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가 현전해야 제대로 된 발심
발심한 공덕작용에 의한 삼매
현수품에서 총 10가지로 소개
발심하면 이런 공덕 작용하고
공덕덕목 실천, 본마음이 발동
요 몇 주 동안 필자는 ‘보살문명품’ ‘정행품’ ‘현수품’을 한 단위로 묶어, 이 3품에 관통하는 주제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내게 하는 내용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무슨 일이건 발심(發心)이 중요하다. ‘현수품’에서는 발심하게 되면 생기는 공덕과 작용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경학의 용어로 이를 ‘덕용해수(德用該收)’라고 한다.
지난주 연재에서는 발심을 어떻게 하는지? ‘발심하는 양상을 노래하는 게송’ 하나를 소개했다. 저마다 간직한 ‘도덕 감정(moral sense)’에 주목하라고 했다. 자기 ‘도덕 감정’에만 주목하면 그 순간 벌써 ‘본마음’이 작동한다. ‘도덕 덕목’을 아무리 외운들 그것은 지식이다. 육법전서를 달달 외운다고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윤리 100점 맞았다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도덕 감정’이 살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방향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는 단계에, 비로소 각종 ‘도덕의 덕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도덕 덕목’을 학습해두지 않으면, ‘도덕 감정’을 당시의 상식에 맞게 사용하기 어렵다. 반가움은 ‘도덕 감정’이고, 악수나 포옹이나 절이나 합장이나 이런 등은 ‘도덕 덕목’이다. 조선 시대에 포옹했다가는 난리 난다.
발심의 공덕을 노래하는 게송을 다섯 종류로 묶을 수 있다는 말씀은 지난주에 이미 드렸다. 다시 한번 환기하면, ①발심하는 양상을 노래, ②발심의 공덕을 간단하게 노래, ③발심하면 나타나는 효과를 노래, ④열 가지 삼매(三昧, smāthi)의 위대한 작용을 노래, ⑤비유를 통한 노래, 이렇게 다섯 대목이었다.
오늘은 그중에서 ④를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결론을 앞질러 말하면 발심하면 삼매가 앞에 나타난다. 우리 스스로 발심이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삼매가 현전하지 않으면 아직 제대로 발심이 안 된 것이다. 불경에는 무수한 이름의 삼매가 등장한다. ‘현수품’에서는 발심한 공덕 작용으로 드러나는 삼매 총 10종을 소개한다. ①원명해인삼매, ②화엄묘행삼매, ③인다라망삼매, ④수출광공삼매(손에서 광대한 공양을 내는 삼매), ⑤현제법문삼매(다양하게 법문을 펼치는 삼매), ⑥사섭섭생삼매(4섭법으로 중생을 거두는 삼매), ⑦부동세간삼매(俯同世間, 자신을 엎드려 세간과 같이하는 삼매), ⑧모광조익삼매(무수한 모공으로 광명을 비춰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삼매), ⑨주반엄려삼매(주인공이 주변을 멋지게 하고 꾸미는 삼매), ⑩적용무애삼매(寂用, 고요한 작용으로 자유자재하게 들고나는 삼매). 발심의 효과로 이런 열 가지 삼매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적 체험은 밖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체험의 정당성(Validity)이 확보될 수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종교계도 반성하고 살펴야 한다.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종교 체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체험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정당화되지 않은 지식은 경험적 효과를 거둘 수 없다. ②화엄묘행삼매를 사례로 들어서 설명해보기로 한다. 번역은 역시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이다.
“부사의한 모든 세계 장엄하시고/ 그 가운데 일체 여래 공양하시며/ 끝없는 큰 광명을 널리 놓으니/ 중생을 제도함도 제한이 없네.// 지혜가 자재하여 부사의하고/ 설법하는 말씀도 걸림이 없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과/ 지혜와 방편이며 신통까지도/ 이러한 온갖 것에 자재하시니/ 부처님의 화엄삼매 힘이시니라.”
모두 10게송이다. 발심하면 나타나는 공덕이다. 만약 누군가 이런 삼매 작용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직 발심이 제대로 안 된 줄 알고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발심’도 안 되었는데, ‘깨달음’ 운운한다면 역대의 많은 성인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10게송 중에서 앞의 6구는 각각의 게송마다 하나씩 공덕 작용을 노래했고, 제7구와 제8구는 10바라밀행의 공덕 작용을 노래한다.
발심을 제대로 하면 이런 공덕의 작용이 드러난다. 역으로 이런 공덕의 덕목을 실천하면 본마음이 발동한다. 본마음 즉 ‘도덕 감정’과 ‘도덕 덕목’은 이렇게 서로 호응하고 서로를 격발시킨다. 태극 마크의 음양처럼 음이 양을 껴안고 양이 음을 껴안는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