었다.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변방의 한 부족에 불과했던 몽골족이 대제국으로 전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통일로 그들이 강성해진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 몽골족이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땅을 찾아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부족통일 이후에 멈추어 서지 않고,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속도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는 더 좋은 땅에 대한 기대가 결국 몽골제국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몽골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제국을 형성했던 나라들은 정착한 민족이 아니라, 모두 꿈을 찾아서 이동하는 나라였다고 한다. 앗시리아, 바벨론, 그리스, 로마제국은 모두 꿈을 찾아 이동하면서 제국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정착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을 노마드정신이라고 한다. 라틴어로 유목민이라는 뜻을 가진 노마드는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살아가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노마드정신으로 보면 정말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4대 문명의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는 문명이 발달되어져 있었고, 또 거기에는 비옥한 땅과 맑은 물이 흐르는 사람이 살기에 제일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좋은 땅에 머물러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여서 아브람이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더니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에게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미디안에서 40년동안 처가살이하고 있었다. 처음에 미디안광야로 왔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란 모세는 많이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4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이제 모세는 소모는 일과 텐트 안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익숙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게 자신의 익숙함을 버리고 노마드정신으로 살았던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과 함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사도바울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환란과 핍박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한 때에 마침 에베소장로들이 바울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르는 척하면서 에베소를 향하여 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결박되어 로마로 가서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전세계로 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바울은 모두 노마드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노마드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유머 중에 질투나는 여자 시리즈가 있다.
10대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도 않나고 예쁜 여자
30대 결혼 전에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하고 살았는데, 시집 잘 가서 잘 사는 여자
40대 골프치며 자기 놀 것 다놀고 쏘다녔는데, 자식 공부 잘하는 여자
50대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여자
60대 건강도 타고 났는데, 돈복도 타고 난 여자
70대 재산 엄청 남기고 남편이 죽은 여자
사람이 질투를 한다는 것은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나오지 않는 사람, 또 건강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을 질투할만큼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백성인 저와 여러분이 정말 부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8:18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서기관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라고 부르는데, 이 사람은 제자라고 불렸고, 또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이 사람은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왜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장례문화를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내에 장례를 치룬다. 왜냐하면 환경적으로는 날씨가 너무 덥기 때문에 시체가 빨리 부패하고, 또 그들의 신앙적으로 볼 때는 사람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빨리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내에 장례를 치루는 것을 1차 장례라고 한다. 이 장례를 치루고 30일동안 유대인들은 애도기간을 가진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장례절차에 따라 무덤으로 간다. 그래서 살은 썩고 남아있는 뼈를 추슬러서 공동묘에 넣는다. 이것이 2차장례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사람을 부를 때는 언제를 말하겠는가? 학자들은 2차 장례를 남겨두었을 때 이 사람을 불렀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따라가겠다는 말은 지금 당장 급하지도 않는 일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눅 9:60)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2번째 이야기이다.
그러면 첫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 번째 이야기는 마태복음 8장을 참조하면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실 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깜짝 놀란 서기관은 예수님처럼 그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잘 가르치는 예수님의 삶은 무일푼이다는 것을 말씀하시므로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가족과 작별을 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는 것이다.
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한국시사저널에 한국교육문제를 이야기하는 글이 게재되었다.
한 그리스도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신의 아이가 서울대학에 가고, 지옥불속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스도 어머니가 대답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겠는가? 자녀가 삶의 핵심가치인 세상사람들은 자녀를 서울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감수하며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핵심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를 따를 때에 내게 세상적인 유익이 없어도, 또 장례를 치룰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주를 따르는 사람이 바로 제자인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서 이 땅 가운데서 안정적인 자신의 삶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제자로서의 살아가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역사를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복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김형석교수님이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썼다. 1920년생이신 김형석교수님은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면서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다.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한계가 없다. 노력만 한다면 75세까지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60이 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나와 내 가까운 친구들은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사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다. 아무리 40대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된다. 차라리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김형석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내 삶에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오늘 안주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에게는 인생의 황금기가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비록 내 나이가 60이 넘고 70이 넘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꿈과 비전을 품고 오늘도 노마드정신으로 도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는 인생의 황금기가 남아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최고 가치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꿈을 꾸고 살아서 리고 이제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하여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황금기가 날마다 더 새롭게 열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