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마을의 역사
책방마을의 사람책, 관사촌 토박이
김00(75세)
“여기가 엉꼬터야. 그래 터가 좋대.”
책방마을의 만물박사였다. 김00(75세) 씨는 말문을 열자 쉬지 않고 마을 자랑을 했다. 마을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이곳저곳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호동 관사마을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동네를 지키고 있었으니 당연하리라. 그래도 마을에 관심이 없으면 모를 텐데, 김창기 씨는 달랐다.
마을은 터가 좋다. 엉꼬터이다. 여성 엉덩이 모양의 터이다. 그래서 마을은 물난리가 없고 살기 좋다. 부자들이 집을 짓고, 관사가 이쪽에 지어진 원인이다. 풍수적으로도 좋고, 조용한 동네였다. 언덕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이어서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늘어나자 한 집 두 집짓기 시작했는데, 산을 둘러 집이 가득 찼다. 무엇보다 우물이 좋았다. 그 우물은 대원사 샘에서 내려오는 줄기라 했다.
김00 씨는 아버님이 철도청에 근무하셔서 관사에 살았다. 관사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다. 네 채씩 붙여지었다. 다다미방 하나에 온돌방이 있고 대청마루가 있었다. 화장실도 뚜껑을 닫고 열게 되었으며, 소변기 대변기가 따로 있었다. 수도시설에 목욕시설까지 있었다. 옛날에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관사는 세 군데인데, 가운데는 직위가 높은 사람들이 살았고, 양쪽 가로는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 때문에 관사의 크기가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집 내부를 개조했는데, 아직도 몇 군데 옛 모습을 하고 있는 집이 있다.
인구가 부쩍 늘어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였다. 무엇보다 고기가 잘 잡히면서부터다. 오징어, 명태, 꽁치 등 모든 고기가 풍어였다. 전국에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바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바다로 나가면 돈이 되었다. 논골담길도 그때 생긴 마을이고, 책방마을도 그때 생겼다. 모두 판자촌이었다. 개도 100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 고기가 잘 잡히고 돈이 흥청망청 돌자 술집이며, 여인숙도 많이 생겼다. 그래서 길거리마다 기생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풍어일 줄 알았다. 고기 잡아 알뜰히 한 사람은 집도 잘 짓고 자식들 교육도 잘 시켰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술 먹고 돈을 다 쓰고 말았다.
김00기 씨는 젊어서 천주교 신부가 되려다 말았다. 의사 공부를 해서 남을 돕고자 했다. 부모님이 말려서 중간에 그만두고 장가를 들었다. 나이 늦게 공무원이 되어 근무하다가 퇴직을 했다. 신부가 되겠다고 동해를 잠시 떠나 있었던 때를 빼고는 책방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해역사 이야기, 석탄 이야기, 여인숙 이야기, 철도 이야기, 항만 이야기, 논골담길의 슈퍼할머니 이야기 등 끊이지 않고 그의 말문은 이어졌다. 책방마을의 사람책이자 마을을 기억하는 해설사로 역할 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